1. 필자 소개
2. 2024 프린지 공연 비평 1) 물
•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새새스튜디오 • <이토롱의 프러포즈> 동반자
2) 루디 • <음울한 음악회> 최영열 • <유물론> 20도씨
• <연극 했다고 치기> 음이온 • <핸드폰 배터리 17%> 다이빙라인
• <사막의 피자 배달부> 극단 주의 |
3) 지혜 •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새새스튜디오,
<오-산> 2407LAB
3. 루디의 프린지 놀루와
4. 지혜의 우졔통
5. 물의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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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그럼에도 기쁘지가 않다. 뭔가 부족하다. 반짝이는 여름이 휘몰아친 후에
프린지 블루를 겪는 중이다.
루디
프린지페스티벌이 끝나고 슬퍼하고 있다.
찬 바람이 야속하다. 마음이 애리다.
한동안 여름을 그리워할 것 같다.
지혜
폐막파티 다음 날 개강을 했다.
프린지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학교생활에 기력 제로.
그래서 이번주 마감도 겨우 해냈다.
프린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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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새스튜디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8.17-18 @이너프라운지 지하 photo by.양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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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띵동
*트리거 워닝 : 정서적, 물리적 폭력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 본 연극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시작은 너무나 평범한 가족이다. 오랜만에 모인 탓에 어딘가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인사가 오간다. 그리고 무대 중앙 바닥에 정사각형으로 붙어있는 흰 테이프. 엘리베이터는 어딨지?
엄마는 언니를 데리고 쇼핑을 나선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바닥의 정사각형은 엘리베이터가 된다. 그리고 갑자기 깜빡이는 불빛, 덜컹거리는 소음. 엘리베이터의 고장에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띵동- 21층입니다. 띵동- 13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하강과 함께 언니의 스물한 살, 열세 살이 지나쳐간다. 자꾸만 신경을 긁는 동생과 그런 동생만을 싸고돌며 언니를 나무라는 엄마, 성인이 되었음에도 계속되는 아빠의 감시. 엘리베이터 내부는 환기가 이루어지니 질식할 위험이 없다는 기계음이 반복해서 나오지만, 언니는 숨을 쉴 수 없다.
어느 날, 엄마는 언니가 방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방의 문고리를 뜯어버린다. 데굴데굴 정사각형 안으로 굴러 들어간 문고리. 그와 함께 언니도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데굴데굴. 그렇게 시작된 스탠드업 코미디. 마이크는 문고리다. 언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웃긴다는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웃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질적이게도 웃는 효과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관객과 눈이 마주친 언니. 지금 비웃은 것이냐며 소리치는 언니의 모습은 엄마와 닮아 있다. 언니도 그걸 인지한 듯 멈칫 멈추어 사과를 한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니까요? 앞서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소리치던 엄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하다. 언니는 관객을 뚫어지듯 노려본다. 어쩌면 그 너머 어딘가 있는 엄마에게 닿길 바란 발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 안에는 너무나 보편적이고도 자명한 위계 및 질서가 존재한다. 그 어느 곳보다 수직적인 폭력이 가해질 수 있는 구조. 여기서 폭력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 정신적 폭력은 트라우마를 낳고 누군가는 영원히 그 속에 살게 된다. 그렇다면 가족의 전제 조건은 사랑인가. 이 억압과 통제 속에는 사랑이 전혀 없나. 다 널 위한 것이라는 말.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말. 그 모든 말이 족쇄가 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버티는 동안 발목은 점점 무거워지고 더 깊이 가라앉는다. 이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언니의 나이를 모두 지나쳐 지하 51층, 지하 53층에 도착한다. 이곳은 현재일까 아니, 현실이긴 한가. 띵동- 문이 열립니다. 띵동- 문이 닫힙니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그 열림과 닫힘 사이에 엘리베이터 안 공기는 완전히 바뀌어 있다. 언니는 가증스러운 가족의 얼굴들을 벗겨내어 칼로 푹푹 찌른다. 전부 산산조각 날 때까지. 엘리베이터 내부는 환기가 되어 질식할 염려가 없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안심하시길. 이제야 언니는 숨을 쉰다.
