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 이제 막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 독자님 :)

솔직히 고백하자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전기담요를 켜고 잤는데요. 어제와 그제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잤어요. 외출 전에 긴팔옷을 입다가 여름에 출몰하는 날벌레와 벌써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요. 계절과 계절 사이의 틈새 계절은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몰라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요즘에는 약간의 유예 기간을 거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요. 독자님은 유월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천천히, 다가오는 계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묵상 가이드와 짧은 편지를 보내드려요.

 박정은의 계절 ㅡ 이제 막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유월은 메리 올리버의 시 제목처럼 달력이 이제 막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느 달력을 펼쳐 보아도 유월의 달력에는 삶의 기쁨이 일렁이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 풍경도 있고, 나무 그늘 아래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정경도 있습니다. 또 제 방 달력에는 연두색 바람이 부는 길을 산책하는 어떤 소녀, 그리고 종달새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월은 조금씩 길어지는 하루 해에 여유를 가지며 새로운 절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또한 유월은 저마다 열심한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여름은 어디선가 열매들이 알알이 여물어가는 시간이고, 우리 생을 다 떠받쳐 줄 신앙의 추억과 우정을 만들어 가는 시간입니다. 여름이 되면, 내 주변은 초록빛으로 바뀌어 가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이 몰고 오는 신선한 향기에 놀라게 됩니다. 창문을 열어도 차가운 바람이 아닌 다정한 바람이 나를 방문하는, 그래서 빗장을 열어 놓는 일이 당연히 여겨지기 시작할 무렵을 우리는 여름이라고 부릅니다. 넝쿨장미 향기가 갑자기 나를 감동시키고, 수업을 마치거나 퇴근을 할 무렵에도 아직 환한, 그래서 서둘러 집에 오지 않아도 되는 덤 같은 날들. 친구를 불러 인생에 대해 나직나직, 그 알 수 없음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 없이 수다를 떨고, 한참을 걸어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도 서둘러지지 않은 그런 시간. 여름이 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면, 유월은 그 초입에서 설렘과 푸른 꿈을 생각하기도 하고, 혹시 잘못된 시도였다면, 아직은 여유 있게 노선을 변경해 보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유월은 작은 모험을 시도하는 멋진 시간입니다. 다음 내용을 따라, 자기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월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첫째 주 - 유월의 기억 소환하기

나의 유월은 어떤 것이었는지 한 번 돌아보면 어떨까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계선이가 생각납니다. 다정하고 친절했던 내 친구는 어느 날 길거리 리어카에서 살구를 사서 제게 주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며. 그 아이는 좀 언니같이 조숙한 아이였는데, 내가 살구를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선뜻 살구를 사주었습니다. 그때 처음 먹어본 살구의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복숭아처럼 커서 부담이 되지도 않고, 새콤하면서 달콤한 그 맛을요. 그렇게 친해진 그 애와 여름 내내 같이 다녔던 것 같아요. 똑같은 빨강 물방울 반바지를 입고, 과외 공부를 함께 했더랬어요. 그 후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 그 시절의 풋풋한 기억은 남았습니다.


한 주 동안, 이렇게 유월에 얽힌 기억들을 소환해 보세요. 그 안에서 생이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집중해 보기로 합시다.


  • 여러분의 유월에 떠오르는 기억 속에는 어떤 모습이 담겼나요? 누가 떠오릅니까? 그리고 왜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기억이 내게 기억하기를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 어떤 과일이 떠오르십니까? 그 과일은 나에게 어떤 추억을, 그리고 누구를 기억하게 해 줍니까? 그 기억은 내게 생에 대해, 생이란 크고 작은 모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둘째 주 - 숨겨진 의미 찾기

이번 주에는 이상국의 〈유월〉을 함께 읽어봅니다.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처럼 살고 싶어서……


