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정의하는 좋은 친구란 무엇인가요?
2023.07.18. 네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취향을 담아 상상 속의 공간 '땡비'를 만들어가는 뉴스레터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좋은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친구를 어떻게 정의하나요?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 아무말 없이 있어도 편한 친구, 어떤 대화를 해도 통하는 친구 등 저마다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 전에 쉽게 쓰일 주제라 생각했는데 그 어느 주제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여러분도 소중한 친구가 떠올랐다면 이 참에 연락 한 번 어떠실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명의 좋은 친구가 곁에 있다면 우리 삶은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간간히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시팔도라의 상자(@아난)

 

내게는 친구 ‘윤들‘과 나누는 ‘시팔도라의 상자’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어디에도 내놓지 못할 치부나 걱정,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다. 우리는 여과 없이 나눈 대화를 ‘시팔도라의 상자’로 칭한다. 서로 바닥까지 내려가 이야기하다 이 대화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는 걸 상상해보면 참으로 아찔하다. 그러나 시팔도라의 상자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이 상자 안에서는 자유롭고 어떤 의견을 내어도 괜찮다.

 

‘윤들’은 내게 큰 힘이 되는 친구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이 든다. 매일매일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떡볶이 이야기를 하다가 직장 고민, 사랑, 미래, 심오한 인생관까지 경계 없는 대화가 펼쳐진다. 어떤 견해, 취향을 드러내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서로에게 있다. 그래서 내 안에서 말을 거르지 않고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와 안정감이 있다.

 

‘윤들’과 나는 직장 동료로 만났다. 처음에는 직장 동료로서 미묘한 경계심을 세웠다. 이력서 사진 속 야망 넘치는 노련한 일타 강사 같던 그녀의 기세에 놀라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환하게 웃으며 상대를 늘 깍듯이 배려하는 친구다. 그렇게 점차 경계선을 흐리며 서로의 인생으로 들어갔다.

 

첫 직장에서 먼저 퇴사한 윤들은 이후 두 번의 이직을 거쳤고, 나는 네 번째 일터에 자리 잡으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멀어져 강한 의지를 가져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을 함께 이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랍고, 함께 늙어가고 있어 좋다.

 

윤들은 불나방 같은 사람이다. 자신을 태워서 주변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참는 것이 익숙하다. 어떻게든 민폐가 되지 않으려 1인분의 몫 이상을 하려는 윤들의 성향 덕분에 가는 직장에서마다 인정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가며 윤들은 변했다.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진가를 깨달아 가며 삶의 무게 중심이 점차 자신에게로 왔다.

 

윤들에게는 ‘항아리 이론’이 있다. 가족, 친구, 일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곳에 에너지를 쏟는다. 윤들은 자신에게는 하나의 항아리만이 존재해서 모든 걸 그 항아리에 담으려면 우선순위에 따라 빼고 채운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편안함보다는 상대를 우선시해왔다. 관계를 잘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진빠져했다. 항아리가 여러 개라 사랑도 일도 잘 구분하여 항아리마다 자신의 에너지를 잘 안배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워했다.

 

윤들에게도 항아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헌신을 다하는 불나방의 에너지는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이 더 이상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는다. 자신과 주변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자신만의 항아리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여유가 생겼다. 그 항아리들이 버겁고 화로 가득 차면 언제든 시팔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나 또한 일상이 부서지는 순간이 오면 윤들과 시팔도라의 상자를 열고서 속시원하게 대화하며 한숨 돌렸다. 그럴 때마다 윤들은 늘 곁에서 나의 자책 회로를 끊어주고 내 자신의 좋은 면을 돌이켜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글을 쓰려 다시 그리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를 읽어보니 원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였다. 후대 작가들에 의해 상자로 오역된 것이라 이전의 기록에서는 항아리로 나타난다. 판도라의 항아리에 온갖 고통, 질병이 담겨있듯 우리 시팔도라의 항아리에도 재앙이 담겨있다. 그렇지만 이제 윤들도 나도 항아리 한 개가 전부인 세월을 벗어나 여러 항아리 중 하나로 시팔도라의 항아리를 볼 여유가 생겼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옆에서 ‘그래도 괜찮아’라고 토닥여주는 친구 하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온갖 치부와 재앙을 다 꺼내도 ‘오죽 궁금했으면 그랬을까’하며 깨진 항아리 조각을 같이 주워주는 친구로 내게는 윤들이 곁에 있다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시팔도라의 상자 아니 항아리를 열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우리, 봄을 보내고 만나자(@흔희)
  
6월 10일이 다가온다. 그래도 분기별로는 봤는데 올해는 봄을 건너 뛰고 여름이 되어 널 만난다. 늘 내가 차를 몰고 너에게 가는 것이 자못 신경쓰이는지 이번에는 네가 내 쪽으로 오겠다며 연락이 왔다. 나야 차를 몰고 가면 끝인데 너는 버스며 지하철이며 여기까지 오는 것이 그리 간단한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썬크림도 바르지 않고 자연인의 상태로 마주했던 우리지만 취직을 하고나서부턴 최대한 예쁜 모습으로 만난다. 그게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삶의 궤적이 비슷하여 우리는 비슷한 직종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 업을 얻기까지 우리는 봄을 추레하게 견뎌야했다. 1년에 한번 있는 시험의 최종 결과는 겨울과 봄 사이에 발표가 나곤 했기 때문이다. 

