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란 무엇인가. 다음의 문장부터 살펴보자.
그는 사치를 하는 사람이야.
이 문장을 보고 처음에 드는 생각이 무엇인가. 자신을 잘 대접하는 사람인 것 같은가 아니면 돈과 물건을 헤프게 사는 사람 같은가? 사실 나는 후자가 떠오르면서 부끄럽게도 명품을 사고 고이고이 모셔 놓는 부잣집 여성까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사치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학습되어 있다.
그런 어감은 사전적 정의 자체에서도 묻어나 있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필요 이상, 그리고 지나친.
쿠폰 없이 사 먹은 5,700원 스타벅스 자허블, 1시간 반을 쏟은 내 감자 짜글이, 50만원이 든 짝꿍과의 짧은 1박 2일 여행까지. 여유롭고 감사하게 즐기고 싶은 것들이 앞에 각양각색의 수치를 달며 나를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만들었다. 죄책감을 가지게 했다.
죄책감이라는 녀석은 물 같아서 스펀지 같은 말랑말랑한 내 뇌에 닿으면 순식간에 흡수되고 말았다. 죄책감의 영단어인 shame을 발음할 때조차도 나는 뱀 같이 부드러우면서 기분 나쁜 교활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다가와 ‘나는 이런 것을 받아도, 누려도 마땅한가?’ 라고 기어오르는 그 생각은 나의 즐거움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말았다.
나는 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분수’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져 사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즐거움을 모조리 망쳐버리는 그 죄책감을 갖게 하는 나의 분수의 대하여.
네 분수를 알아야지.
나에게 내가 말한다.
나의 분수, 나의 정도, 나의 수준.
실제의 나와 이상적으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돈이나 물건, 그리고 일상의 거리가 얼마나 나를 자주 작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의 분수에 맞지 않는, 내 정도와 수준에 맞지 않는 사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필요 이상’과 ‘지나친’ 앞에는 생략되어지고 지워진 퍼센트(%)에 대하여.
괜찮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30% 필요 이상으로, 어떤 날은 70% 지나치게 나의 일상생활을 지탱하게 하는 사치들이.
그것은 나에게 언제 갈지도 모를 여행에 앞서 여권을 갱신하는 일이었고, 과제를 작업이라고 칭하고 공유 오피스를 작업실이라는 말로 치환하여 계약하는 일이었고, 내 입과 손톱 사이의 휴전을 위해 거금을 내고 네일샵에 가서 3cm짜리 플라스틱을 이어서 붙히고 예쁘라고 반짝이도 발라주는 일이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삶에게 실망할까봐 사서 걱정한다. 엄마는 공모전을 하며 괴로워하는 나에게 응원이 아닌 '꼭 그렇게 해야 돼?’ 라고 되묻고, 아빠는 대기업 1차 면접을 앞두고 초조하게 밤을 새는 나에게 전화해 늦었으니 집에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나에게 사치란,
너무 애써서 얻어야 하고, 애써도 얻어질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는 떠나 보낸 어릴적 꿈들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게 하고, 인생의 궤도가 조금 헛돌아서 아이쿠, 하고 예상치 못한 선물이 놓여있을 그럴 몹쓸 상상을 하게 하고, 못 가겠다는 여행을 가게 하고, 괴로워도 다시 한 번 브렌인 스토밍 스케치북 앞에 마음을 다 잡게 하고, 어느 날 문득 손톱을 봤을 때 피가 없는 손톱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그런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