이로써 언니는 족쇄를 부수고, 가족을 벗어난 것일까. 띵동-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과연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까.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언니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뒤돌아 계단을 오른다. 폭력을 인지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난 공간에 발을 내딛는 일. 어쩌면 그게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언니의 삶은 온전한 자신의 발걸음으로 채워질 것 같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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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와 라디오, 콘서트, 파티 그리고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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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 <이토롱의 프러포즈 (부제: 2024 여름, 프린지에서 결혼을 외치다)>
8.15-16 @몸소리말조아라 센터 photo by.김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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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찬란한 이토롱
공연 시작 20분 전, 벌써부터 거실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곧 자연스럽게 조이의 인사로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떡볶이를 먹으며 평생 함께하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는다. 공연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즈음 주의를 집중시키는 박수 슬레이트. 맴맴- 매미가 우는 여름의 한가운데, 세 친구는 거실에 앉아 있다. 끝내주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 모인 셋은 이토록 뜨거운 여름에 뜨거운 떡볶이를 먹으며, 맵고 자극적이고 아는 맛임에도 찾게 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조이의 이야기
조이는 지지 않는 태양의 햇살 같다. 여태 사랑해 온 많은 이들은 이제 조이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조이를 통해 그들을 본다. 넓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며, 타인에게 이유 없이 응원을 건네는 사람. 재지 않고 마음을 주며, 동시에 마음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우리는 사랑하기에 닮는 걸까, 닮고 싶은 이들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우리가 충분히 닮을 수 있게 느슨하고 오래도록 연결되어 있길 바란다.
두 번째, 영롱의 이야기
관객은 5년 후의 영롱을 만난다. 사랑하는 것을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은 영롱.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나의 영감이 되어달라는 귀엽고도 솔직한 가사와 나 또한 그때까지 음악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눌러 담긴 노래를 부른다. 동반자가 꼭 인간일 필요가 있나. 평생 함께 살아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영롱은 음악을 동반자로 삼았다.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과 추락에 대한 불안감이 담긴 마지막 곡을 들으며, 높은 곳에서 떨어진 음악들은 별똥별이 되는 거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보고 소원을 비는 별똥별. 소원을 빈 모든 이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별똥별. 그렇다면 그 음악들은 영원히 살아남지 않을까. 영롱이 오래도록 그런 음악을 해줬으면 좋겠다.
세 번째, 망토의 이야기
망토의 차례. 노래도, 춤도 딱히 할 게 없다며 손이 시리게 차가운 맥주를 끌어안고 시작한 고백. 바로 이게 망토가 제일 잘하는 거다. 낭만을 소리 내어 말하는 일. 뜬금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랑을 예찬하며, 노래와 연극을 하는 시간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모든 말들이 활짝 핀 능소화 같다. 길고 긴 장마에도 보란 듯이 꽃피는 능소화. 평생 절망과 싸우며 춤을 출 망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애타게 사랑하고 말 우리.
어른이 되어 갈수록 마음이 굳어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마치 물 주는 것을 까먹은 화분의 흙처럼 표면이 말라비틀어져 쩍쩍 갈라지는 것 같달까. 그 마음들에선 아무것도 자라나지 못한다.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마음에 자꾸만 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란다. 다시 말랑해진 마음에선 내가 원하는 마음들을 키워낼 수 있더라. 그 후로는 나도 유난스럽게 타인의 마음에 물을 준다. 사막에 물을 붓는 일이라 비웃어도, 쉽게 말라버리는 마음이라 해도 계속한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
이토롱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은 관객의 차례다.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선언 같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많은 것들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애증이 될지라도 함께 잘 살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선언의 증인이 되어 옥상으로 향한다. 모두의 앞날을 축복할 결혼식을 진행하기 위해.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남의 결혼식에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름도 모르는 한 관객의 축사를 들으며 열심히 눈물을 훔쳤다. 떨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감정이 일렁이는 것과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행진. 마지막으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선 결혼식은 끝이 난다. 모든 주인공은 세 주인공과 인사를 나누고 식장을 떠난다.
