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 사월 이야기

안녕 결, 민경이야.


비가 오는 어린이날,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상담심리학 공부를 시작한 후로는 꽤 오랜 시간 문학 글쓰기를 하지 않았었어. 그런데 요즘 예전에 썼던 극을 다시 쓰고 있어. 소설, 시, 에세이는 그간 쭉 써왔지만 희곡은 7년 동안 한 번도 새 글을 쓰지 않은 터라. 갑자기 샘솟은 희곡에 대한 열의가 생경하고 궁금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 갑자기 희곡을 쓰고 싶어진 게 아니라, 7년 전 마무리한 그 이야기에 더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극을 쓰기 시작한 것 같아.


두 가지 사건이 있었어.


*


날이 아주 화창했던 지난 4월의 한 날, 외할머니가 영면하셨어.


수업을 듣다가 전화를 받았고,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갔어.


대구로 가는 기차 밖 풍경은 온통 푸르렀어.

세상은 온통 가볍고 마음은 무거웠어.

어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 있는 조용한 시골길을 내려다보았어.

작게 난 나무그늘 하나하나가 연못 같았는데,

가볍게 입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원 없이 저 길을 걸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후에는 중환자실에 계신 할머니를 만났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깻잎장아찌를 죽죽 찢어 드시고, 핸즈커피 와플을 맛있게 드시던 할머니가 지금 의식이 없으시다는 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 면회를 함께 들어간 사촌 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기도문을 읽었고, 할머니 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어. 할머니의 손을 잡아 보았어.


할머니는 그날 저녁에 영면하셨어.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할머니를 모시는 그 3일 내내 날이 참 좋았어. 하루는 한밤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는데, 그다음 날에는 더 화창한 얼굴을 보여주었지.


*


그리고, 사월에는 인상 깊은 책 한 권을 읽었어.

<서사의 위기>라는 한병철 작가의 에세이야. 


책에서는 오직 정보만 존재하고, 서사는 사라진 지금의 시대가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흩어지게 하는지, 즉 서사로서 구성될 수 있는 개인의 고유함이 어떻게 파편화되고 있는지 설명하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해. 


나는 그 비판에는 모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작가가 추구하고 설파하고자 하는 서사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했어. 많은 주장 중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개인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게 된다'는 이야기와


”이제 콘라드의 세계는 더 이상 설명 가능하지 않다. 그의 세계는 이제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서사적 전환은 그를 작은 이야기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든다.” (77쪽)


서사는 개인 이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에 의해서 관통되어 꿰어진 사건들이 그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는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


“하이데거의 자기 존재는 서사적 삶의 맥락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맥락을 형성하는 세계 내부적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자기는 연결된 세계 내부적 사건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에 의해 관통당한 전 서사적 ‘전체 실존의 신장성’만이 ‘고유한 역사성’을 형성한다.” (44쪽) 


그리고 자신의 서사를 말하고, 다른 이의 서사를 들어주는 행위, 즉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치료적 의미와 중요성을 다룬 부분에도 깊이 공감했고, 그런 주장이 아름답게 받아들여졌어. 


*


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고, 이틀을 더 지낸 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어.

아침을 넉넉하게 먹었는데도 기차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학교 앞에 도착하니 배가 고파서 묵은지 참치 김밥 한 줄을 사 먹었어. 그리고는 기숙사 방에서 과제를 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녁에는 일기 한 편을 썼어. 일기를 쓰며 알아차리게 된 몇몇 마음이 있었고, 하게 된 몇몇 다짐이 있었어.


-


24.04.26. 기숙사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숨을 거둔 뒤 얼마간에도 청력은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외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마주하던 면회 시간에 할머니 귀에 대고 무어라무어라 다들 한 마디씩을 하고, 입관 때도 그러하였다. 이모들이랑 외삼촌들, 이모부들과 사촌들, 동생과 아빠와 엄마 모두 울었다. 이모들은 크게 울었다. 그 장면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사오월의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무당벌레가 이슬 맺힌 나뭇잎 위를 도도도 지나가는 것처럼 마지막 말을 전하는 장면. 울음 없이, 기쁜 노래를 부르듯이.


나도 그런 리듬으로, 할머니가 카카오톡을 만든 후에 내게 문자를 주어 너무 좋았다고, 꽃 사진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고. 할머니 집에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밥을 먹었던 시간이 행복했다고, 오래된 드라마를 멍하니 함께 보는 시간이 좋았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말을 할머니에게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이 말을 포괄하는 말을 전하기는 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했다고.


-


할머니와의 관계에서 나는 후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일기를 쓰며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어. 너무 요약해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가 함축된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건 참 다행이었지만. 


다음에는 울지 않고 그런 말들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이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감정을 일상적으로 전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그 관계의 끝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의 애도의 방식을 20대 초반에 미리 정해두었었어. '미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때는 아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지. 맨땅에 할 수는 없기에 극을 썼었고, 지금 내가 덧붙여 쓰고 있는 극이 바로 그 극이야.


할머니를 배웅하면서 그 극,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의 장면들이 종종 떠올랐어. 


나에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건 장마야.

우산으로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저 겪어야 하는 어떤 것.

