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테니스를 쳤다. 매주 꾸준히,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받았을 때도 참 못했는데. 근 20일 만에 라켓을 잡는 오늘은 얼마나 죽을 쑬까? 잔뜩 움츠러든 마음과 달리 회전근개는 갓 기름칠한 페달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공이 라켓 면에 제대로 맞아서 나는 경쾌한 굉음이 코트를 가득 채웠다. 반년 동안 공을 치면서 한 번도 못 들어본 아름다운 소리. 강사가 엄지를 열한 번째 추켜세우며 “도대체 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했을 때, 나도 내게 그걸 묻고 싶었다.
사실 발리에서 돌아온 후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일상)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분주함과 악랄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밀린 일들을 마주하면서 ‘이 여행의 여운은 인천공항을 나서는 순간 끝이구나. 역시나 바뀐 건 없어.’ 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나도 오늘 내가 왜 잘 치는지 모르겠어요.” 하니, 강사가 해준 말. “몸에 힘이 쏙 빠져 있어요.”
칭찬이 쑥스러워서 “그냥 몸에 힘이 없는 거예요.”하고 말았지만, 영문이 궁금했다. 승모근과 척추, 몸 구석구석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긴장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잘 때조차 이를 앙다물고 턱에 힘을 잔뜩 넣은 채로 잠든 후 바득바득 이를 가는 사람이다. 딱히 뭘 한 게 없는데, 이상하네. 가만. 한 게 없어서 그런가?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대체 뭘 했는지, 가서 새 친구는 안 만들었는지, 밤의 펍이나 바, 클럽에서 괜찮은 이성과 말과 시간을 섞지는 않았는지 묻는 이들에게 내가 건넨 대답은 이거다. “2주 내내 그냥 나 자신과 부둥켜안고 침대랑 소파 위에서 뒹군 기분이야.” 그게 뭐 대단한 자랑이나 된다고. “그래서 좋았냐”라고 묻는 이에겐 “좋긴. 외로웠지 뭐.” 하고 대답했지만, 실은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보였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잘 정리해 둔 서랍이 있는데, 사느라 바빠서 거기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넣어서 더 이상 뭘 더 집어넣을 수 없을 만큼 꽉 찬, 어지러운 상태가 됐어. 그걸 통째로 끄집어내서 바닥에 다 쏟아. 거기에서 진짜 쓰레기를 골라서 싹 버리고, 별로 필요 없는 건 알지만 뭔가 아쉬워서,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것, 꼭 필요한 것은 챙겨서 차곡차곡 정리한 기분이야.”
서랍 정리를 잘한 것 같은 여행을 만족스럽게 치른 후엔 늘 이런 상태가 찾아온다.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가 갑자기 헷갈린다. 냉장고와 팬트리 속에 뭐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정신이 멀리 떠났다가 자기 자리에 안착한 것 같은 이런 상태를 몹시 사랑한다. 지리멸렬해서 패대기치고 싶었던 일상이 살짝 낯설게 느껴지는 그 상태 말이다.
생각해 보니 혼자 여행한 적은 정말 많지만 300여 시간을 ‘쌩’으로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운이 좋아서 (경제 관념이 별로 없어서) ‘n달 살기’라고 부르는 여행을 몇 번 했는데 대개 오래 혼자 지내게 될 것을 생각해 일부 기간이라도 친구들을 불러들이거나 현지에서 친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일 한마디도 안 해서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으로 혼자 있다 보면 기억이든 감정이든 고민이든 별걸 다 끄집어내서 곱씹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미처 몰랐던 내 모습과 마주한다. 각종 잡념 끝에 “이(찌질한)게 진짜 나라고?”까지 찍고 나면 크고 작은 두려움이 차례로 엄습한다. 아주 사소한 것, 이를테면 ‘발리 수질이 진짜 더럽다는데. 샤워기랑 필터를 가져가야 하나?’ ‘바이크를 빌려 말아? 오토바이로 인도네시아 사람 쳐서 감옥 간 한국 사람이 있다던데.’ 같은 자잘한 헛생각부터 나한테 돈 주는 사람(고용주)에게 내 시간과 영혼을 바치느라 회피했던 중요한 질문, 마땅히 맞서야 할 고민까지.
원하지 않아도 시시때때로, 기어이 찾아오는 그 직면의 시간에 나는 식당에서, 요가원에서, 길바닥에서, 숙소에서 맥락 없이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면 서울 가자마자 심리상담센터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굿판 벌이듯 치열하고 요란하게 그 시간들을 치른 후 돌아오니 마음이 꽤 개운하다. 종일 비에 젖은 옷과 신발로 돌아다니다 밤 늦게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숙소에서 샤워에 빨래까지 마친 후 햇빛 냄새 나는 바삭한 잠옷을 입고 차가운 맥주 한 캔 벌컥벌컥 들이켜 본 이만이 내 후련함을 알 것 같다.
여행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냉소를 방어막처럼 두르고 떠났지만 이전 여행들이 진짜 좋은, 영혼이 연결된 기분까지 느끼게 해주는 친구들을 선사해 준 것처럼 이번 여정도 내게 섭섭지 않은 선물을 안겼다. 멍청한 실수나 계속 하는 나 자신을 너그럽게 품는 경험. 몸에 잔뜩 밴 힘을 한숨처럼 차분히 뱉은 시간. 혼자 여행 가는 것과 여행 가서 혼자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구나. 그걸 깨닫기 위해 수백만 원과 2주라는 시간, 굉장한 감정 노동을 대가로 지불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