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 과신뷰
이 달의 주제
대화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science and the theology

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과신뷰 vol.71

편집팀장 : 김양현 │편집위원  : 박아론 이슬기 

목차
  • 주제 칼럼 : "두 불길이 만나다 : 존 웨슬리와 뉴턴 과학" (김재상)
  • 과신대 사무국 소식 : (박아론, 이슬기)
  • 영화 칼럼 :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김양현)
  • 이 달의 핫 클립 : "성경은 어떤 책인가?" (김근주)
  • 과신대, 사람을 만나다 : "연구이사 정대경 교수"
  • 목회자 모임 후기 : 제주 리트릿 후기 (홍은경)
  • 북클럽 후기 : 《헤아려본 믿음》 관악북클럽 참여후기 (백원기)
  • 과신뷰 이달책 : 《급진적 종교 개혁파의 관점에서 본 신학과 과학의 화해 (박아론)
주제 칼럼🖋

두 불길이 만나다 : 존 웨슬리와 뉴턴 과학

글 | 김재상
과학기술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과학기술과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 공공신학 연구소 연구원이자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존 웨슬리  
아이작 뉴턴

서론


 18세기 영혼의 불길과 이성의 불길이 영국 전역을 가로질렀다. 성결의 복음을 외치며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주도하는 영국 부흥의 불길이 한창 타올랐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만유인력 원리를 통해 천상계와 지상계를 통합하여 절정에 이르게 했던 과학혁명이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이성의 불길을 지폈다. 이처럼 18세기 영국은 존 웨슬리와 아이작 뉴턴으로 대변되는 신앙 부흥과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 불길은 서로에게 어떠했을까? 상대를 끄기 위해 맞불을 놓았을까? 아니면 서로 만나서 더욱 큰 불이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영혼의 불길이 이성의 불길을 어떻게 보았는지 적어보겠다.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1. 전통적 견해


 교회사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영혼의 불길은 이성의 불길을 거부하였다.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을 거부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인 토마스 류터포드(Thomas Rutherford, 1712-1771)는 존 웨슬리와 동시대를 살았다. 류터포드에 따르면, 존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은 자연과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을 경건한 신앙을 위한 걸림돌로 보았다. 이러한 류터포드의 주장은 이후 여러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19세기 거장 중 한 사람인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 1831-1918)는 자신의 명저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존 웨슬리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의 과학을 반대하며 과학을 신학의 시녀로 만들고자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뛰어난 과학역사가였던 로버트 쇼필드(Robert Schofield, 1923-2011)는 저명한 국제 과학사학회지인 《Isis》에 “John Wesley and Science in 18th century England”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존 웨슬리가 존 허친슨(John Hutchinson, 1674-1734)을 옹호하였다고 보았다. 허친슨은 데카르트 과학을 옹호하며 뉴턴 과학을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와 달리, 뉴턴은 운동의 원인을 말하지 않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또한 뉴턴은 물질계와 신을 동일시하였다. 쇼필드에 따르면, 이러한 허친슨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존 웨슬리는 당연하게 뉴턴 과학을 거부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교회사나 과학사 진영에서는 뉴턴 과학을 거부하며 이성을 신앙의 장애물로 여긴 인물로 존 웨슬리를 평가해왔다. 18세기 영국을 타오르게 했던 영혼의 불길은 무척이나 차갑게 이성의 불길을 거부했다.

2. 존 웨슬리와 뉴턴의 과학


 그런데 과연 그러했을까?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을 신앙의 장애물로 여겼을까?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시절 존 웨슬리는 자연 현상의 원인 탐구를 강조하는 자연과학을 공부하였다. 물리학도 공부하였지만 생물학 연구에 무게를 두었다. 이는 당시 이신론에 대한 영국 국교회 변증가의 전략 때문이었다. 그 전략에 따르면, 생물학 모델에 가까운 창조자-영(Creator-Spirit) 모델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동물 행동의 동기와 호흡에 대해 연구했던 존 웨슬리는 ‘동물의 영혼’에 대하여 논문으로 1727년에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존 웨슬리는 생물학뿐 아니라, 틈틈이 뉴턴 과학도 공부하였으며 광학 실험을 즐겼다. 또한 바르톨린이 쓴 『자연 철학 개요』를 탐독하면서, 『개요』라는 요약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르톨린은 데카르트 과학을 지지하였으며 허친슨과 비슷한 관점에서 뉴턴 과학을 비판했다. 바르톨린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신이 처음 충격을 가해 물질이 움직이게 되었다고 하면서 운동에서 신의 역할을 언급했으나 뉴턴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뉴턴은 데카르트와는 다른 시각으로 물질 운동을 연구했다. 그는 운동의 원인보다 운동의 과정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연구 목적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운동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체들이 직접적으로 충돌하여 운동한다고 주장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뉴턴은 멀리 떨어진 물체들이 만유인력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운동한다고 보았다.