내가 그때 정한 애도의 방식은 그 비를 온전히 맞는 것이었어.

다만 혼자는 너무 슬프니까, 그를 함께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저 일기를 쓴 직후, 누군가 오월의 새처럼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을 맨 앞에 넣어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 


너와 내가 함께 아는 이야기가 너와 나의 이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로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탈고하는 날에는 무언가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


결, 너는 어때?

너와 너의 곁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경험한 마음들을 그들에게 전하며 지내고 있니?


*


오월이야.

새봄의 달뜬 분위기가 지나가고, 이제 초록 이파리들이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지. 가을까지 오래도록 곁을 지켜줄 초록 잎들 아래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껴.


결, 만약 밤 산책길에서 아카시아를 만난다면,

걸음을 잠깐 멈추고 눈을 한번 감아보길 추천해.


아카시아 향은 눈앞이 캄캄할수록 진해지거든.


그럼 결,

우리 이 오월을 반갑게 지내고, 다음 달에 또 안부 나누자.


맑은 시간들이길.



2024.05.05. 민경 씀

추신. 어제 가족과 함께 찾은 고령의 은행나무숲 사진을 동봉할게. 가을에 처음 가보았을 때 봄의 풍경이 궁금했던 곳인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었어.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80-2. 지난 편지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너의 여름에 대해 물었어.
"이제 여름을 시작하여도 결코 늦지 않은 것 같아"

어제 30도를 넘겼다는 일기예보를 들었어. 한 달 전에 보내온 너의 편지에 봄 이야기가 가득하였는데 벌써 여름이다. 마당에 이제 겨우 싹이 올라오는 걸 보니 아니, 여름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하다.

‘관계 이론’이라니 참 흥미롭다.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일 인으로서 한 번쯤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던 너와는 달리 나는 최선과 진심을 다한 끝에 관계를 청산하게 될 때 분노가 쌓였던 것 같아.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거짓 아닌 거짓을 말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러한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나 봐. 그래서 내가 진심이고 최선인데 배신을 당하면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난 주에 내 주변에 엄청난 사건이 있어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어.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상대를 이해하고 그러한 상대를 받아 들이게 되었지.

앞서도 이야기한 겨우내 비어 있던 흙 마당에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느낌은 한마디로 기쁨이다.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기쁜 순간이야. 쑥쑥 자라서 머잖아 마당을 가득 채우는 초록으로 자라나게 되겠지. 나의 삶의 어떤 시기가 여름이었을까? 혹은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을까? 아니면 가을,겨울을 먼저 겪었던 걸까? 생각이 많아진다. 나의 삶은 도,레,미,파, 솔,라,시,그리고 도 이렇게 나긋 나긋 지나온게 아니라 도도도도 레레레 라라라라라라라 시시 그리고 높은 도를 찍고 낮은 미, 파를 거쳐 제일 듣기 좋은 소리 '솔'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아. 계절 비유를 하랬는데 한바탕 노래를 해 버렸네. 어쩐지 여름은 '솔'의 느낌이 있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일찍이 관계 형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여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가을과 겨울을 먼저 겪어 버렸었어. 하지만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마당이고 주변에도 칠십, 팔십의 나이에도 아랑곳 않고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아. 그래서 내가 이제 여름을 시작하여도 결코 늦지 않은 것 같아. 햇빛과 거름과 물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잘 자라는 일만 남았지.

그나저나 너는 잘 자라고 있니?

추신 : 최근 원격 수업을 시작하면서 생소한 학습 환경에 적응하고자 온라인 커뮤너티 도움을 많이 받았어. 이 공간에서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니? 댓글이나 답글 등으로 소통하면서 정보를 얻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상 관계로 볼 수 있나?
*
내게 온 것은 소리 하나 섞이지 않은 글자뿐인데, 답장을 읽고 나니 한바탕 신나는 노래를 들은 것 같아서 한참을 미소 짓고 있었어. 가을-겨울을 먼저 겪었다는 생각 역시 생경하여 나의 머리를 깨어주었고, 그와 덧붙여 음계로 표현해준 너의 생애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어. 재미있다!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지나 맞는 여름은 얼마나 또 무궁무진하고 찬란할까. 조금은 다른 순서로 찾아온 여름 앞에서 결코 늦지 않았다고, 햇빛과 거름과 물이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에 내 마음도 부드럽게 자라나는 것 같아.

추신1: 너는 잘 자라고 있냐는 물음에 대해서
-나는 잘 자라고 있어. 다만, 키가 급히 자란 아이가 성장통을 겪듯이 조금씩 몸 구석구석이 아팠어. 그래서 이제 자라는 것도 좋지만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자고 다짐했어.

추신2: 온라인 커뮤니티와 대상관계에 대해서
-상대가 나와 구분되고, 그 사람과 나 사이가 어떤 감정으로 엮인다면 그것은 대상관계가 될 수 있어. 다만 온라인이라는 환경에서는 비언어적 소통이나 표정을 통한 소통이 어렵다는 점에서 관계를 엮어주는 감정이 발전하거나 유지되는 것에 제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또한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라면, 그것도 하나의 제한점이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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