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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ds | 잊어야 할 일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일보다 잊어야 할 일이 더 많답니다.

- alone & around

📄 1일 3매 |  최갑수

그곳이 인도든 어디든

인도에 몇 번 여행을 갔다. 조드푸르, 우다이푸르, 자이푸르 등 북부의 라자스탄 지역과 트리반드룸과 코치 등 남부 케랄라 지역. 그리고 코히마와 코지마 등의 도시가 있는 동부 나갈랜드 지역을 돌아다녔다. 델리와 다른 도시도 몇 군데 갔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어제 문득 인도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일찍 퇴근해 치과에 들렀다가 노을이 예뻐서 자유로를 따라 달렸다. 임진각까지 다녀 오는 왕복 70킬로미터. 가끔 가는 코스다. 아스팔트 위로 넘어 온 주홍빛 노을이 차창 앞유리로 번졌다. 치과 의사는 소염제를 바르며 “감독님, 이를 너무 꽉 깨물고 계시지 마세요.” 하고 말했다. “아, 전 그냥 슬렁슬렁 대충대충 살아요.” 하고 말하고 다니지만, 의사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군.


해는 도로 왼편으로 흐르는 임진강을 같은 색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봄이 깊어 숲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 숲을 보며 나는 인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숲에서 멋진 곡선으로 휘어진 뿔을 가진 물소 몇 마리가 걸어 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점점 짙어져 나는 인도의 어느 길을 달리고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에 빠져들었다.


인도에 몇 번 다녀왔지만, 지금까지 인도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애벌레를 먹었고, 엉망진창인 숙소 때문에 고생했고, 게다가 빌어먹을 ‘노 쁘라블럼’ …… 뭐, 아무튼 인도를 찾은 많이 이들이 고생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나 역시 똑같은 고생을 했다.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뉴욕과 파리, 타이베이, 도쿄, 파타고니아 정도다. 뉴욕과 파리는 (믿지 않겠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도쿄는 23년 전에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다. 타이베이는 올해 10월 여행을 갈 예정이다. 파타고니아는 언젠가 갈 수 있겠지.


그런데 문득, 갑자기 인도에 가고 싶어진 것이다. 내가 떠올린 인도의 풍경은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숙소에서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걸어 나가 해가 뜨는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강가의 허름한 카페에서 짜이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와 다시 잤다. 생각나는 건 그게 전부다.


‘인도에 가 해가 뜨는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고 싶어졌다.’ 평화누리 공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는 바이킹 앞을 주머니에 손은 넣은 채 서성였다. 말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이유였지만, 인도로 떠나야겠다는 이유로 이것만큼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을까.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옛날엔 이런 핑계를 대며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지만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여자친구와 괌이나 오키나와에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여행인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심호흡 같은 건 강릉이나 서귀포 정도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이제는 모든 걸 천천히 잃어가는 과정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이가 되면 소중한 것들이 손아귀에 쥔 모래처럼 스르륵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아무리 꽉 쥐고 있어도 소용없다. 그걸 부탄에서 알게 됐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기에 사람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탑을 맴도는 것이다. 나 역시 이렇게 저녁의 자유로를 달려와 허공을 향해 멈춰 선 바이킹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고.


반환점(평화누리 공원)을 돌아 나오는 길, 해는 어느새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자유로에는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나는 왜 갑자기 인도에 가고 싶어진 것일까. 그래도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다행이군. 인간은 말이야, 가고 싶은 곳이 없게 될 때 쇠락하기 시작하거든. 가지고 싶은 것이 없게 될 때 허망해지다가, 지키고 싶은 것이 없을 때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거든. 입 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번졌다. 그래, 일단 가보자 인도든 어디든. ✉️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작가자 편집자다. 코로나 때 여행을 못 가서 좋았는데, 지금은 슬슬 여행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쓴 책으로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ssuchoi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 혼자라는 즐거움 |  류진

자신의 멍청함을 좋아해 보는 시간

3주 만에 테니스를 쳤다. 매주 꾸준히,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받았을 때도 참 못했는데. 근 20일 만에 라켓을 잡는 오늘은 얼마나 죽을 쑬까? 잔뜩 움츠러든 마음과 달리 회전근개는 갓 기름칠한 페달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공이 라켓 면에 제대로 맞아서 나는 경쾌한 굉음이 코트를 가득 채웠다. 반년 동안 공을 치면서 한 번도 못 들어본 아름다운 소리. 강사가 엄지를 열한 번째 추켜세우며 “도대체 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했을 때, 나도 내게 그걸 묻고 싶었다.

 

사실 발리에서 돌아온 후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일상)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분주함과 악랄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밀린 일들을 마주하면서 ‘이 여행의 여운은 인천공항을 나서는 순간 끝이구나. 역시나 바뀐 건 없어.’ 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나도 오늘 내가 왜 잘 치는지 모르겠어요.” 하니, 강사가 해준 말. “몸에 힘이 쏙 빠져 있어요.”


