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
박찬욱의 지독한 결심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작년에 개봉한 <블랙위도우>였으니 거진 1년 만이다. 언젠가부터 영화관을 찾아가는 일이 무서워졌다. 코로나 시국 동안 지극하게 한 편을 다 보지 못하고 산만하게 이것 저것 돌려보게 되는 넷플릭스 시청법에 너무 익숙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설레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편한 순간이 집에 있는 순간이니 말 다했다. 이러다 순도 100% 내향인의 길을 걷게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들에게는 집에서 잠자고 있는 내향인들의 발걸음을 이끌게 하는 오라 같은 무언가가 있다. 박찬욱도 역시 그런 감독이다. <아가씨> 이후 무려 6년만에 찾아온 박찬욱의 11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보다 더 호기심을 더 자극했던 것은 바로,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이라는 점이었다. 국적이 다른 두 배우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지, 어떤 식으로 극의 전개를 이끌어갈지가 궁금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고, 두 배우가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탕웨이의 서툰 한국말이 먼저 들렸고, 그렇게 궁금증은 싱겁게 해결되나 싶었다. 바로 그때, 탕웨이는 스마트폰을, 그것도 아이폰을 꺼내더니 아주 능숙하게 번역기 어플을 사용해 자신의 말뜻을 전했다. 그래,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야 당연히 스마트폰을 쓰면 되지! 그야말로 21세기에만 가능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에는 뭐든지 편하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 써놓았으니, 영화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면 된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용의자와 사랑에 빠진 형사'의 이야기다. 어쩐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줄거리다. 사랑은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솔직히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박찬욱은 그런 것도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라며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완벽하게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를 설득시킨다.
마지막 파도 장면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서 그런지, 롯데시네마의 음향시설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크린 속 파도는 진짜 파도보다 더 파도 같았다. 새하얗게 부서진 파도 속에서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탕웨이를 찾아 나서는 박해일의 모습을 보자니 아련한 감정이 들었다. 전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해일이 탕웨이를 찾아내 둘이 사랑을 완성하는 해피엔딩도 생각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영화는 거기서 막을 내렸다. 당연히 그러는 게 맞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더 놀랐던 점은 두 배우의 외모다. 박해일은 여전히 19년 전에 찍은 <살인의 추억>처럼 풋풋함이라고 해야 할지, 곱상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매력이 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대단한 배우다. 19년 전의 매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탕웨이는 눈이 정말 예뻤다. 그 순둥순둥한 눈망울 속에 어떤 독기가 숨겨져 있어도 따라갈 것 같은 눈이다. 영화 속 박해일의 행동이 납득이 되지 않다가도, 탕웨이의 눈빛을 보여주는 씬 몇 개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설득되어 버린다. 배우에게 외모는 이래서 중요한가 싶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헤어질 결심>은 정말 영화관을 찾은 보람이 있는 영화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자막이다. 분명 들릴락 말락 한 대사들이 몇 개가 있어서, 영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어려웠다. 동시녹음과 후시녹음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타 스태프들과 스태프들의 비영화인 친척들을 초대해 확인까지 했다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넷플릭스의 자막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크린 아래쪽을 자꾸 흘낏흘낏 쳐다보게 된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짙은 여운이 남는 영화다. 어떻게든 대중과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박찬욱의 지독한 결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장은 참 여러모로 어렵다.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만들면서도, 대중들에게 그 예술세계를 납득시켜야 하고.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던 게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미래의 영화감독님들에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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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가 사는 이상한 나라
여기도, 저기도 우영우 투성이다. 버스 정류장에 붙혀진 광고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유명한 드라마가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온 나라가 한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상도 참 오랜만이다. 내 기억으로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이후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 않나 싶다. '어남택'과 '어남류'. 두 파로 갈라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권민우와 정명석, 두 이름으로 뜨겁다.
굳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풀네임 대신 '우영우' 이름 세 글자를 쓴 이유는 우영우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우영우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우영우'는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아이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몇 마디 괴성을 지르는 게 전부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걸을 때마다 배배 꼬인 다리는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첫 학기, 우리 반 전체에게 선생님이 내린 숙제는 그 아이와 함께 점심시간에 식당에 데려다주고, 같이 밥을 먹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1번부터 끝번까지, 번호순으로 당번을 정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반에서 친구 하나 없는 왕따였고, 그 아이와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럽지만 내 위치는 바닥을 칠 것 같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급식실로 혼자 보낸 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학년이 바뀌고, 반도 바뀌면서 첫 번째 우영우와의 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두 번째 우영우, 아니 어쩌면 제일 처음으로 만난 우영우의 이야기가 남았다. 그 우영우는 우리 친척이었다. 친가와 외가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나와 동생은 사는 곳으로 친척들을 구분하곤 했다. 가령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는 '아파트 할머니', 시골에 사시던 친할머니는 '시골 할머니'.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고모가 있었다. 고모는 말이 어눌했다. 어린 나의 시선으로만 봐도 고모는 다른 사람과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렸을 적 고모는 감기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고, 그 후로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정도다.
