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혼자 있을 때 외롭거나 심심한 적 없어?”
시시껄렁한 수다와 잘 어울리는 양꼬치와 칭다오를 앞에 두고 사촌 동생이 축축한 젖은 수건 같은 질문을 훅 던졌다. 젠체할 필요 없는 막역한 관계라, 잠깐 골똘히 생각했다. 외로움은 둘째 치고 나 근래에 심심한 적이 있었나?
“음, 스물여섯 이후로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심심한 적.”
외로움은 사실 어깻죽지에 들러붙은 승모근처럼 당연해서, 육체의 성분이겠거니 하고 산다. 그 감정은 둘이든, 넷이든 평생 어깨에 지고 살다 죽을 때나 끝나는 감정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심심’이라는 상태가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냐고 했더니 돌아온 답.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얼굴을 비추는 84년생 웹툰 작가가 혼자 있는 시간에 너무 외롭고 심심해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며 ‘언니도 저럴까?’ 궁금했단다.
나는 왜 그 남자처럼 안 심심할까? 외로움에 무감해진 걸까? 이럴 때 들먹이기 좋은 핑계가 있는데, MBTI다. 방송인 김구라처럼 MBTI가 뭐냐는 질문에 “싸이코”라고 대답하는 냉담자가 더 쿨해 보일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복잡다단한 인간을 고작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저 지표에 꽤나 기대는 편이다. 내 유형은 INFP. 주말이면 방바닥에 악어라도 풀어놓은 양, 침대를 뗏목 삼아 하염없이 부유하는 인간.
온전히 혼자일 기회가 허용된 주말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대폰을 방해금지모드로 돌려놓기. 내 시간에 어느 누구도 불쑥 침입하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다. 인간 노릇을 하려면 꼭 해야 할 몇 가지 일들 - 세면과 화장실 용무, 약간의 집안일 - 을 꼼지락거리며 처리한 후엔 거룩한 뗏목 위로 다시 기어 올라간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부려 놓은 몇 권의 책과 간식, 구독중인 OTT앱을 모아둔 폴더면 한나절이 금방. 그러다 출출해지면 새벽 배송으로 쟁여 놓은 계절 식재료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별렀던 영화와 함께 꼭꼭 씹어 먹는다. 간혹 움직이고 싶은 날도 있는데 그럴 땐 혼자 나가 걷거나 뛰거나 산에 오르거나, 집 앞 테니스장에 가서 라켓을 휘두른다. 기분 좋게 땀 흘린 후엔 욕조에 라벤더 향 나는 목욕 소금을 휘휘 뿌리고 반신욕을 한 후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보낸 하루가 지금 내겐 가장 완벽한 휴일의 장면들이다. (물론 10중 2, 3은 친구와 가족을 만나는 데 쓴다. 나 왕따 아님.)
누군가는 “야.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주 그런다고? 그런데도 괜찮다고?” 할 수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거의 매주, 주말 중 하루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사수하려 애까지 쓴다. 그래야 정신이 몸에 붙은 채로 돌아오는 한 주를 날 수 있어서. 나만 그런가? 해서 극단적 외향형인 후배 H에게 글 쓰다 말고 불쑥 물었다. “너 혼자 있을 때 심심하니?”
즉각 돌아온 답을 순화하지 않고 옮겨보겠다.
“방구도 크게 뀌고 밥도 우걱우걱 먹고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를 수 있어서 너무 신나는데 뭐가 심심해요? 솔직히 퇴근한 순간부터 집 가면 혼자라는 생각에 진짜 행복했어요. 이제 유튜브 보면서 고관절 스트레칭을 하고 단술 한잔 마신 다음 코- 잘 거예요.”
“어머, 너도? 야 나두!” 호들갑 떨며 맞장구치다가 문득 든 생각. 혼자인 상태를 갖기가 오히려 드문 이 젊은 날엔, 손 뻗으면 언제든지 만나서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아직은 꽤 있는 지금은 스스로 선택한 이 외로운 하루가 마냥 즐거울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엔? 오십 넘어 육십, 칠십이 되고 울타리 같은 가족들이 세상을 떠난 후엔? 친구마저 하나둘 요단강을 건너는 팔십엔? 그때도 이런 온전히 혼자 보내는 빈 날들이 마냥 행복할까?
문득 이런 의문이, 그리고 회의가 갑작스럽게 나를 휘감을 때 조언을 청하고 싶은 사람 - 혼자 사는 삶을 온전히 즐기는 사람 - 이 주변에 없어서 - 사둔 책이 있다. ‘어떤 고독은 외롭지 않다’는 제목에 끌려 집어 든 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에밀리 디킨슨 같은 작가들이 혼자라는 것의 의미, 고독을 추구하길 바라는 이유 같은 내용으로 쓴 수필과 시, 소설을 모아 엮은 이 책에서 유독 마음 닿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미국의 소설가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단편 「뉴잉글랜드 수녀」에 나오는 루이자 앨리스는 1890년대를 사는 귀족 집안의 여성이다. 매일 부지런히 자기 공간을 가꾸고, 책을 읽고, 반려견을 돌보고, 자신을 위한 찻상과 밥상을 정성스럽게 차리고, 좋아하는 채소를 직접 키워 먹는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여성. 그녀에겐 조 대깃이라는 약혼자가 있는데, 둘은 이런저런 (불가피한) 이유로 14년이 지나서야 결혼에 이른다. 식 전날, 자신이 그동안 가꿔온 삶을 지켜내고 싶었던 루이자는 파혼 의사를 밝히고, 내연의 여자가 있었던 조는 기꺼이 그 청을 받아들인다. 작가는 이야기의 초점을 사랑이 깨진 두 연인의 비극적인 이별에 두지 않는다. 대신 이별 직후 루이자의 기분으로 곧장 시선을 옮긴다.
“루이자는 (중략) 마치 여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왕국을 뺏길까 봐 두려워했다가 그것이 확실히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된 왕국을 본 여왕이 된 기분. (중략) 평온하며 차분하고 한정된 세계가 루이자에겐 타고난 권리가 된 지 오래였다. 루이자는 마치 묵주에 달린 진주처럼 알알이 길게 꿰어 있는 미래의 나날들을 바라봤다.”
루이자가 스스로 선택한 독신의 평화롭고 우아한 삶이 ‘소설’이라 가능한 일일까?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하루는 사실 21세기를 사는 비혼자들의 일상과 별 다를 바 없는 장면이다. 다만 그에겐 스스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황홀한 고독을 영구히 쟁취한 용기가 있었다. 10년, 20년 후 그때 가서 외로움이 내 뒤통수를 치면 어쩌지? 따위의 걱정 대신 말이다.
작가 메리엔 무어는 ‘외로움의 치료제란 고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 외로움이 진절머리나게 싫어질까?’ 같은 의심은 하등 쓸모없는 걱정. 내겐 오래 갈고 닦은 고독의 비기가 있다. 운이 좋아 미래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혼자라는 공간과 시간을 자유처럼 사수하고 싶다. 내 외로움의 구멍은 타인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나의 외로움은 내 몫. 너의 외로움은 네 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