이들의 공연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대사를 틀리면 테이프를 돌리듯이 자체 리와인드를 걸어 유쾌하게 넘기고, 결혼행진곡을 직접 부르며, 서로의 눈만 바라보아도 웃음이 터지는 이들의 빈틈은 관객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관객들은 그 빈틈에 누워 이들의 진심에 진심으로 응한다. 우리는 완벽함에 감탄할 수는 있어도 사랑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렇기에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이들의 빈틈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밖에.
추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요즘에는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등 공연에서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우리가 프린지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늘상 해 온 대화와 닮아 있어서. 연극이 끝나도 너희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자주 행복했어. <이토롱의 프러포즈>는 막을 내렸지만, 우리의 공연은 이제 시작일 테니까.
바다에서 거북이와 헤엄치는 망토와 그 옆에서 버스킹을 연 영롱, 외국인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함께 노래하는 조이. 나는 그 옆에서 지금처럼 너희의 모습을 소중히 기록하고 담아볼게.
이토롱 내 동반자가 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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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열 <음울한 음악회> 8.24-25 @주예소 스페이스 photo by.최영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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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면 된 거 아닌가?
공연 내내 딴생각을 했다.
가사가 없는 노래를 따라 다른 세상에 다녀왔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추억을 꺼내 먹었고, 미래를 엿보기도 했다.
사실 노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다만, 또 듣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라이브 연주를 듣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다른 차원으로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 음악에 대해 무지한 내게 좋은 음악이란 나를 금세 공상에 빠지게 해주는 음악이다.
왜 좋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하다. 그저 어떤 음악은 내게 아무런 생각도 심어주지 않고, 어떤 음악은 쉴 틈 없이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게 해 줄 뿐이다.
작곡가이자 연주가인 최영열은 말한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폭력성을 자주 느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친구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내 안에 있는 폭력성을 분출하려면 헤비메탈을 하거나 복싱 도장에 다니거나 달리거나 테니스를 배웠을 법도 한데 난 고요한 소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폭력성이라는 건 물건을 부수고,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현실도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폭력성이라는 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제목은 음울한 음악회인데 음울함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뭐랄까 폭력성과 음울함을 꼭꼭 씹어먹고 소화시킨 뒤에 음악에 담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더 자유롭게 공상을 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도레미파도 모르는 내가 음악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듣는 동안 걱정 없이 딴 상상 속 세계에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다. 음악은 잊어버렸지만, 다시 듣고 싶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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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도씨 <유물론> 8.14-25 @몸소리말조아라 센터 photo by.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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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야
‘아, 이 공연을 만든 사람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공연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관객보다 공연을 만든 사람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공연이 있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물해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결국 만드는 게 재밌어야 오래 할 수 있겠지. 이 공연은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 즐거운 거 해요. 내 이야기 해요. 내 이야기 팔아요. 들어볼래요?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내 이야기가 궁금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겠죠. 별 상관없어요. 어쨌든 이야기는 존재하고 나는 이야기해요. 즐거우니까요.”
실제 대사는 아니지만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작가들은 이야기나 등장인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흐름과 결말을 정해 놓았으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가 버린다고.
사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다음 이야기가 생각날 때가 있다. 몰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공연으로 재현된 느낌이었다. 이 공연의 주인공이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이야기였다고 대답하고 싶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야기가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한 무명작가의 이야기 경매가 열린다. 작가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고, 홀로그램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관객들에게 작가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보이는 귀신, 미뤄야 내일이 온다, 바이마트, 마이 그래비티 등 20도씨의 예전 작품인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작품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 작품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는 못했다. 공연을 봤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얼마나 즐거웠을지를 상상할 뿐이었다. 고의적인 불친절함.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궁금하면 지금부터라도 20도씨를 보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공연을 보는 내내 모르는 사람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누굴 축하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즐거운 파티.
이야기 경매가 진행되던 중 한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이야기 도굴꾼이 훔쳐 간 것이다. 사라져 버린 이야기는 팔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굴꾼이 훔칠 리가 있나. 도둑은 돈이 되지 않는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하나씩은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묶어서 팔아야지만 팔린다고. 아마 사라져 버린 이야기는 홀로도 매력적인 녀석인 것 같다.
사라져 버린 이야기를 찾던 중 한 이야기는 유물론이 없던 시대로 가고 싶다며 (아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택시에 탑승한다.
부아앙~~ 장면 전환 없이 장면이 전환된다.