칭찬이 쑥스러워서 “그냥 몸에 힘이 없는 거예요.”하고 말았지만, 영문이 궁금했다. 승모근과 척추, 몸 구석구석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긴장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잘 때조차 이를 앙다물고 턱에 힘을 잔뜩 넣은 채로 잠든 후 바득바득 이를 가는 사람이다. 딱히 뭘 한 게 없는데, 이상하네. 가만. 한 게 없어서 그런가?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대체 뭘 했는지, 가서 새 친구는 안 만들었는지, 밤의 펍이나 바, 클럽에서 괜찮은 이성과 말과 시간을 섞지는 않았는지 묻는 이들에게 내가 건넨 대답은 이거다. “2주 내내 그냥 나 자신과 부둥켜안고 침대랑 소파 위에서 뒹군 기분이야.” 그게 뭐 대단한 자랑이나 된다고. “그래서 좋았냐”라고 묻는 이에겐 “좋긴. 외로웠지 뭐.” 하고 대답했지만, 실은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보였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잘 정리해 둔 서랍이 있는데, 사느라 바빠서 거기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넣어서 더 이상 뭘 더 집어넣을 수 없을 만큼 꽉 찬, 어지러운 상태가 됐어. 그걸 통째로 끄집어내서 바닥에 다 쏟아. 거기에서 진짜 쓰레기를 골라서 싹 버리고, 별로 필요 없는 건 알지만 뭔가 아쉬워서,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것, 꼭 필요한 것은 챙겨서 차곡차곡 정리한 기분이야.”

 

서랍 정리를 잘한 것 같은 여행을 만족스럽게 치른 후엔 늘 이런 상태가 찾아온다.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가 갑자기 헷갈린다. 냉장고와 팬트리 속에 뭐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정신이 멀리 떠났다가 자기 자리에 안착한 것 같은 이런 상태를 몹시 사랑한다. 지리멸렬해서 패대기치고 싶었던 일상이 살짝 낯설게 느껴지는 그 상태 말이다.

 

생각해 보니 혼자 여행한 적은 정말 많지만 300여 시간을 ‘쌩’으로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운이 좋아서 (경제 관념이 별로 없어서) ‘n달 살기’라고 부르는 여행을 몇 번 했는데 대개 오래 혼자 지내게 될 것을 생각해 일부 기간이라도 친구들을 불러들이거나 현지에서 친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일 한마디도 안 해서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으로 혼자 있다 보면 기억이든 감정이든 고민이든 별걸 다 끄집어내서 곱씹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미처 몰랐던 내 모습과 마주한다. 각종 잡념 끝에 “이(찌질한)게 진짜 나라고?”까지 찍고 나면 크고 작은 두려움이 차례로 엄습한다. 아주 사소한 것, 이를테면 ‘발리 수질이 진짜 더럽다는데. 샤워기랑 필터를 가져가야 하나?’ ‘바이크를 빌려 말아? 오토바이로 인도네시아 사람 쳐서 감옥 간 한국 사람이 있다던데.’ 같은 자잘한 헛생각부터 나한테 돈 주는 사람(고용주)에게 내 시간과 영혼을 바치느라 회피했던 중요한 질문, 마땅히 맞서야 할 고민까지.

 

원하지 않아도 시시때때로, 기어이 찾아오는 그 직면의 시간에 나는 식당에서, 요가원에서, 길바닥에서, 숙소에서 맥락 없이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면 서울 가자마자 심리상담센터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굿판 벌이듯 치열하고 요란하게 그 시간들을 치른 후 돌아오니 마음이 꽤 개운하다. 종일 비에 젖은 옷과 신발로 돌아다니다 밤 늦게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숙소에서 샤워에 빨래까지 마친 후 햇빛 냄새 나는 바삭한 잠옷을 입고 차가운 맥주 한 캔 벌컥벌컥 들이켜 본 이만이 내 후련함을 알 것 같다.  

 

여행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냉소를 방어막처럼 두르고 떠났지만 이전 여행들이 진짜 좋은, 영혼이 연결된 기분까지 느끼게 해주는 친구들을 선사해 준 것처럼 이번 여정도 내게 섭섭지 않은 선물을 안겼다. 멍청한 실수나 계속 하는 나 자신을 너그럽게 품는 경험. 몸에 잔뜩 밴 힘을 한숨처럼 차분히 뱉은 시간. 혼자 여행 가는 것과 여행 가서 혼자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구나. 그걸 깨닫기 위해 수백만 원과 2주라는 시간, 굉장한 감정 노동을 대가로 지불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 

류진은 패션 잡지와 여행 잡지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다가 내 시간을 내 뜻대로 쓰고 싶어서 프리 워커가 됐다. 그게 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엔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삶을 잘 꾸리기 위해 더 많이 보고, 읽고, 겪고, 쓰고, 부딪히며 산다.  @nomad_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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