이 시는 은근하여 마음 잡고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유월은 은둔 칩거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내면을 닮아서 은밀하고 맑은 시간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유월을 닮았습니다. 보라색 칡꽃이 조그맣게 피어나고, 수박 향이 난다는 물고기 은어가 강물에 집을 짓는 시간이라니, 갑자기 유월이 신비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유월엔 물도 가만있지 못하나 봅니다.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면서 내려옵니다. '물 물 물' 하면서 내려오는 물을 상상하면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런 시인의 눈에 세상은 오목한 새 둥지처럼, 아늑하고 고요합니다. 하여 시인은 또다시 빈집처럼 살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 이 시에서 어느 구절이 가장 마음에 다가옵니까? 한 구절이나 단어에 머물러 보세요. 그리고 이 시를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어떤 느낌이나 색깔, 혹은 기억이 떠오르나요? 누구의 얼굴 혹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이제 다시 한 번 이 시를 읽어 보세요. 그리고 내가 머무른 단어와 이미지, 추억, 누군가의 얼굴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 내게 다가온 의미들을 한 번 적어 보세요.
  • 마지막으로 이 시를 한 번 다시 읽어 보세요. 오월과 칠월 사이에 가만히 몸을 숨긴, 고요한 아름다움, 그 향기로운 시간을 만나보세요.

이 주간 동안, 친구들 세 명을 초대해 보세요. 각자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가지고 모여 앉아 이 시를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위에 소개한 과정을 한 번 해 보세요. 유월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한층 더 깊이 다가올 거예요.


셋째 주 - 나만의 여섯 시간 모험 떠나기

이번 주에는 '나만의 여섯 시간' 모험을 떠날 거예요. 여기서 모험은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이, 계획도 없이,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만나러 떠나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 조그만 배낭을 챙길 거예요. 물 한 병, 책 한 권, 노트와 펜을 가지고 갈 수 있어요. 책은 혹시 심심해지면, 어느 곳에서든 읽을 거예요. 이 모험은 여섯 시간입니다. 무슨 책을 가져가시고 싶으신가요? 혹시 더 가지고 가신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내게 꼭 필요한 것인가요? 책 읽는 안경을 가져갈 수도 있고, 지팡이를 가지고 갈 수도 있겠네요. 자, 준비되었나요?


  • 동네 근처를 산책하는 모험을 하셔도 되고, 잘 모르는 어떤 동네로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돈은 만 원 한정입니다. 발길이 가는 곳을 따라가 보세요. 어디에 다다르셨나요?
  • 가는 중간중간에 내 눈에 들어온 광경들을 노트에 기록합니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은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셨나요? 눈이 유난히 동그란 고양이? 벚나무와 숲의 향기, 흐르는 물소리? 세상의 아픔과 슬픔도 발견하셨나요? 거리에서 마주친 얼굴들은 어떤 표정이었나요? 이런 것들을 꼼꼼히 기록해 보세요. 어떤 커다란 건물 앞 계단에 앉아서 혹은 나무 그늘 아래서 이런 것들을 정리해 보세요.
  • 여섯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이 있나요?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모험이란 결국 새로운 관점을 찾는 작업일 것입니다.


넷째주 - 먼지를 털며 노래하기

잎새 뒤에 몰래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가 떠오르는 유월의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오늘은 집안을 청소해요. 어쩌면 이제 한 해의 반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이 시기의 아름다움을 떠오르게 하는 노래를 크게 불러 보아요.


  • 먼지를 털고, 집안 곳곳을 깨끗하게 정리합니다. 내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서는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내가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이 주간에 깨끗이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책장도 정리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처분하세요. 그래서 새로운 책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한 칸을 비워낸 책장처럼, 우리의 마음을 가볍고 기쁘게 하는 것도 없답니다.
  • 옷장 뒤로 넘어간 연필, 쓰지 않고 버려둔 노트들도 다시 제자리를 찾게 해 주고, 혹시 못 지킨 약속들이 있다면, 실망시킨 사람이 떠오른다면,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가벼운 삶을 살기 위해서 혹시 짐스러운 관계나 상황을 가볍게 해 주세요.
  • 마지막으로, 일월부터 내가 적어 본 노트를 읽어 보세요. 촘촘하게 써 내려간 내 일상에 축배를!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는 나만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써 내려간 글 안에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공간을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요. 내가 쓴 글에서 내가 발견한 일상의 공간을 무엇이라 부르고 싶나요?
 임혜진의 계절 ㅡ 미술관에서 만난 여명 

이 뉴스레터의 제목을 여명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오브Aube'로 붙일 때만 해도 올해는 새벽빛을 자주 보겠다는 결심도 일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초여름인 요즘엔 높이 뜬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여전한 저녁형 인간입니다.


