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뉴스레터

혹시 독자님이 평소 다니는 길에는 벤치가 잘 보이나요? 애매한 지점을 톡 건드린 기사를 좋아하는 저의 이번 주 마지막 큐레이션은 벤치에 관한 이야기예요.

제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쭉 보냈던 아파트 단지 쪽문 근처에 벤치가 하나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벤치가 놓인 지점에서 어떤 친구는 1동으로, 또 어떤 친구는 9동으로, 12동으로, 이렇게 흩어졌습니다. 그 벤치는 그 동네에서 꽤 중요한 길목에 놓여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벤치에는 항상 낯익은 또래들이 앉아 있었어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우니까요. 언제나 그 벤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둑어둑해 질쯤에야 각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심심할 때는 그 벤치로 나가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아는 얼굴이 꼭 하나씩은 나타나곤 했죠.

오늘 소개해 드릴 기사가 그 벤치와 그 자리에서 인연을 맺은 얼굴들을 아주 오랜만에 생각나게 했습니다. 독자님께도 기억 속에 담아뒀거나 요즘 무심코 자주 찾는 벤치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어요. 기사는 약 2분 분량이에요.

☑️ 일본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는 지난 7월 기차역 JR히라쓰카역 주변에 놓인 벤치의 낮은 칸막이를 모두 없앴다.

☑️ 칸막이 벤치는 1990년대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늘어난 노숙인을 배제할 목적으로 나타나 널리 퍼졌다.

☑️ 칸막이 벤치 제거를 주도한 히라쓰카시의원은 고령화 추세 속에 약자의 처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본다.

이 기사는 '누구나 환대하는 벤치'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벤치 하나가 공간의 쓰임새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서울 광화문광장 재조성 공사가 막 끝났을 때 광장을 구경하러 갔을 때였어요. 광장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다양한 형태의 벤치와 의자를 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는 방식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란히 앉아 이야기 나누는 사람, 아예 누워버린 사람,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사람, 모서리를 이용해 절묘하게 운동하는 사람….

이렇게 앉을만한 자리가 없었다면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 되게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머무르는 시간이 줄었을 테고, 그럼 "잠깐 앉았다가 갈까?"라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던 대화도 없었을 거예요.

벤치는 그 장소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게 하고, 그래서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게다가 공짜입니다. 적어도 3000~4000원씩 나가는 커피를 사지 않아도 함께 있는 사람과 친밀감을 키우거나 바로 이 계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 보기 어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게 합니다. 실용적인 면도 빼놓을 수 없죠. 아기를 업고 쩔쩔매는 부모와 얼마 걷지 못하고 지치는 노인에게는 꼭 필요한 쉼터가 됩니다.

기사에서 에구치 의원이 말했듯 고령화 사회에서 벤치가 맡는 역할도 있는 것 같아요. 동네의 골목을 걷다 보면 식탁 의자를 길에 내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명씩 빤히 쳐다보는 노인을 꼭 만나게 되더라고요. 이런 분들은 아는 얼굴이 보이면 얼른 붙잡고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곤 합니다. 이렇게 소통을 갈구하는 노인들에게도 역시 벤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주변에는 과연 이런 역할을 할 벤치가 충분한 걸까요? 벤치가 부족해서 카페가 우후죽순 생겼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칸막이 벤치에 익숙한 일본보다 나을 게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서울역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유행이 거셀 때 거리두기 차원에서 의자를 치웠기 때문이라고 해요.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가 이렇게 사라진 의자에서 '모두'를 위한 공공공간보다 '소비자'를 위한 상업공간 비중이 더 높은 개발방식의 문제를 짚어낸 칼럼입니다.

📬 "아무 일도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경향신문이 조명했으면 하는 바람도 드네요. 분명 따뜻한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거든요." (하얀나라님)

📬 "뉴스를 보며 참 안타까운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또한, 일 처리에 대해 오르락내리락 많은 비난을 했었죠.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의 이야기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던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결국은 우리가 모르게 뒤에서 힘쓰며 일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한 번의 단편적인 사건들로 그들에게 손가락질 한 거 같아요. 이런 위기가 생기면 담당을 하시던 분들이 해고되거나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죠.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빛을 발하지 않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책임을 지지 않게, 나라가 더 힘쓸 수밖에 없네요. 앞으로 그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기로 이 기사를 보고 마음먹었습니다." (e메일 t********8님)

📝 "지난 9월6일 점선면Lite <아무 일도 없으면 어떡하지>편에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이야기예요. 점선면팀도 이 기사를 소개하면서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구독자님들께 더 많이 보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닉네임 없이 요즘 불안한 심경을 남겨주신 독자님께도 그런 이야기가 위안이 될 수 있게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