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버둥을 눈치 챈 적이 있나요?
독자님은
발버둥 치는 스스로를
눈치 챈 적이 있나요?
저는 제 발버둥을
조금 늦게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쓸모 있으려고 애쓰는 걸 알았을 땐
부끄럽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남에게 [티나는] 발버둥은
절대 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는
마음을 꽁꽁 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웬만한 건
혼자 해결하며 산 것 같아요.
물론 여기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마음을 눌러가며
혼자가 익숙해지니
따스한 마음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온기를 맛보겠어?' 싶어서
아무 애정이나 허겁지겁 먹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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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환경이었다면 누군가는
그런 저를 아껴주었겠지만
환경이 좋지 못할 때에는
그 공허감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아무튼 마음을 숨기고
발버둥을 억누를수록,
애정에는 귀신 같이
반응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애정에 영양가가 있는지 없는지,
상했는지 곰팡이가 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일단 허기를 채워야
살 수 있었으니까요.
온기는 언제고 필요한데,
허기가 채워지는 속도는
늘 더뎠습니다.
그래서 늘 자책했던 것 같아요.
'나는 왜 이렇게 나아지질 못하고,
애처럼 한치 앞만 보는 걸까?' 하고요.
막상 지금은 그냥,
사람과 사랑을 아주 좋아하는 채로
밀린 마음의 숙제를 성실히 하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고 있지만요.
남은 숙제를 하는 어른이
세상에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을지 떠올리면
왠지 안심이 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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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오두막 지기는
스스로의 뽀송함은 몰라도,
남의 뽀송함에는 아주 민감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아마 [뽀송함]을 논하기엔
상황이 너무 어려웠던 시절,
마음에 빗장을 채운 어른들을
가까이 보고 자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네요.
어른을 위로하는 스스로를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라고 믿고
어른을 웃게하는 건
자신 뿐이라고 여기면서,
감정 흡수반을 자처하곤 했으니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어른들은
어린 아이의 위로 덕이 아니라,
자연히 상황이 풀리면서
전보다 훨씬 나은 버전으로
자신의 뽀송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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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어른이 된 지기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어른들이 불행할 때에도,
지기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거든요.
나와 가까운 가족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건,
그때 제 마음의 고리가 여전히
가족에게 묶여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체할 애정의 대상이 생기면
얼마든지 떠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또 그러기 위해 애썼던 스스로가
가엾고 대견한 요즘이에요.
이제는 멀리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각자의 뽀송함을 찾는다는 것은
쓸쓸하긴 해도, 참 잘 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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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오두막 지기는
남의 뽀송함보다는 나의 뽀송함이
언제 찾아오는지,
누구와 함께할 때
더 쉽게 뽀송해지는지 알아가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고 해요.
뽀송함은...
반드시 상호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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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신과
이제는 뽀송해진
가족을 떠올리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뽀송함의 원천은 결국
[자원]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를 그냥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었던 경험.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한 명쯤 있다는 느낌.
내가 가진 무언가에
감탄해주던 누군가의 반응.
존재 자체로 사람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던 경험.
이런 느낌이 모이면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뿌리를 내리면
내 짐을 같이 들어주던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내 능력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기댈만한 대들보를 만들어갈 때
[뽀송]의 기반도 다져지는 것 같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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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내적 자원]과 [외적 자원]으로
이야기하더군요.
내적 자원은 신뢰와 지식처럼
내가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고,
외적 자원은 나를 지지하는
심적/ 물리적 기반입니다.
사람과 일, 정부의 도움도
외적 자원이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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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알고 돌이켜보면,
저와 가족들은 자원이 없는 곳에서
자원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아주 조금씩
이동해왔던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요.
나의 무언가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면서요.
그 과정에서 때로는
내 존재의 조각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서
피드백을 해주기도 하고,
이끌어 주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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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부디,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이 이게 나]라고
느껴지는 행동이 있다면
그 발버둥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셔요.
부끄러움 때문에
발버둥을 감추거나
멈추지도 마셔요.
오히려 발버둥 치고 있다고,
가능하면 많이 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반드시
내 발버둥을 듣고 다가와줄 테니까요.
발버둥 치지 않는 삶보다
발버둥 친 삶이 훨씬 후회가 적고,
얻는 게 많다는 사실을
저는 조금 늦게 이해했어요.
발버둥이 싫어서
예민해도 순한 척하고,
뭐든 중간쯤 해서 얌전히 얌전히,
눈에 띄지 않는 게 소원이었던 저도
지금껏 발버둥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독자님도 힘내서
발버둥을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삶은
그저 발버둥의 연속이
아닐까 싶어요.
다만 그 발버둥이 나다울 때
의미 있어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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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독자님은
오두막 레터를 구독하고
자신의 민감성을 인지한 순간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한 그 순간부터
[자원]을 늘리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계실 거예요.
저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발버둥을 치면서
기꺼이 살아낸다는 건
아주 장한 일 같습니다.
독자님. 부디 오늘도
스스로의 발버둥에 그럴만 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끄덕여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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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언제 마음이 뽀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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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주민 이야기
🌤️
매일 같이 삭막한 일 메일과 광고 메일만 왔었는데, 오두막 레터를 구독하고나니 메일함 들어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고, 제 마음을 보듬어보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기님이 해주시는 말들은 공감가는 것도 있고 와닿지 않는 것도 있지만,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저에게 선물해준다는 것 자체로 아주 의미가 커요. 귀여운 삽화도 잘 보고 있습니다. 동화책 같기도 해요^^
감사합니다.
- 오두막 주민, 일랑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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