그러다 지난주 우연히 들른 전시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에서 서늘하게 강렬한 여명의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청주에 친척 장례식이 있어 조문차 방문했다가, 기차 시간이 꽤 남았는데 최근 기사에서 본 이 전시 소식이 떠올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 들른 길이었습니다.


방혜자 작가(1937~2022)는 서울과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각예술가로, 평생 '빛'을 주제로 한 구도적인 회화 작업을 했습니다. 전시장에는 내면의 빛을 주제로 때로는 부드러운 색조로, 때로는 강렬한 보색으로 표현한 명상적인 작업들이 관람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져 주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을 때 어룽거리며 펼쳐지는 빛의 그림자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우주 망원경으로 찍은 천체 사진 같은 70년대의 작업들은 미래적이기까지 합니다.


전시 작품 중 하나인 〈하늘의 토지〉(2008, 사진)는 박경리 작가가 타계하던 해 그린 우정의 선물로, 침묵 속에 펼쳐 오는 여명의 시간을 통해 우주와 생명, 빛을 장엄하게 표현합니다. 이 그림 앞에서 잠시 우리 뉴스레터와 독자님들의 시간을 헤아려보고 마음도 조금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2026년 9월 27일까지 열리며, 청주 가까이 계시는 독자님들께 이 따스하고 사색적인 전시에 가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오수경의 계절 ㅡ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며칠 전, 낯선 이와 함께 지방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둘 다 내향형이라 굳이 같은 칸에 타지 않아도 되도록 각각 열차 예매를 하고, 목적지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어요. 다행히 우리에게는 '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국밥을 먹으며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름, 하면 어떤 드라마가 떠오르세요?"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 국밥 한 숟가락을 뜨는 순간, 질문이 숟가락에 반찬처럼 얹어졌습니다. 질문을 꼭꼭 씹고, 말을 꺼냈죠.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그날 저희 대화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알록달록, 초록초록, 시원한 비눗방울들이 두둥실 떠 있는 그림이 나왔을 거예요. 우리는 여름에 어울리는 옛날 드라마 제목들을 비눗방울 불듯 신나게 뱉었습니다. 그중 초여름에 어울리는 〈그해 우리는〉을 소개하고 싶어요. 〈그해 우리는〉은 고등학생 때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가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재회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고, 다시 만나 연애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이 드라마가 특별히 생각난 이유는, 풋풋한 청소년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 여물어가는 마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두려움 등 아직 연둣빛이 남아있지만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시기의 감정과 감성을 너무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그 드라마에서 제가 좋아하는 대사를 독자님께 보내드립니다.


"한없이 멀게 느껴지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최웅)


우리들의 유월이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이길.

《오브》에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 해외 거주하고 있고 한국에 부모님 뵈러 가는 것 이외에는 여행이 너무 귀찮고 싫은 집순이 중년 아줌맙니다. 우연찮게 저는 요즘  피오나 매덕스가 쓴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읽는 중이에요. 여덟살 나이에 베네딕토 수녀원에 맡겨진 그녀의 유년기를 읽는 중인데요, 수녀님의 글을 읽으니 '비리디타스'가 기대되고, 저도 기회가 된다면 그 수녀원을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저는 일단 계속 이자리에서 책으로 생명의 순례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 생명의 순례를 이어가시는 그 마음을 잠시 기억해봅니다. 답장 감사합니다.


《오브》 6호 어떻게 읽으셨나요? 답장을 기다리고 있어요오오오오~ 📮 다음 뉴스레터는 6월 10일에 발행됩니다. 

  • 발행 : 출판사 옐로브릭
  • 에디터 : 오수경·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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