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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메일 #275 | 2026년 5월 18일 - WEEK 21

AI 시대의 새로운 평가 방법
— 중간은 사라지고 양극단만 남았다


진대연

모두가 A를 받는 시대의 비극

최근 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미로운 말씀을 들었어요. "요즘은 AI를 안 쓰고 제출되는 보고서가 사실상 없습니다." 그다음 말씀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AI를 쓰는 건 이제 기본이고, 그럼에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가 진짜 문제죠."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어요. 보고서, 기획안, 제안서, 마케팅 카피… 누군가의 책상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문서가 한 번쯤은 AI를 거치고 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모든 문서가 다 비슷하게 '적당히 괜찮은' 수준이 되어버린 거예요.
ChatGPT 생성이미지  
모두가 페라리를 모는 시대

예전엔 '적당히 잘 쓴 보고서'가 실력의 척도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게 더 이상 실력의 척도가 되지 못합니다. ChatGPT나 Claude등 AI만 잘 활용하면 누구나 평균 이상의 산출물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죠.

와튼 스쿨의 이선 몰릭(Ethan Mollick) 교수 역시 BCG 컨설턴트 758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이 현상을 발견했죠.

"다양한 분야에서 AI가 최하위 성과자의 실력을 과거의 평균 수준 이상으로,
때로는 훨씬 더 끌어올린다는 매우 강력한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

— 이선 몰릭, 와튼 스쿨 교수

실험 결과는 더 극적이었어요. AI를 쓴 그룹에서 하위 성과자는 무려 43% 성과가 향상됐고, 상위 성과자도 17% 향상됐어요. 그 결과 상위와 하위의 격차는 22%에서 4%로 줄어들었습니다.

도로 위 모든 차가 페라리가 됐어요.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더 오래 달리는지 만으로는 더 이상 운전 실력을 가늠할 수 없게 된 거죠.
ChatGPT 생성이미지  
무엇으로 평가되는가?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어요. 교수님도 말씀하셨는데요. AI 때문에 변별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관점으로 변별력이 전환되었다고 말이죠. 기존과는 다르게 '무엇을 보는지'가 바뀌고 있어요.

페라리가 너무 많아진 도로에서 진짜 운전 실력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해요. 하나는 주행 로그 — 어디서 어떻게 핸들을 꺾었고, 어떤 길을 선택했으며, 어디서 위험을 피했는가? 또 하나는 결승점 기록 — 그래서 실제로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했는가?

이 두 가지 '기록'만이 남는것이죠. AI 시대의 자산은 결과물 그 자체가 아니에요.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의, 혹은 결과물 이후의 성과 기록이에요.

기록 ① — 과정의 기록

첫 번째는 '어떻게 답을 찾아갔는가'의 기록이에요.

저는 요즘 Claude Code와 Mem.ai를 거의 매일 씁니다. 작업을 끝낸 뒤 가장 신경 쓰는 건 결과물 자체가 아니에요. AI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가 어딘가에 남아 있느냐예요.

어떤 질문을 던졌고, AI가 처음에 어떤 잘못된 답을 줬으며, 그걸 어떻게 발견했고, 어느 시점에서 가설을 바꿨는지. 이런 대화의 흔적이 쌓이면 신기한 일이 벌어져요.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그건 누가 봐도 'AI가 혼자 해낸게 아닌 저와 함께 더 깊게 쌓아간 사고 과정'예요.

남이 쓴 보고서를 평가해야 했던 순간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결과물만 봐서는 그 사람이 진짜 실력이 있는지, AI가 다 해준 건지 구분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디서 막혔는지, 어떻게 풀었는지를 알고나면 그 사람이 실력이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AI 시대의 첫 번째 변별력은 여기서 나와요. 결과물이 아니라,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기록 ② — 시장의 증거

두 번째는 '그래서 실제로 통했는가'의 기록이에요.

이건 더 단순하지만 더 강력해요. AI로 100장짜리 기획서를 쓰는 것보다, AI로 만든 1페이지짜리 랜딩 페이지가 실제로 한 명의 고객을 데려왔다면 그게 100배 더 의미 있어요.

요즘 스타트업 씬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어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대에는, 시장에 도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일한 해자가 된다." Pieter Levels는 혼자서 만든 서비스를 만들자 마자 시장에 출시했고, 현재는 무려 $3M 의 연간 반복 수익을 내고 있어요.

이건 창업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죠. 내가 만든 자료가 의사결정에 실제로 영향을 줬다는 흔적, 내가 제안한 방향이 채택되어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기록, 내가 작성한 문서가 실제 사용자에게 닿았다는 신호. 이게 모두 두 번째 기록이에요.

회의실 안에서의 '잘 만들었다'는 칭찬보다, 한 명의 실제 사용자가 보낸 피드백이 훨씬 더 강한 신호가 되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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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록을 동시에 남기는 법

그럼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저는 이걸 일하는 방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하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이제는 "과정을 남기고 결과를 검증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작게 시작할 수 있어요. AI와 나눈 대화를 그냥 닫지 말고 노트에 옮겨두세요. 그 과정과 질문들 그리고 한 줄 회고를 덧붙이면 더 좋아요. 그리고 결과물을 완성한 뒤에도 작은 출시를 시도해보세요. 트위터든, 사내 슬랙이든, 짧은 회고 글이든 좋아요. 시장(혹은 동료)의 반응이라는 두 번째 기록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AI를 단순한 대필 도구로 쓸 것인가, 가설을 검증해가는 파트너로 쓸 것인가의 차이가 되는거죠. 이 차이가 1년 뒤 우리만의 변별력을 만들어냅니다.
가장 중요한 10%

그렇다면 두 종류의 기록을 모두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무엇이 통했는지 판단하는 사람이에요.

Tinder의 전 최고 제품 책임자(CPO)였던 라비 메타(Ravi Mehta)가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했어요.

"예전엔 50대 50이었다. 잘 만드는 게 절반,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게 절반이었다.
이제는 90대 10이다. 만드는 일은 쉬워졌고, 진짜 변별력은 판단력이다."

— 라비 메타, 전 Tinder 최고 제품 책임자

AI가 90을 가져갔다면, 우리에게 남은 10은 가장 중요한 10이에요. 그리고 그 10이 만들어내는 게 바로 두 종류의 기록입니다. 무엇을 시도할지 판단했다는 과정의 기록, 그리고 그 시도가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다는 결과의 기록.

AI를 잘쓰더라도 결과물의 완성도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적당히 잘하는 사람'에 머무르게 되는거죠.

오늘 만든 작업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그 결과물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나요? 어떤 과정을 거쳤다는 증거가 있고, 누구에게 닿았다는 흔적이 있나요? 두 가지 다 비어 있다면, AI 시대에 제대로 일하고 있는게 아닐지도 몰라요.

페라리만으로는 부족해요. 주행 로그와 결승점 기록이 있어야 그게 진짜 나의 페라리예요.

  • 🎯 AI 시대의 변별력은 '결과물'이 아니라 '기록'에서 나옵니다.

  • 🔍 두 종류의 기록이 모두 있어야 해요 — 과정의 기록(어떻게 했는가) + 시장의 증거(누구에게 닿았는가).

  • ⚡ 오늘 만든 작업 하나, 어디에 어떤 기록으로 남길지 정해보세요. AI 대화 로그든, 한 줄 회고든, 짧은 공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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