다른 이야기들 역시 사라져 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유물론이 없던 시대로 함께 떠난다.
부아앙~~ 역시 장면 전환 없이 장면이 전환된다.
도착한 곳은 이야기 도굴꾼의 외장하드. 아마 택시 기사는 사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여전히 유물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이야기. 반면 작가에게 돌아가고 싶은 다른 이야기들. 그들의 토론이 시작된다.
그때 작가의 부고 소식이 들려온다. 작가는 여전히 홀로그램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가 원한다면 홀로그램의 형태로나마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작가의 것인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이야기들은 자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는다. 나는 작가의 것인가. 나는 나인가.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나? 작가가 죽으면 나도 사라지는 걸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야기와 작가는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져있다고 믿는다. 작가가 죽어도 이야기가 남는다면 작가는 살아있는 것이며, 이야기가 죽어버려도 작가가 기억한다면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무라는 건 부끄러운 작품이라도 기억해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과거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해주기도 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라 믿는다.
♫ 페미니즘, 기후 위기, 퀴어, 인류세, 신유물론, 동시대성, 실험정신 비빌 언덕 없어~ ♫
부끄러운 이야기란 무엇인가? 실험정신이 없는 이야기? 기후 위기, 인류세, 페미니즘이 담기지 않은 이야기? 팔리는 이야기만 가치가 있는 건가?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하여 부끄러운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팔리지 않는다고 하여 가치가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는 이야기를 사랑했다. 나는 부끄러운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다.
요즘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sf 단편이 유행인 것 같다. 이 유행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야기로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이 된 건 아닐까 싶다. 요즘 소설을 쓸 때 드라마화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팔리는 이야기만 쓰고 더 잘 팔기 위한 방식으로 변형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이야기의 역사는 잘 모른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유행이 있었을지도. 하지만 시대가, 대장이, 세상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지 않고 이야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공연을 보고 20도씨의 다른 공연이 궁금해진 것처럼 뻔하지 않아서 궁금한 이야기가 많이 태어나면 좋겠다.
이야기들은 이야기로 남기로 결정한다. 작가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홀로그램으로 존재하는 게 재미없다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력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이유를 입 밖으로 이야기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금세 잊어버리곤 하니까.
작가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작가는 죽었지만 이야기는 죽지 않았다.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연이 진행되며 이야기들은 점점 생기를 되찾는다. 마지막에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한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좁은 방 안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고 이야기를 하나씩 만난다. 이야기들은 좁은 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나 좀 사주세요. 나 재미있는 이야기예요.”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틀을 벗어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틀’이라는 건 우리의 무의식에 깊게 침투해 있다.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뇌를 쇠꼬챙이로 찌르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이상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아무도 그 치료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뇌를 쇠꼬챙이로 찌르는 일과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형태만 다를 뿐이다.
틀을 벗어난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다.
“나 좀 사주세요~”하는 이야기 대신 “나는 나예요~”하는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좀 더 용기를 내서 살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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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했다고 치기 | 음이온
관객과의 대화인가, 만들어진 연극인가, 관객이 만드는 연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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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온 <연극 했다고 치기> 8.24-25 @뉴페이즈 photo by.음이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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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본 공연들 모두 조금이라도 메모를 남겼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공연 내용을 잊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력은 아주 작고 귀엽다.
하지만 이 공연은 단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았다. 제목도 적지 않았다. 비평을 썼다고 치고 쉬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다.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니와 느낌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느낌마저 잊어버린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연극 했다고 치기>는 제목대로 연극을 했다고 치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시작된다. 관객은 250개의 단어 중 무작위로 선정된 25개의 단어가 적힌 빙고판을 받는다. 그 단어를 이용해 상상으로 공연을 만들고 배우에게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유니콘, 가터벨트, 노동자, 예술 등의 단어가 있다. 관객은 빙고를 채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도 공연을 보지 않았지만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공연 잘 봤습니다”
공연을 잘 봤다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웃음이 나온다. 다른 관객들은 공연을 잘 보지 못한 걸까?
“1부에서 유니콘이 가터벨트를 차고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에서 노동도 예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요? 아니면 예술은 노동이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으셨나요?”