시골집에 가면 늘 다섯 개짜리 봉지 신라면 묶음이 쌓여있었다.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라면들은 지방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 보내준 일종의 지원 물품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집에서 잘 먹지 못하게 하는 라면들이 쌓여있다는 사실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드라마 속 영우가 친구를 만날 때면 항상 하는 '우 to the 영 to the 우' 인사법처럼, 고모에게도 고모만의 인사법이 있었다. 고모만의 독특한 인사법은 바로 '포옹'이었다. 명절을 맞이해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가면 우리의 흰색 마티즈를 기다리고 있었던 고모는 먼발치에서 달려 나와 우리를 꽉 끌어안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편함 정도는 알 수 있다. 우리 고모가 다른 고모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눈치라도 챈 듯, 전과는 달리 포옹 대신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를 볼 때면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던 고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수가 줄었다. 고모에게는 아들도 있었다. 어렸을 때 한 번, 다 크고 나서 한 번 봤던 그 형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바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많아봐야 나와 5살 정도 차이가 났을 그 형은 역시 우리 집안사람답게 낯을 무척이나 가렸다. 나와 동생을 동네 개울에 데려다주고 우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그 형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어른이 되고 나서였는지, 아니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우영우들은 사라졌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겼는지는 모르겠다. 티비 속에 나오는 영우의 곁에는 항상 동그라미라는 좋은 친구가 함께했다. 나는 한 번도 영우에게 동그라미였던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뾰족하게 각져있는 세모였다. |
요거트의 미학
덕 중의 덕은 양덕이며, 덕질의 끝은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쌀밥 대신 직접 만든 하얀 요거트로 가득 찬 밥솥을 열어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나는 요거트를 좋아하게 됐을까? 나의 요거트 사랑은 요거트가 아닌, 요플레에서 시작됐다. 제품보다 브랜드명으로 더 유명한 것들이 몇 개가 있다. 대일밴드, 스카치테이프, 딱풀, 호치키스 그리고 멜로디언(!)까지. 요플레도 그 중 한 종류다. 아직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요플레는 빙그레의 상표명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냉장고에는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들이 몇 개가 있었다. 천하장사 소세지, 오렌지 주스 그리고 5가지 종류의 맛이 들어있는 요플레 번들. 요플레는 우리 집에서 단순한 간식 그 이상의 위치였다. '요플레' 중 가장 좋아하는 맛은 클래식이었다. 순두부 같은 외형에 숟가락으로 퍼 올리면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매력이 있는 클래식. 적당한 단 맛과 적당한 부드러움이 완벽하게 조합된 클래식은 항상 양이 적었다. 인기가 많은 것을 요플레 측에서도 알고 있었는지, 요플레 번들에서 클래식은 항상 단 2개만 들어있었다. 동생과 공평하게 5:5로 나눴던 요플레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식탐이 강했던 나는 항상 동생의 것을 탐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요플레 번들 정도는 우습게 살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도 요플레, 아니 요거트는 항상 가장 좋아하는 음식 1, 2위를 다툰다.
그래서 얼마나 요거트를 좋아하냐. 우선, 카페에 가면 가장 높은 주문 빈도 수를 차지한 메뉴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다. 카페알바 시절,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요거트 스무디가 사실은 요거트 파우더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조차 요거트 아이스크림이다. 배스킨 라빈스에 가면 31요거트는 기본값처럼 항상 담겨있다.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가면 제일 먼저 요맘때를 바구니에 담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밥솥 하나만 있으면 요거트 10인분은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다.
밥솥으로 요거트를 만드는 건 엄마에게 전수받은 가문의 필살기다. 인덕션에 녹아 밥솥의 코드가 절단된 이후로 요거트를 만들 일은 없었지만. 우선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깨끗한 흰색 우유 1L와 플레인 요거트를 잘 섞어주고, 밥솥에서 보온으로 1시간 동안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 상태 그대로 내일 아침까지 놔두면 요거트가 완성되어 있다. 발효라는 과학과 밥솥이라는 기술의 합작품으로 탄생한 요거트의 맛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연 그 자체의 맛이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조금 달달하게 먹고 싶다면 과일 잼을, 건강하게 먹고 싶다면 그래놀라 시리얼을 말아먹는다. 건강과 맛을 둘 다 놓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잼도 넣고 그래놀라 시리얼도 넣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동안 살면서 요거트와 꽤 의미 있는 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원한 푸드 커머스 회사의 첫 과제는 '요거트' 상품의 상세페이지에 들어갈 문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적어봤지만 결국 불합격이었다. 좋아한다고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 하나를 또 얻었다. 또 카페 알바 시절 블렌더 뚜껑을 닫지 않고 난리를 치게 만든 음료도 블루베리 스무디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찔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저절로 움직이는 손을 막을 새가 없었다.
