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공간 속 ‘예술 앞의 나’는 너무도 쉽게 진지해져서 전시장에 갈 땐 큰 결단을 앞세워야 합니다. ‘문학 앞의 나’는 그나마 조금은 대담해요. 공감이나 상상의 타래를 이어가다가도 언젠가는 돌아갈 두 개의 지면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시장에서는 작품이 품은 이야기, 그것이 내게 건넨 질문, 그리고 굳이 작가가 선택한 그 표현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내 생각 회로를 재배열해야 합니다. 이 작품을 만들기까지 그들이 무수히 고민해 온 생각의 켜, 이렇게 보여주고자 한 눈과 손, 거기에 작가와 큐레이터의 대화 끝에 자리 잡은 전시장 속 위치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및 동선과 조명까지. 이런 물음의 끝나지 않는 꼬리잡기에 생각을 맡기다 보면 결국 아픈 무릎들이 그만 어디 가서 쉬자고 신호를 보내 전시장을 떠나고 맙니다. 전시장 문턱을 나서며 퍼즐 맞추기에 바빴던 생각의 고리들은 힘없이 긴장을 잃고 끊어지고요. 일상이 가진 관성은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위와 같은 건 아닙니다. 바쁘고 뻔한 일상 한가운데에서도 한낮에 본 작품과 전시장이 쏟아낸 이야기가 문득문득 기어코 새로운 고리를 이어보겠다고 가져오는 때가 있어요. 잠에 들기 위해 누운 순간까지 베개 위의 머리를 계속 뒤척이게 하는 무언가로 인해,  내가 평소 고민하던 것이나 바라던 것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알게 돼죠. 그렇게 전시장을 나온 뒤의 나는 이전에 나와 같은 내가 아니라는 걸.

이번 레터의 타이틀은 월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 중 아래의 문장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연예인과 관련한 해프닝을 다룬 60자짜리 타블로이드 신문 기사든, <안나 카레니나> 같은 35만 자짜리 장편소설이든, 우리가 듣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뭔가가 변화한' 이야기다.”

✉️ 전시  쿨라 링: 이야기 군도

2023년 가을, 팩토리2는 작은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한 기획전시 《쿨라 링: 이야기 군도 Kula Ring: Archipelago of Stories》를 준비했습니다. 

개인의 서사를 이루는 주변의 맥락을 다양한 방향으로 실뜨기하듯 연결해 본 이번 전시는 2007년 갤러리 팩토리에서 열렸던 《빗각서敍사事 Serendipitous Tangents》(최은영 기획)의 2023년 버전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궁극적인 힘이 다양한 상상을 끌어내는 이야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는 열린 서사성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수소, 아사코 시로키, 조성연, 최해리, 허정은 작가를 초대했습니다.

다섯 명의 작가 여러분과 두 명의 기획자인 우아름과 이경희가 숱한 대화 속에서 발견한 공통점은 ‘우연한 만남과 채집’ ‘타자와의 접촉’ ‘균형과 공존의 상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의 유희’ 등이었습니다. 이들이 전시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또 새로운 이야기의 거름이 될지 관객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사진. 김다인
기획의 글

다큐멘터리 장면 하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도나 해러웨이가 시종일관 호쾌한 목소리로 지구에서 계속해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함께 짓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지구생존가이드”다. 예쁜 나바호족 바구니를 손에 든 미국인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이 이 사물을 차지한 것은 약간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다. 바구니에 담긴 역사 전체를 물려받지 않고 바구니만을 손에 넣은 정복자의 딸이므로. 이 이야기에서 바구니는 아메리카 이주민과 원주민의 관계에서 발생한 침략의 상징이자, 탄생의 이야기를 상실한 사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사방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 미로에 빠진 것처럼, 사물의 소유를 통해 자신의 필요와 취향을 강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강화하고, 사물은 탄생 이야기를 잃는다. 나르시시스트들과 망각에 빠진 사물들이라니. 오. 모두가 외로운 세상. 

사진. 김다인

《쿨라 링: 이야기 군도》는 거울 미로에서 빠져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이다. 팩토리2와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온 작가들과 두 명의 기획자, 팩토리 2의 사람들이 모여 실뜨기 놀이하듯 턴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면서 전시를 꾸렸다. 따로 또 같이 모여 숱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작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적인 모티프가 드러났다. 우연한 만남과 채집, 타자와의 접촉, 균형과 공존의 상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의 유희. 이 키워드들은 외로운 세상을 빠져나가는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가 될 수 있을까? 