  화장을 곱게 하고 차에 탄다. 고속도로에 진입을 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뻗어나간다. 최근에 삶이 부박하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모멸감이 들었지만 나를 추스리고 내 삶에 책임을 지고자 애를 썼다. 그러다 연락이 왔다. 얼굴보고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기대와 달리 형식적인 사과만을 받고 내려왔다. 그 날,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네게 전화를 걸었고 마침 근처라고 하여 툴레툴레 너를 만나러 나갔다. 답답한 내 마음을 쏟아내려 하였으나 넌 나보다 훨씬 무거운 것들을 마음에 안고 있었다. 그래도 어릴 땐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로 힘들어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터져나온다. 내 서러움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네 서러움을 알고 나는 네가 너무 고단해 보여 울어 버렸다. 내가 우는 걸 보고 너는 내게 말했지.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진 난 절대 안 울거야.”
  “내가 대신 울게. 야이 독한 년아.”

  그 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며칠 뒤 네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네 목소리에는 울화가 가득 차 있었다. 한참 말을 하다가 네가 멈춘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백팔배라도 해야겠다. 내 전화 끊을게.“
  취직 시험을 같이 준비할 때였다. 아버지께서 절에 갔다가 달마도 사진을 찍어 주셨다. 정갈하게 액자에 담긴 사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네 것. 우리는 그 사진을 각자의 방에 걸어 두고 백팔배를 하였다. 종교는 없었지만 무언가에 집중하여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 해 너는 시험에 붙었고 나는 떨어졌다. 최종합격 발표 날 나는 네게 말했다.
  ”정말 축하해. 근데 너한테 온전히 축하를 못 해주겠어. 미안해.“
  눈물 그렁그렁하게 쳐다보며 말하는 나를 보고 넌 그냥 가만히 안아주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 너한테서 다시 백팔배라는 말이 나왔다. 뭐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 나도 그날부터 며칠간 같이 백팔배를 했다. 운동이라곤 하지 않는 내가 그 백팔배 때문에 근육통으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뭐라도 해줄 수 있는게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라는 계절 중 하루는 꼭 우리가 함께였는데. 이번에는 볼 수 없다. 고단하게 굴러가는 네 하루를 알기에 만나자고 쉽게 이야기를 못 꺼낸다. 그간의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나리며 진달래며 봄꽃들이 자기들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어느 날 네게서 연락이 왔다. 동물들의 모습이 담긴 짧은 영상 몇개를 보낸 것이다.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도 있었고 우스운 행동을 하는 야생동물들도 있었다. 영상을 보며 웃고 있는데 네가 몇마디 덧붙인다. 우리는 봄이 늘 힘들었으니까 봄을 잘 견뎌보자고.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봄은 간다고. 봄을 보내고 만나면 잘 견뎌내준 서로를 꼭 안아주자고.

  전화가 울린다. 다 도착했냐고 네가 묻는다. 주차 중이라고 하니 내려오겠다고 한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나오며 네가 말한다.
  “야, 우리 안아주기로 했잖아.”
  차를 타고 내려올 때는 네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뭔가 쑥스러워진다.
  “왁씨, 마! 한 번 안아보자. 잘 살았나!!”
  서로 부둥켜 안고는 폴짝 폴짝 뛴다. 머릿속에 그리던 극적인 재회는 아니다. 정극을 기대했지만 꽁트다. 하긴, 그동안 너무 절절했으니 이런 가벼움도 필요한 것 아니겠나. 뭘 먹고 싶냐고 네가 묻는다. 전에 같이 먹었던 곱창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그 집은 망했다고 한다. 근처에 물회 맛집이 있는데 거길 가보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손을 꼭 잡고 주린 배를 움켜 쥔채로 걸어나간다. 

  그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못했지만 봄을 보내고 곧 널 만날 것이라는 그 약속 하나만으로도 버틸 힘이 나더라. 네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응원이고 위로다. 연락을 하지 않을 때 뜬금없이 네가 보내던 동물 영상도 나는 안다. 네가 힘들때마다 나한테 보낸 거. 그리고 힘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낸 거.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묵직한 마음에서 힘을 받고 또 일어나 본다. 고맙다. 친구야.

좋은 친구에 관하여(@못골)


누가 뭐라고 해도 좋은 친구는 서로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좋아하느냐 하는 이유는 몰라도 된다. 그냥 좋으면 된다.