관객의 질문에 배우는 마치 그런 장면이 존재했던 것처럼 친절히 답해준다. 관객이 원하는 것 같은 단어를 말해주기도 하고, 말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언급되어야만 하는 단어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진다. 모두가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공연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이 터진다.
관객들은 서로 공연 후기를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객으로 가득 찬 공연이라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하는 게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질문보다는 옳은 대답을 내놓는 학생이 칭찬받았다. 선생님들이 던지는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교육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점점 의문을 제기하는 건 힘든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너무 많았다.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코 내가 어렸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때로는 저항도 해봤다. 하지만 “네가 어리니까, 네가 뭘 몰라서, 말이 많다, 공부나 해라, 하라면 해라.” 등의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마치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에 굴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을 때, 옹졸한 복수가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어른에 대한 기대를 잃어갔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학창 시절에는 자신의 세상에 몰입하는 게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세뇌에 가까운 어른들의 이야기, 세상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선생님들. 아직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역시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연극 했다고 치기>를 관람하는 동안은 너무나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객석은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다른 관객의 질문에 따라 실시간으로 자신의 질문을 바꿀 뿐이었다.
어떤 관객은 최대한 개연성을 갖추어 이야기를 만들고, 누군가는 배우에게 단어를 받아내기 위해 공연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세상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바로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제시하는 모습의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내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많이 질문하고 더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진행되며 연극은 만들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했다. 분명한 건 모두가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배우, 질문을 하는 관객, 질문을 하지 않는 관객. 모두가 한패였다.
연극이라는 건 관객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촘촘히 짜인 연극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평을 쓰기 전에 공연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해설을 볼 때도 있지만, 결국 내 멋대로 해석하고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정답을 맞힐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정답은 없다.
유니콘이라는 단어가 있어야만 빙고가 완성된다면 연극에 유니콘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유니콘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관객을 울리고 싶은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관객이 울었다면, 그 관객에게는 감동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어머니가 짝퉁 게스티를 입은 모습을 보고 펑펑 울었다. 아무도 내 감정에 공감해 주지 않았지만, 그 영화는 내게 슬픈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인간은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설령 베어그릴스라 할지라도. <연극 했다고 치기>는 연극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가끔은 과연결 상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의력은 결국 경험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처럼 나라는 사람도, 연극도 수많은 존재와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없었다면 이 공연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를 미화하고 싶지 않지만, 내게 정답을 강요한 선생님이 없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없었겠지.
공연 내내 너무 즐거웠다.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할지 조금은 명확해진 기분이다. 안타까운 건 이 작품의 즐거움을 표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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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배터리 17% | 다이빙라인
배우와 연출이 함께 출연하는 2인극 혹은 3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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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라인 <핸드폰 배터리 17%> 8.23-25 @뉴페이즈 photo by.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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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꼭꼭 숨겨두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슬플 것 같기에 힌트를 곳곳에 숨겨두곤 한다. 그게 창작하는 사람의 의무이자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공연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꼭 메시지를 숨겨야만 할까? 드러내면 매력이 없는 걸까? 재미가 없어지나?’
나는 쉽게 쓰인 글을 좋아한다. 그리고 글을 쉽게 쓴다. 내가 글을 쉽게 쓰는 건 어려운 단어나 표현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에서 오는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장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연은 적당히 난이도가 있길 바랬다. (내게 적당한 난이도라는 건 집중해서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를 의미한다.)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면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거니와 공연에서 관객의 역할이 축소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메시지와 힌트를 적당히 잘 숨겨놓는 게 창작자의 역량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적당히’가 중요한 걸까? 중용만이 최고의 미덕인가?
이 공연은 메시지를 아주 친절하게 해석해 준다.
[내 마음의 지진 = 불안]
‘나는 지진을 아주 좋은 의미로 쓰는데, 공연에서는 어떤 식으로 썼을까?’
처음 지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했다. 나는 지진을 좋은 의미로 쓰는데, 공연에서는 어떤 식으로 썼을까?
하지만 배우는 너무도 친절하게 지진의 의미를 실토해 버렸다. 이러면 비유가 쓸모 없어지는 게 아닌가?
