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소 오픈 초기에 찾아온 이들의 대다수는 나와 아내의 지인들이었다. 당연히 평소 자주 만나는 이들이 많았지만, 때때로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도 뜻밖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여성동아> <에스콰이어> <컨셉진> <빌리브> 같은 몇몇 매체에서 취재를 위한 연락이 오기도 했다. 늘상 취재를 해온 입장에서 반대로 당하는 상황이 되니 적잖이 어색했는데, 기자들의 고충을 잘 알기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취재에 응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에디터와 디자인을 시작한 아내가 낮과 밤을 다르게 운영하는 무용;소만의 콘셉트를 알리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무용;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은 내가 도맡았다. 평소 SNS를 게을리하는 편이지만, 무용;소 계정 만큼은 에디터로서의 기질을 발휘해 나름 콘텐츠로 꾸려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매일 다른 내용으로 부지런히 업로드를 했다. 무용;소에서 키우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 큐레이션한 디자인 소품, 위스키 비하인드 스토리, 무용;소에서 선곡하고 있는 레코드와 뮤지션 등 단순한 공간 홍보보다 무용;소와 연결된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더불어 무용;소의 위스키 시음실을 준비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프로그램은 위스키 모임이었다. 평소처럼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위스키에 관한 배경 지식을 전하고, 위스키의 각기 다른 개성을 알아보고, 더불어 술에 얽힌 여행 이야기도 나누는 모임. 그리하여 ‘고독한 시음회’란 이름으로 첫 위스키 모임을 기획했다. 맞다. 무용;소 오픈 날의 하이볼 이벤트와 동일한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고독한’ 정서를 꽤 좋아하는데, 나와 같은 내향적인 이들도 부담없이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한 이름이기도 했다.
첫 모임의 주제는 당연히 ‘스코틀랜드 위스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 3종을 시음하고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모임을 준비했다. 아내와 함께 포스터와 테이스팅 노트도 제법 공들여 디자인하고, 위스키와 곁들일 수 있도록 스코틀랜드의 쇼트브레드와 소시지도 직구로 주문했다. 무용;소 로고 캐릭터를 넣은 온더록 잔까지 별도로 제작했으니 돌이켜보면 정말 그날의 위스키 모임에 진심이었던 것 같다. 이제 모객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고독한 시음회의 정원은 8명. 인스타그램으로 홍보를 시작했지만 내심 인원이 차지 않을까 초조했다. 아직 팔로워도 거의 없을 때니, 무용;소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홍보를 했다. 당초 가급적 위스키에 관심이 많은 입문자들이 신청하길 바랐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누구라도 좋으니 신청만 해줘도 감사할 노릇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빈자리를 채워줄 지인들도 섭외해 놓았다. 그런 걱정과 달리 모임 일주일을 앞두고 신청자 정원이 찼다.
사실 진짜 걱정해야 할 대상은 모임을 진행하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의욕이 한껏 충만한 상태였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심장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그렇다. 나는 언변에 관해서라면 최하수급이나 다름없었다. 에디터 일을 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이나 사회를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횡설수설로 일관하며 좌중을 엄숙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태반이었다. 사적인 술자리에서처럼 편하게 진행하면 될 거라고 만만하게 여겼는데, 막상 시간과 비용을 들인 누군가를 위해 모임을 진행한다고 생각하니 지나간 아찔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첫 ‘고독한 시음회’를 시작했다. 프로젝터를 띄우고 미리 대본에 정리해 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거의 AI 음성처럼 시종일관 동일한 톤으로 위스키 상식들을 지루하게 읊었다. “위스키의 기원은 14~15세기로 추정됩니다. 아일랜드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위스키를 대중화시킨 곳은 스코틀랜드입니다.” 사람들의 흐릿해진 눈빛을 살필 때마다 초조했지만, 준비한 스피치를 과감하게 끊어낼 기지 또한 나에게 없었다.
나와 참석자 모두가 괴로웠던 위스키 설명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위스키 시음을 시작해서야 경직된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준비한 위스키는 오반 14년, 라가불린 16년, 글렌파클라스 105. 스코틀랜드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개성 또한 확연히 나뉘는 위스키였다. 우선 오반 14년은 하일랜드에 속하면서 밸런스가 좋아 싱글몰트 입문자에게 적합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라가불린 16년은 아일라 섬의 위스키로, 묵직한 피트 향을 품고 있어 호불호가 제법 갈렸다. 마지막은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취재 때 인연을 맺은 글렌파클라스 105. 위스키 원액에 물을 섞지 않은 캐스크 스트렝스로 60도에 이르는 도수가 다소 부담스럽지만, 셰리 오크 숙성의 풍미를 파악하기에 알맞은 위스키이기도 하다. 세 가지 위스키를 시음하고 저마다 자신만의 시음평을 얘기하면서 평소 위스키에 관한 궁금증이나 스코틀랜드 여행 이야기도 한결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다. 전반전은 사실상 폭망에 가까웠지만, 후반전은 나름 선방한 시음회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첫 ‘고독한 시음회’를 마친 직후, 이제는 모두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됐다. 카페, 식당 등 실내 장소의 영업 시간이 9시로 단축되고, 테이블당 인원도 4인 이하로 제한됐다. 그런 탓에 야심차게 기획을 한 ‘고독한 시음회’도 한동안 이어갈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고독하게 위스키 시음실을 소수 예약제로 운영을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나서야 비정기적으로 시음회를 진행해 보고 있다. 이제 위스키 시음회를 준비할 때면 첫 ‘고독한 시음회’의 아찔한 전반전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딱딱한 설명은 최대한 배제하고, 가능하면 하이볼이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풀어가는 것. 술 한 잔을 머금고 나면 어색한 분위기도 풀리고 위스키에 관한 생각을 낯선 이들과 좀 더 진솔하게 나눌 수 있다. 다만 술을 초반부터 과하게 마시면 또 다른 횡설수설이 시작될 수 있으니 늘 과유불급이 중요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