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밋의 성과는 두 겹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메모리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빅테크에 5년간 팔기로 한 반도체는 향후 5년 동안
9500억달러, 우리 돈 1393조원어치에요. 하지만 그 아래엔 다른 층이 깔려 있습니다. 이 거대한 수주를 지렛대 삼아 빅테크가 한국에 연구소와 데이터센터를 짓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은 2000억달러(290조원) 규모로 손을 잡았습니다. 삼성의 HBM과 2나노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하나로 묶어 브로드컴 칩에 공급하는 ‘원스톱’ 구조라고 밝혔는데요. AI 반도체의 무게중심이 엔비디아 GPU에서 빅테크 맞춤형 칩(ASIC)으로 옮겨가는 흐름에 삼성이 올라탄 셈입니다.
TSMC가 독점하다시피 한 파운드리 시장. 칩이 필요한 빅테크 입장에서는 대안이 절실한 상황인 만큼 삼성에겐 기회가 될 수 있어요. HBM 고객을 넓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고 대형 고객의 2나노 물량을 안정적으로 뽑아내면 파운드리 수주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을 묶어 파는 만큼 고객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효과도 있을 테고요.
SK하이닉스도 크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와 5000억달러(733조원) 규모로 차세대 HBM을 함께 개발하기로 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서버용 메모리 공급 등 2500억달러를 더해 총 7500억달러를 확보했습니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베라 루빈’을 들여 2027년부터 최대 2기가와트(GW) AI 팩토리를 짓는데 여기에도 SK하이닉스 HBM4가 들어갑니다.
숫자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방향일 듯합니다. 빅테크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5년치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 줄을 섰다는 것인데요. 얼마 전까지 시장을 짓누르던 ‘반도체 피크론’, 즉 메모리 호황이 곧 꺾인다는 우려를 잠재울 수 있는 신호로 읽힙니다. 실제로 이번에 함께 짓기로 한 AI 데이터센터만 5GW에 달하는데 GPU로는 약 200만장 규모입니다. 그 설비를 채울 메모리가 곧 이 계약들인 거죠.
두 번째는 한국에 대한 ‘투자’입니다. 엔비디아는 핵심 연구진을 한국으로 옮겨 ‘AI 프런티어랩’과 KAIST 공동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 역량이 국내로 들어온다는 의미인데요. 엔비디아가 한국을 선택한 배경도 분명합니다. 젠슨 황 CEO는 지난해 서울을 방문한 뒤 현대차와 LG 등과 협력 가능성을 논의하며 한국 엔지니어와 연구 인력의 경쟁력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는 “GPU 접근만 확보되면 한국은 자립적인 AI를 구축할 수 있다”고 평가했고요.
오픈AI는 조니 아이브와 함께 개발 중인
차세대 AI 기기를 내년 1분기 한국에서 처음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신제품을 가장 먼저 검증하는 시장으로 한국을 선택했다는 것은 앞으로 AI 기기 생태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이 참여할 기회도 커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앤트로픽은 국내 데이터센터 투자 의지를 재확인하고 삼성SDS와 AI 엔지니어 양성에 나섰습니다. 브로드컴은 한국형 LLM에 최적화한 맞춤형 반도체를 지원하기로 했고요.
변화는 연구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AI가 실제 산업으로 연결되는 움직임도 이어졌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와 로봇 개발·검증 플랫폼을 구축하고 웨이모와는 자율주행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 브룩필드와 함께 기가와트급 AI 팩토리 구축에 나서기로 했고요.
두 흐름을 합치면 이번 서밋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그동안 4700조원 규모의
‘3대 메가 프로젝트’는 정부와 국내 기업이 주도하는 구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글로벌 빅테크가 연구소와 테스트베드, 데이터센터를 들고 합류하면서 한국의 계획이 글로벌 공동 프로젝트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메모리를 공급하는 나라에서 AI를 연구하고 검증하며 실제 산업에 적용하는 나라로 ‘발돋움’ 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