비유 =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표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해 일상적, 표준적이라고 생각하는 의미와 일반적인 수준의 연상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일상 언어와 문학 작품에서 두루 사용되지만 주로 순수한 시와 산문에서 비유는 더욱 의식적, 예술적이며 훨씬 더 미묘하게 사용되어 강한 지적, 정서적 효과를 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한 지적, 정서적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비유는 꽤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다. 아주 쉽게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고 때로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기 힘든 것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지진이라는 단어에 대한 기대가 깨지자 집중력이 떨어졌다. 배우는 그게 자신의 의도였다고 이야기하듯 다시 한번 일부러 집중력을 깨트렸다.
두 배우가 움직이던 중 갑자기 시간이 멈춘다. 구석에 앉아 있던 연출이 공연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리허설을 관객들에게 보여줄까 했어요, 지금 이 장면은 리허설 장면인데, 이걸 다 보여주면 관객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기에 재미없을 것 같아서 계획을 바꿨어요. 그럼 다시 공연을 보시죠.”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두 배우는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 지진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다시 시간이 멈춘다. 이번에는 연출이 공연의 방향을 바꾼다. 배우가 카세트테이프를 반대 방향으로 집어넣어 원치 않는 노래가 재생되었다고 말하며 노래를 바꾼다. 이 공연은 이전 공연을 재연하는 건가? 지진이라는 단어보다 연출의 이야기가 훨씬 모호하다.
어쨌든 배우는 연출의 말에 따라 카세트테이프를 반대 방향으로 집어넣는다. 트로트풍의 신나는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공연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곡이다. 배우들은 감정선을 무시하고 노래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춘다. 자기들도 왜 춤을 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많은 집단에서 분위기에 맞춰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강요한다고 해야 하려나? 다양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걸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배우들 역시 분위기에 맞춰 춤을 춘다. 그들이 춤을 추는 이유는 신나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다. 그들을 조종하는 건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연출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연출은 없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며 연출이다. 하지만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세상에 데이터가 쌓이기 때문인지, 옳고 그름의 기준은 복잡하고 깐깐해지고 있다.
춤을 추는 배우를 보며 처음에는 신이 났다. 신나는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진지한 장면인데 실수로 신나는 노래를 재생했다고 하여 춤을 춰야 하나? 나는 어떤 역할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까? 아마 나였어도 춤을 췄겠지. 아주 부끄러운 춤.
배터리가 17% 남았다면 걱정이 앞서 아무것도 못 할 거라던 주인공 지안. 17% 정도라면 많이 남은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던 지질학자. 마지막에 둘의 생각이 뒤바뀐다.
지진을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하는데 노트북 배터리가 17%밖에 남지 않았다. 지질학자는 불안해하고 망설인다. 지안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천천히 하나씩 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전형적인 클리셰!! 강한 지적, 정서적 효과는 없다!! 그럴 줄 알았는데, 마음이 움직였다. 지안과 지질학자를 움직인 건 연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진짜다.
“지진은 났을까요? 이 공연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일까요?”
지진이 났는지,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은 가짜 인생을 살았다. 친구도, 이웃도, 아내도 다 연기자였다. 모두가 트루먼을 위한 사람들이었지만 트루먼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다.
트루먼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그가 느낀 감정도 가짜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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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피자 배달부 | 극단 주의
드라마, 코미디, 모험, 성장, 메타픽션, TRPG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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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주의 <사막의 피자 배달부> 8.21-22 @뉴페이즈 photo by.양승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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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춰지지 못한 퍼즐
공연 시작 전, 술집 식탁에 누군가 앉아 있다. 그는 핸드폰을 본다. 한숨을 쉰다. 담배를 집었다 내려놓는다. 초조한 모습? 혹은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인가? 처음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연이 시작되고 자신을 피자 배달부라고 소개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나는 유일한 인간 특수 배달부!”
특수 배달부라는 건 뭘까? 배우는 시작부터 상쾌한 물음표를 던진다. 멋진 분장과 분장에 어울리는 좋은 연기. 순식간에 공연에 빨려 들어간다.
전화가 걸려 온다.
“네~ 페퍼로니 드래곤 컴퍼니 1호점입니다!”