방구석 요거트 전문가로서, 요새 유행하는 그릭 요거트에 대한 나의 고견을 묻는다면 슬쩍 X를 들어주고 싶다. 사실 그릭 요거트는 비효울의 대표같은 음식이다. 잘 만들어진 요거트의 유청을 짜고 짜서, 먹을 수는 있는 덩어리만 남기는 음식이다. 요거트는 모름지기 걸쭉해야 제맛이라고 믿으며 혼자 외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그 맛있는 유청을 다 버린다니. 삼겹살에서 비계만 잘라내고 살코기만 먹는 것과 비슷하다. 한 마디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일단 '그릭 요거트만' 먹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꾸 색다른 무언가를 보탠다는 점에서 일단 맛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다. 세상만사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먹는 즐거움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차라리 요플레 뚜껑을 그냥 버리고 말지. |
강남에서 살아남기
병원에서 의료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아저씨는 혼자 팻말을 들고 병원 앞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병원 앞에는 새빨간 거짓말을 멈추라며 아저씨가 쓴 팻말의 내용을 요목조목 반박하는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사람들은 흘낏 흘낏 아저씨나 현수막을 쳐다봤지만 이내 금세 시선을 핸드폰으로 돌리더니 이어폰 속에 몸을 묻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제이지의 노래, <Empire State of Mind>의 가사가 떠올랐다. 꿈으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정글. 갓 군대를 전역하고 간도 크게 강남에 원룸을 구한 내가 만난 강남과의 첫인상이었다. 강남은 재수학원 건너편에 술집이 즐비한 유흥가가 위치한, 한 마디로 모순으로 뒤덮인 이상한 도시였다. 원룸형 아파트인 우리 집에 어떻게 외제차들이 가득한지, 점심시간이면 정장을 입고 한 손에 커피를 든 무리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이제 막 사회로 빠져나온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한 순간에 뱉어버릴 것 같은 도시, 그게 딱 전부였다. 괜히 '서울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버닝>에서 재력가인 스티븐 연을 바라보는 어딘가 얼빠진 유아인의 얼굴처럼, 강남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얼굴은 누가 봐도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이 동네에 거주한 지도 1년이 조금 넘었지만 여전히 이곳은 어색하다. 강남, 특히 역삼의 식당가들은 주말만 되면 문을 전부 닫는다. 왜? 주말에는 직장인 손님들이 없으니까. 그 빈틈을 자본 걱정 없는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 토요일 오후 2시쯤 서브웨이를 찾으면, 늦잠을 자고 허기진 빈속을 달래기 위해 찾아온 나와 비슷한 영혼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직업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소서를 끄적이던 백수 시절 헬스만은 꾸준히 했다. 군대가 만들어준 좋은 습관 중 하나였다. 아무리 하루를 게을리 보내도 저녁 시간, 잠들기 전 헬스장에서 땀 흘려 운동을 하고 밤거리를 나서면 내가 누구보다 이 정글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 착각을 즐기기 위해 운동을 빼먹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이 도시에 살기 위한 내가 감당해야만 했던 최소한의 의무이자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열심히 살지 않으면 마치 내가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갓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제 이 도시에서 성실함은 미덕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어찌어찌 원하는 일을 하며 이곳에 발을 붙이고는 살지만, 내게 여전히 강남은 종잡을 수 없는 도시다. 낮에는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지만, 해가 지면 그 많던 회사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은 채 쾌락을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 아마 출근길마다 역삼역 출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을 헤치며 강남을 벗어나는 나를 보면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저 사람은 강남에 살면서 강북으로 출근을 하네?라며 말이다.
오랜만에 이어폰을 빼고 출근길을 걸었다. 이어폰 소리에 파묻혀 듣지 못했던 매미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거리를 울리고 있었다. 매미를 포함한 모두들 각자의 정글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여기에 내가 있다고, 알아달라고 속으로 소리치며 말이다.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나뒹구는......세상이다.
영화 <돼지의 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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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잘 쉬다 가셨나요? 쉬려고 했다가 괜히 기운만 빠지셨다면 여기에 적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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