그냥 좋은 것 같지만, 그 관계 속에는 모든 것이 아우러져 있다. 외모, 성향, 도덕성, 경제력, 정치성, 독립심 이런 요소들이 알게 모르게 복합되어 그 사람을 규정짓는다. 그 규정이 나의 좋아하는 느낌에 맞으면 좋아서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나 보고 “우리 형님 싫어하는 조카는 필요 없다!”라고 했다. 왜 싫어하는지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이유는 타당한지 하는 여부는 논외였다. 묻지도 않았다. 싫어하니 싫어한다. 그렇다! 혈족 관계도 그러한데 친구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친구는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또 다른 나일 것이라고 본다. 학교 다닐 때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몹시도 곤궁했다. 나는 누군가를 통하여 나의 결핍을 채워보려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그 친구와 자주 다투었지만 그래도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가 하며 만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오래된 친구가 그냥 좋은 친구인 줄 알았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 친구를 좋아했을까?’ 하는 이유를 지금은 알지 못한다. 살아가며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어떤 목적을 갖고 친구를 사귄 동기가 잘못되었다.

싫어도 어떤 목적 때문에 그를 좋아해야 한다는 의견은 친구 관계뿐만 아니라 연인관계나 직장 동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골라 직장 생활을 할 수는 없다. 다양한 생각과 목적을 가진 사람들, 여러 각종 성향을 다르게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중에서도 내가 어울릴 사람을 찾고 찾아서 밀착된 인간관계 속에 직장 생활의 즐거움을 그와 함께해 나가는 방식이다.

 

좋은 친구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까?

경제력, 지식, 친화력, 지도력, 도덕성, 헌신성. 가만히 친구를 정의하기 위해 끌어내어 본 요소들이다. 저런 요소들을 고루 갖춘 친구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어느 면에서나 부분적인 결함이나 결핍을 갖고 있다. 그런 부분적인 결핍을 감수하고 현재의 요소로도 네가 충분히 좋다는 전제 아래 벗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관계가 이어진다.


현실과 달리 나는 유별스럽게 경제력이 중요한 요소였나 보다. 나도 몰랐는데 지나놓고 보니 나타난 수치(數値)가 그렇다. 살아오면서 스쳐 간 친구들을 살펴보면 경제력 때문에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친구는 아무도 없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내 삶의 장이 함께 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 부유한 친구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위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선을 긋고 그를 보고 스스로 부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 그런 대상에의 접근을 아예 미리 차단한 것이다.


가난하였지만 살아오는 과정 중에 크게 성공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그런 부와는 관계없이 교우 관계가 변함없이 이어지는 부러운 사람들도 있다.

내게도 몇몇 경제면에서 그러한 친구가 있었지만 역시 정서적 공감이 어긋나 관계가 모두 파탄 나 버렸다. 손꼽아 보니 남이 부러워할 만큼 많은 부를 확보한 이른바 성공한 친구가 내게는 극히 드물다. 내가 몸담은 업태도 돈벌이를 생각하면 맞지 않는 직장이다.


스스로 부에 관한 능력이 없으니 아예 그 분야를 포기하고 사귀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니 잘살아 본 적이 없으니 튼튼한 경제력으로 여유를 보이는 친구를 대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열등감이 많은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내세우는 여유로움이 거만함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 본다.


나에게 학생이라서, 월급쟁이라서, 퇴직하고 실업자라서, 하는 이유를 달며 평생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친구가 있다. 지금은 “주면 제발 좀 받기도 해라”라고 내게 불평한다. 그렇다고 그가 엄청난 부를 확보한 것도 아니다. 그냥 두어 채의 단독 주택과 지금도 끊임없이 경제활동을 하는 정도이다. 그런 그를 경제력으로 한 번도 넘어서 본 적이 없다. 어느 때는 부담스러워 스스로 만나기를 멈추고 각자의 삶에 충실한다. 그 친구는 그런 시간 간격도 나와의 사이에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 친구다. 그는 매우 근면할 뿐 부유하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는 저녁을 먹고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늘 신고 있던 고무신을 신고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가서 부담 없이 탁주 한잔을 놓고 세상 시름을 이야기하며 공감할 수 있는 친구, 많은 지난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친구는 없다. 그런 친구는 농경사회에서나 있음 직하고 오늘날처럼 아침저녁이 달라지는 이런 변화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 그래도 그냥 전화하여 앞뒤도 묻지 않고 “저녁 묵자!” “응! 그래” 하는 친구가 있어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왔지만, 가뭄에 바닥 드러난 호수의 돌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어울리는 몇몇 친구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의 면면들을 보면 공통분모가 착하다는 것이다. 모나고, 자기주장 강하고, 술 잘 마시고, 또 술도 못 마시고, 눈치가 없고, 시끄럽고, 잘난 체하고 등등 한 가지 이상의 결점을 갖고 있다. 그래도 공통점이 무엇일까 찾아보니 착하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 베풀 줄도 알고 내 것을 포기할 줄도 아는 고운 심성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한 가지 이상의 결점들을 상쇄하며 ‘네가 더 좋다’는 이유로 오늘도 만난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3. 내가 좋아하는 말)
앙듀님 : 그래도 함 해봐라는 못골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지레 겁 먹고 미루거나 포기한 일이 더러 있고 그게 머릿속에서 자꾸 후회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못골님의 글을 읽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살며 후회가 적을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안다는 말이 부족합니다. 유난히 쑥 제게 와닿네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용기를 주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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