주문이 들어왔다. 장소는 저 멀리 사막의 어떤 동굴. 특수 배달부는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가? 독특한 설정에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여정을 함께 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아마 술집 손님인 것 같다. 그런데 왜 피자 배달을 여러 명이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저들도 특수 배달부인가? 혹은 그냥 술집 손님인가?
TRPG를 플레이하기 위해 모인 손님들인지, TRPG라는 소재를 사용해 피자 배달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둘 다 인지,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 덕분에 아직은 기대로 가득하다.
모든 게 모호한 채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궁금증을 전혀 해소해 주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점점 몰입이 깨진다. 게다가 배우의 대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무대 한쪽 구석에 있는 모니터에는 개방형 자막이 나오고 있는데, 자막을 보면 배우를 볼 수 없다. 모니터와 거리가 먼 관객은 자막을 볼 수조차 없다. 대사가 들리지 않아 자막을 보느라 집중력이 떨어진다.
작품 전반적으로 힘이 많이 실렸다. 내가 알던 뉴페이즈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대를 잘 꾸며 놓았다. 좋은 분장과 분장에 어울리는 연기도 좋았다. 대사도 꽤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래서 관객이 쉴 틈이 없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많았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많은 것 같다.
다만,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어떤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는다. 옴니버스 연극이라는 느낌이 든다. 많은 단편이 접착제 없이 이어진 느낌이다.
연극 중간에 3분 동안 일종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데, 분위기가 많이 늘어진다. 이야기에 필요하기 때문에 넣은 장면이 아니라 넣고 싶었던 장면이라는 느낌이 든다.
초반부가 이후 진행될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뻔하고 설명적이어도 좋으니 이야기의 진행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짧게나마 TRPG라는 소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관객이 사전에 알아야 할 정보가 있는지를 설명해 줬다면 이후 이야기에 훨씬 쉽게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장르는 ‘드라마, 코미디, 모험, 성장, 메타 픽션’이라고 적혀 있다. 기가 막힌 설명이다! 이 작품에는 드라마, 코미디, 모험, 성장, 메타 픽션이 모두 들어있다. 하지만 섞이지는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은 ‘삐쓰까또레부르쥬미첼라햄페스츄리치즈나쵸스트링스파게티’라고 한다. 사진을 보아하니 그 음식의 본질은 스파게티인 것 같다. 이 작품의 본질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등장인물은 모두 매력이 넘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집중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살아있어서 생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분명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공연이 끝나고 아쉬움보다는 기대가 남았다. 분명 좋은 작품으로 이어질 거라 믿는다.
요즘 ‘웃수저’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나는 유행에 둔감하기 때문에 요즘 쓰이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행이 아닐 수도 있고. 내 세상의 예능은 무한도전에서 멈췄고 아이돌은 걸스데이가 마지막이었다.)
웃수저는 노력하지 않고도 사람을 웃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부분이 많았지만, 꽤 웃겼다. 힘을 빼고 농담하는 법을 익힌다면 웃음소리로 가득한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어떤 공연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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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 새새스튜디오
엘리베이터의 폐쇄성을 가족에 빗대어 묘사한 낭독극 |
오-산
| 2407LAB
복수극으로 시작해 새로운 목표를 찾는 창작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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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새스튜디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8.17-18
@이너프라운지 지하 photo by.양승욱 |
오-산 <2407LAB> 8.21-22 @극장 PL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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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형태
* 트리거 워닝 : 가정폭력을 연상케하는 대사, 상황이 묘사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가족은 다양하다. 화목한 가족, 서로를 존중하는 가족, 모든 것을 터놓는 가족, 인사만 겨우 나누는 가족, 그냥 안 친한 가족, 꼴도 보기 싫은 가족.
여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에 한 가족이 있다. 공연은 첫째 딸이 주인공임에도 막내딸을 화자로 내세워 가족 이야기를 풀어주는 낭독극의 형태다. 부모는 두 딸을 아끼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환경을 조성한다. 아빠는 딸의 통장 내역을 수시로 확인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딸’의 모습을 강요한다. 유독 순종적이지 않은 첫째 딸을 차별하고 미워하는 부모, 그리고 이를 방관하고 괴롭힘에 동조하는 막내딸.
“딸. 엄마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얼른 용서해.”
