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평가되는가?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어요. 교수님도 말씀하셨는데요. AI 때문에 변별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관점으로 변별력이 전환되었다고 말이죠. 기존과는 다르게 '무엇을 보는지'가 바뀌고 있어요.
페라리가 너무 많아진 도로에서 진짜 운전 실력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해요. 하나는 주행 로그 — 어디서 어떻게 핸들을 꺾었고, 어떤 길을 선택했으며, 어디서 위험을 피했는가? 또 하나는 결승점 기록 — 그래서 실제로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했는가?
이 두 가지 '기록'만이 남는것이죠. AI 시대의 자산은 결과물 그 자체가 아니에요.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의, 혹은 결과물 이후의 성과 기록이에요.
기록 ① — 과정의 기록
첫 번째는 '어떻게 답을 찾아갔는가'의 기록이에요.
저는 요즘 Claude Code와 Mem.ai를 거의 매일 씁니다. 작업을 끝낸 뒤 가장 신경 쓰는 건 결과물 자체가 아니에요. AI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가 어딘가에 남아 있느냐예요.
어떤 질문을 던졌고, AI가 처음에 어떤 잘못된 답을 줬으며, 그걸 어떻게 발견했고, 어느 시점에서 가설을 바꿨는지. 이런 대화의 흔적이 쌓이면 신기한 일이 벌어져요.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그건 누가 봐도 'AI가 혼자 해낸게 아닌 저와 함께 더 깊게 쌓아간 사고 과정'예요.
남이 쓴 보고서를 평가해야 했던 순간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결과물만 봐서는 그 사람이 진짜 실력이 있는지, AI가 다 해준 건지 구분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디서 막혔는지, 어떻게 풀었는지를 알고나면 그 사람이 실력이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AI 시대의 첫 번째 변별력은 여기서 나와요. 결과물이 아니라,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기록 ② — 시장의 증거
두 번째는 '그래서 실제로 통했는가'의 기록이에요.
이건 더 단순하지만 더 강력해요. AI로 100장짜리 기획서를 쓰는 것보다, AI로 만든 1페이지짜리 랜딩 페이지가 실제로 한 명의 고객을 데려왔다면 그게 100배 더 의미 있어요.
요즘 스타트업 씬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어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대에는, 시장에 도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일한 해자가 된다." Pieter Levels는 혼자서 만든 서비스를 만들자 마자 시장에 출시했고, 현재는 무려 $3M 의 연간 반복 수익을 내고 있어요.
이건 창업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죠. 내가 만든 자료가 의사결정에 실제로 영향을 줬다는 흔적, 내가 제안한 방향이 채택되어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기록, 내가 작성한 문서가 실제 사용자에게 닿았다는 신호. 이게 모두 두 번째 기록이에요.
회의실 안에서의 '잘 만들었다'는 칭찬보다, 한 명의 실제 사용자가 보낸 피드백이 훨씬 더 강한 신호가 되어가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