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주 길게는 아니지만 실제로 다양한 직장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 이후 글을 쭉 써 왔지만, 글만으로는 호구지책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택배 상하차나 일용직 노동을 주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를 일하고, 다른 날에는 글을 쓰는 식이었습니다.
<이과장 생존기>의 배경이 되는 사출 공장에도 9개월 정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작중에서처럼 생산직으로 들어갔다가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사무직 전환이 됐습니다. 처음 취업 당시엔 유일한 대졸자 한국인 남성이어서 생산부장님이나 작업반장님 같은 기술직 간부들에게 집중적으로 기술을 배웠습니다. 제가 사무직이 된다고 했을 때 기술직 간부들이 엄청난 반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 당시 공장의 전 기계를 운용하고 점검할 줄 알았거든요.
🍳 그런데 어떻게 작가로 전향하게 되었나요?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작은 교습 학원을 운영하다가 실패해서입니다. 빚은 지지 않았지만 대학교 때 과외로 모은 돈을 모두 날리게 되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그냥 부모님 떡 방앗간에서 일하며 1년 정도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자주 보던 인터넷 커뮤니티에 누군가가 쓴 연재 글을 봤는데, 구성도 문장력도 엉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있는 걸 보면서 나도 한 번 써 볼까 싶었습니다.
꽤 큰 호응이 있어서 군대 시절 이야기도 썼는데 인기가 많았습니다. 제 글을 읽던 독자 중에 소설 연재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줘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다른 작가 글도 많이 봅니다. 이런 소재의 글을 내가 쓰면 어떻게 전개할까, 그럼 어떤 공부가 필요할까를 늘 고민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트리 형식으로 알게 되는 폭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생깁니다. 대체 역사 소설을 써 보고 싶어서 10개월째 공부 중인데, 처음엔 조선왕조실록을 무작정 읽는 일로 시작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있었지만, 처음엔 읽는 게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생소하고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거든요.
하나하나 단어들을 추적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히자 당시 복식사나 생활사 같은 것도 알아야 하고, 대체 역사 소설이라면 빠질 수 없는 총기류에 대한 지식이나, 당시 중국과 일본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시처럼 아는 것을 넓혀가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생깁니다. 전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연예인의 천주교식 이름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바리스타 이론을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 <이과장 생존기>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인벤토리가 생겼다>, <음모로 세계정벌>이라는 소설을 함께 쓴 적이 있는데, 두 글 모두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벤토리가 생겼다>는 선작을 만 명 이상 확보할 정도로 잘되던 글이었는데, 개연성 문제라든가 반려견 문제 등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댓글이 극심했습니다. 결국 유료화 직전인 50화에 처음부터 다시 썼는데-리메이크가 아니고 제목과 주인공 이름만 같은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습니다-실패해서 낙담한 상태였습니다. <음모로 세계정벌> 역시 유료화를 했지만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트렌드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가 잘 아는 이야기를 써 볼까 했습니다. 유료화는 기대하지 않고 그냥 취미로 <이과장 생존기>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20회까지는 죽도록 답답한 호구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중소기업 과장의 일상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까요.
🍳 주인공이 소리를 잘 들지 못하는 이명과 허물이 벗겨지듯 눈이 좋아지는 설정은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의 기술적인 부분인데, 초반에는 장르의 특성상 고난과 성취, 특수능력을 무조건 배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취미로 쓰는 글까지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아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쓰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명은 평생 가는 장애이고, 눈이 좋아진 일은 굉장히 쓸모 있는 설정이라서 후반에도 가끔 다루긴 했습니다.
🍳 작품에서 실제 경험을 녹여 낸 부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알려 주세요.
거의 전부입니다.
전 실제로 가족 기업의 사무직 과장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계속했습니다. 너무 과하게 일하다가 이명이 생긴 것도 맞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작중 이 과장은 생산직이 아니라 사무직 과장으로 바로 일하지만, 전 생산직으로 들어가서 당시 팀장(사장 아들)의 문서 작업을 도와주다가 주임을 거쳐 과장이 됐습니다.
물론 극적 장치를 위해 사장 가족과의 첨예한 갈등을 자극적으로 쓴 것도 맞습니다. 전 그냥 너무나 열심히 일하다가 귀를 다치고, 별다른 갈등 없이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당시 사장님은 제가 귀를 다치고 산재를 신청하지도 않은 게 미안하고, 고맙다면서 비교적 큰 위로금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 주인공이 초반에 과장이라는 설정도 경험에서 따온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사무실 책임자가 됐을 때 직급이 과장이었습니다. 중소기업은 대부분 원청 업체의 직원들에 비해 직급이 높은 편인데, 크게 내세울 게 없으니 직급이라도 맞춰 주려는 의도가 있어서입니다. 때문에 중소기업의 사무실 책임자가 보통 과장이 아니면, 팀장이라 주인공의 직급도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 회사에 없으면 큰일 나는 직원 1위(에디터 선정) 이과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요?
저희 아버지는 정보통신부 산하의 집배직 공무원이셨다가 현재는 떡 방앗간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떡 방앗간을 시작하신 건 할머니가 방앗간을 꽤 오래 하셔서 이미 기술이 있으셨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기술을 알고 있었던 게 아버지가 방앗간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데, 생산직으로 들어가자마자 전례가 없을 정도로 생산부장과 작업반장의 기술을 집중적으로 지도받았습니다. 원료 수급부터 기계 조작, 소모품 교체, 금형 교환과 라벨 작업까지 거의 모든 작업에 다 투입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야간조에 투입될 땐 이미 야간 책임자가 됐습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치열하게 공부했던 덕분도 있습니다. 제가 사무직 직원이 됐을 때 일이 훨씬 부드럽게 돌아갔던 건 현장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다소 무리한 잔업을 부탁할 때도, 외국인 생산직 직원들이 동료였던 제 사정을 봐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전 과장님이라는 호칭보다 형이나 오빠라고 불렸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은 제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과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를 사랑하고 전체 진행 상황, 현장 직원들의 고충을 알고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직원 기숙사에 와이파이존 설치나 빨래대 설치 같은 일은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매우 큰 호응을 얻었던 일인데,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과장이 되기 전 생산직 직원으로 일할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이 과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과장 생존기> 연재 당시 기억에 남는 독자 반응은 무엇인가요?
쌀을 보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커피나 치킨 기프티콘을 보내 주신 분도 있었고요. 정말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이 말이 안 되고 너무 답답하다는 내용에 금형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지금도 현장은 소설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편을 들어주신 일도 굉장히 인상 깊었고 감사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과장 생존기>를 보며 공감할 사람들에게 응원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사출 공장 노동자는 시급이 같습니다. 하지만 업무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좋소라고 폄훼되는 중소기업에서 버티고 일하며 전문가급 실력과 기술을 익히게 되면 평생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버티세요.
정 힘들면 한 주에 5천 원씩이라도 로또를 삽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행운의 형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또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커다란 행운이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획득할 수 있는 보험 같은 행운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행운을 모두 노린다고 해서 욕심이 많다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을 내주세요.
그리고 어느 분야든 연구와 공부는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복권 같은 행운도, 보험 같은 행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