“너 엄마랑 또 싸웠냐. 아빠도 일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거다. 넌 언제까지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래?”
“언니가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나만 예뻐하는 거야. 언니 미워. 언니 없었으면 좋겠어.”
첫째 딸은 입을 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였을까? 대사 하나를 들을 때마다 내 목도 옥죄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오로지 정해진 길로만 움직일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인 ‘엘리베이터’는 곧 한국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이라는 굴레를 의미한다. 부모라는 명목하에 자녀를 통제하고, 정서적 학대를 자신의 서투름으로 치부한다. 그리곤 모두가 가족의 화목을 위해 그날들을 외면해 버린다. 그 아래서 자라난 딸은 억울하다.
“나는 내가 당한 학대를, 내가 들은 말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족이니까.
감시하고, 강요하고, 말이 통하지 않고, 얼굴만 보면 토할 것 같은 부모,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동생이 있는 삶은 그 누구보다 괴로워 보인다. 누가 이들을 피 섞인 가족이라 할까.
또 여기 ‘오-산’은 가족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주인공 오산의 복수극이다. 극의 배경은 1940년, 주인공 ‘오산’이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간 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무려 다섯 개의 산을 넘으며 시작된다. 평소 형이 그림을 좋아했던 기억을 단서 삼아 경성의 화방 곳곳을 뒤지고 다녔고 우연히 형의 화방인 ‘연화란’을 찾아 그림을 훔치려 한다. 그것은 오산이 생각한 가장 큰 복수였고 복수를 성공하면 자신도 죽어버릴 생각으로 그림을 훔쳐 달아났지만, 자신을 동생은커녕 그림 도둑으로만 보는 형에게 붙잡혀 연화란의 새 식구로 지내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연화란에는 오산의 형 홍범, 그리고 그의 제자 기순, 금강, 금낭, 태석이 살고 있고, 이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된 오산은 연화란에서 추억을 하나하나 쌓게 된다. 시간이 흘러 복수를 하려던 다짐은 점점 옅어지고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싶어진다. 내일의 해를 함께 보고 싶어진다.
“오산, 할 수 있어! 오산, 네 기억을 마주해! ”
오산은 연화란 식구들과 먹고, 자고, 그림을 그리며 응원과 용기를 얻는다. 가끔 혼도 나고 다투기도 하지만 평생 홀로 살아왔던 그는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 하나로 더 먼 미래를 기대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산은 집에서 날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곧 가족이라는 걸 깨닫는다.
세상은 넓고 가족은 다양하다. 핵가족, 확대가족, 기러기 가족, 한부모 가족, 입양가족,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족,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사람과 함께 사는 사회적 가족까지.
피가 섞인 사이임에도 남보다도 못한 가족과 피가 섞이진 않았어도 그 누구보다 화목한 연화란 식구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 된다. 하지만 나를 응원하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건 “당연히” 가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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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지페스티벌이 끝나도 프린지 공연을 즐기는 방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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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지페스티벌2024가 끝나고 못 본 공연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그런데!!!
축제가 끝나도 공연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
🎞️ 바로 공연예술 스트리밍 플랫폼 [플레이슈터] 🎞️
검색창에 ‘플레이슈터’를 검색하시거나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플레이슈터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올해 공연들도 업로드될 예정이니 다들 프린지가 끝나도 프린지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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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분들의 질문과 답장을 기다립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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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4회의 메일링 서비스 이후 다른 계획이 있나요? - 메일링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다면 읽어주실 건가요~~~~? (마이크를 건넨다.) 프린지가 끝난 물루지는 공연을 잃고 메마른 채 현생을 살고 있답니다... 아직 명확한 계획은 없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또 재미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든 여러분께 알려드릴게요.
물루지가 보내는 회신. 감기 걸린 독자님, 감기는 다 나으셨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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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롱의 프러포즈> 공연을 본 후로
‘ 동반자 ~ 동반자란 무얼까요 ~~ ‘
라는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다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대상이 있나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랑하고 싶은 무언가.
당신의 동반자는 무엇인가요?
물 : 아마도 예술 없이는 못 살지 않을까요. 정확히는 연극. 그리고 프린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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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 비평 메일링 서비스 비평이 뭔지 우리는 물루지
😘 수신거부 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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