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스트로스의 청문회,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오펜하이머의 생애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조각을 맞춘다. 책장 술술 넘어갔다던 하하의 말처럼 3시간이 정신없이 술술 넘어간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고 폭탄을 만들고 그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을 지켜본다. 그 사이에 그가 공산주의에 몸을 담았느냐 아니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아주 애국자가 됐다가 애국 안 하는 사람이 됐다가 상황에 따라 주변에서 역할을 뒤바꾼다. 하다못해 얼굴도 모르는 SNS 친구조차 맺고 끊는 게 어려운 와중에, 왜 그 사람이랑 계속 알고 지냈느냐고 따져 묻는다. 어제는 전쟁을 종식한 영웅이 오늘은 불순한 사상으로 적국에 무기 개발을 부추긴 사람이 됐다.
만일 그가 연구 결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폭탄 투하 이전에 강하게 느꼈다 해서, 이 프로젝트를 관두고 폭탄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적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위기감, 국가원수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기대, 소박하게는 자신의 명성과 연구자로서의 권위를 포기하고? 그러니까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폭탄을 만드는 과정이나 물리학의 이해도가 아니다. 어차피 오펜하이머는 어떻게든 폭탄을 만들게 되어있으니까.
아무튼 영화를 보는 데에 물리학은 제대로 몰라도 된다. (물리학보다는 제2차세계대전을 포함한 현대사를 보고 가는 편이 낫다.) 그가 공산주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든 아니든(이 점에 대해서는 아내인 키티의 증언이 인상적이다), 개인의 역사와 성취는 사회·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입맛대로 조립된다. 원자폭탄이 확률적으로 0에 가까운 실패율을 보이고, 그 결과물이 과연 전쟁의 종식을 가져온 듯 보여도 역사와 살아남은 개인의 삶은 계속해서 흐른다. 오펜하이머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near 0일 뿐, 절대 0%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세계, 지금 내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최선만이 가능한 세계. 이런 예측 불가능성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슬프고 좋았을까?
(그나저나 이번 주말엔 나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나 읽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