사진. 김다인

하나의 전시를 계기 삼아 만나 대화해 온 우리들의 관계에서 ‘쿨라(Kula)’라 불리는 오래된 관계가 떠올랐다. 쿨라는 뉴기니 남동부의 여러 섬 부족들 간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선물 교역이다. 두 가지의 조개장신구, 빨간 조개 목걸이와 흰 조개 팔찌가 쿨라를 통해 섬 사이를 돌고 돌면서 섬들 간에 필요한 물건들과 병행하여 교환된다. 뉴기니 부족들에게 쿨라는 삶의 필요한 것들을 아름다움 속에서 교환하는 의식적인 행사였다. 쿨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선물 받은 조개 장신구를 잠시의 기쁨으로 간직하다가 다음번 교환에 다른 이에게 선물한다. 이들의 소유는 다음번에 누군가에게 주기 위함이다. 쿨라를 통해 그들은 사물의 공동 관리자이자 분배자가 되고, 조개 목걸이와 팔찌는 어떻게 제작되고 어떤 사람들에게 간직되고 자랑이 되어왔는가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갖게 된다. 조개와 사람들과 섬들의 기억이 이 교환의 고리(Ring)에 따라붙는다. 이 쿨라의 고리에 다섯 작가의 이야기를 연결해 보자… (이하 생략) 

글. 우아름

사진. 김다인
✉️  참여 작가 소개

수소 suso

우연의 일치가 벌어지는 순간을 수집하여 시간의 흐름, 물체와 생물의 변화, 기억의 순서 등을 기반으로  주제를 정하고, 종이와 패브릭을 사용하여 여러 방식으로 조합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결국 이 과정들이 관객의 앞에 도착하는 결과의 순간은 또 다른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또한 가변적 설치를 통해 작업이 다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사코 시로키 Asako Shiroki

베를린과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 그의 작품은 자연적인 재료와 형태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행위와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역사와 문화, 관습, 동식물에 대한 인식, 물리적 현상 등 이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상호 규칙을 혼란에 빠트리고 새로운 관계를 부여한다. 개념을 포함해서 바로 있어야 할 것들이 다른 맥락에서 스스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의미를 벗겨낸다. 사물에 의해 정의된 것의 영역과 스스로 정의된 것의 영역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작업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억과 망각의 순환 사이를 오가며 여러 평행 세계를 펼쳐내 해석하고자 한다.

사진. 황인철

조성연 Seongyeon Jo

자신의 삶 안에서 관계 맺어온 대상들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를 사진과 설치 작업으로 드러낸다. 식물을 가꾸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순환의 시간들을 프레임 너머의 경작 활동을 통해 긴 호흡으로 교감하며 <발아발화>(2011-2012), <stillalive>(2015-2017), <지고 맺다>(2017-2019) 시리즈로 담아냈다. 이후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2021) 시리즈는 팬데믹을 겪으며 마주한 불안과 불편함 사이의 불완전한 감정들을 풍경과 정물사진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비롯해 사진집으로 『Arranging Life』(2018, 닻 프레스)를 출간했다.

최해리 Haeri Choi

회화를 중심으로 작업하며 장르와 매체들의 분할과 경계들을 재조정해 다원적 매체로 이루어진 작품들로 점차 시각화해 나간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다층적 시제와 다국적 문화의 뉘앙스, 개인적 아카이브와 발견된 미술사의 맥락 등을 분해하고 결합하는 재인식의 방식을 통해 비물질적인 시간에 대한 입체성을 조명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허정은 Jeongeun Heo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미지 조각들을 모아 새롭게 조합하는 작업을 한다. 책의 낱장을 오려 붙이면 평면의 종이 콜라주가 되고, 주워 온 식물들을 재조합하면 식물 조각이 된다. 버려진 사물을 모아 작은 연극 세트를 만들기도 한다. 쓸만한 것을 줍기 위해 곧잘 땅을 살피며 걷는데, 그렇게 그러모은 세상의 작은 조각에 우연인 듯 어울리는 친구들을 찾아주면 기분이 좋다.
✉️  전시 개요

전시명  쿨라 링: 이야기 군도 

기획  우아름 이경희

참여작가  수소, 아사코 시로키, 조성연, 최해리, 허정은

진행  김다은, 김다인, 김보경, 김채리

장소  factory2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기간  2023.09.15.(금)-2023.10.29.(일)

오프닝 리셉션  2023.09.23.(토) 오후 6시 (feat. 오후 5시, 아티스트 토크)

관람 시간  화-일요일, 11-19시 (휴관: 월요일, 추석 당일 9월 29일 금요일)


그래픽 디자인 모조산업 (도한결)

설치도움  손정민

번역  김솔하

주최  팩토리2 (factory2)

후원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퀀텀 인텔리전스

이번 레터에서 전하는 전시는 이미 한 주 전 시작했으나, 작가 여러분과 기획자, 그리고 전시를 함께 만든 이들이 여러 사람을 초대하여 둥글게 모여 대화하고 즐기는 시간은 추분을 맞이하는 9월 23일(토) 오늘로 정했습니다. 하지를 지나며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추분을 기점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며, 여름과 겨울을 가르는 이날의 저녁을 우리는 오곡백과(五穀百果)의 풍성함 대신 이야기로 채울 예정입니다. 보다 많은 분과 인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라라라> 윤형주 작사, 작곡, 노래 (1972)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랄랄 랄랄랄라~ 랄랄라 라랄랄라~ 

랄랄 랄랄라 랄랄랄라~ 랄랄 라랄랄라~

기획 팩토리2, 우아름, 이경희
진행 김다은, 김다인, 김보경, 김채리
디자인 김보경
에디터 뫄리아
디렉터 홍보라 
팩토리2 드림
팩토리2
factory2.seoul@gmail.com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02-733-4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