 존 웨슬리의 『개요』를 보면, 데카르트 과학에 충실한 바르톨린의 설명과 주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바르톨린 주석과 다른 시각을 보이는 웨슬리만의 주석도 찾아볼 수 있다. 바르톨린은 접촉에 의해 물질 운동이 일어난다고 보면서 세계에는 진공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진공이 없다는 진술 자체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기에 바르톨린의 설명을 반드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옥스퍼드 올 세인트(All Saints)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들이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운동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점은 뉴턴 과학의 주장이다.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의 핵심을 알고 있었으며 그 내용 일부를 설교에 활용하였다. 게다가 자신이 만든 성직자를 위한 도서 추천 목록에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와『광학』을 올려놓았다. 이처럼 존 웨슬리는 바르톨린과 다른 시각에서 뉴턴 과학을 보았다.

 뉴턴 과학에 열려 있는 존 웨슬리였는데, 왜 그는 반뉴턴주의자로 간주되었을까?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존 허치슨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존 허치슨은 1724년에 저술한 『모세의 원리』 에서 뉴턴 과학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다고 보면서, 허치슨은 하나님이 만유인력의 유일무이한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뉴턴을 물질세계와 신적 세계를 동일시하는 범신론자로 보았다. 사실 이러한 점들은 허치슨이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2판부터 실린 일반 주해를 오독한 결과였다. 뉴턴의 일반 주해를 보면, 만유인력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원리이다. 그리고 만유인력은 이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였다.

3. 존 웨슬리와 뉴턴의 관계


 그러나 존 웨슬리는 신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허치슨의 열정에 끌렸다. 그는 아직 불명확한 뉴턴보다는 성서적 확실성에 근거한 허치슨 주장이 신앙의 실천 측면에서 더욱 유효하리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허치슨의 주장을 수용만 하지는 않았다. 1758년 한 저서에서 존 웨슬리는 허치슨의 주장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주장은 성서와 건전한 이성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존 허치슨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웨슬리를 반뉴턴주의자로만 보는 시각은 이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뉴턴 과학에 대한 존 웨슬리의 입장에는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있다. 긍정 측면은 존 웨슬리가 반뉴턴주의자라는 기존의 평가를 무색하게 한다. 1763년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고찰』이라는 글에서 존 웨슬리는 조류와 혜성 운동에 대한 뉴턴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으며, 뉴턴의 『광학』은 천재를 기리는 영원한 기념비와 같다고 언급하였다. 1781년 『간략한 교회의 역사』에서 존 웨슬리는 아이작 뉴턴에 대한 마음을 서술했다. “엄청난 천재성과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으로 철학에 가장 위대한 진보를 가져오고, 이전에 전혀 탐구되지 않았던 지식의 길로 지식의 등불을 가져온 불후의 인물이 바로 아이작 뉴턴 경이다.” 그는 뉴턴과 뉴턴 과학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뉴턴 과학의 세계관에 경각을 가졌다. 그는 뉴턴이 하나님의 섭리를 제한하였다고 보았다. 즉, 뉴턴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거부했다. 존 웨슬리가 볼 때, 뉴턴의 하나님은 이신론적 신에 가까웠다. 또한 당시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버클레이 그리고 에드먼트 버크처럼, 그 역시 뉴턴이 강조한 엄밀한 수학 방식으로는 불변하며 영원한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 이성으로 자연 세계 전부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학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자연 세계가 수학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면 신앙은 결국 이신론 세계관으로 귀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존 웨슬리는 신학과 정치 측면에서 뉴턴 과학에 경계심가졌다.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옹호한 그였지만, 아이작 뉴턴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기적을 부인하며 삼위일체론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자였다. 또한 웨슬리는 보수 왕당파인 토리당원이었으나 뉴턴은 개혁 의회주의자인 휘그당원이었다. 당시 토리 고교회주의자들은 뉴턴 이론이 이신론자나 무신론자 그리고 교리에서 자유로운 광교회주의 저교회파에서 신봉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존 웨슬리는 허치슨의 주장에 일부 동조하였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핀 뉴턴 과학에 대한 존 웨슬리 입장은 전통 견해와 다르다.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 지식을 거부했다기보다는 뉴턴 과학으로 부상하는 근대 과학주의 세계관을 경계하였다. 그는 이 세계관이 성서와 체험을 통해 경험되는 하나님 은총의 자유와 섭리를 심히 위협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존 웨슬리는 뉴턴 과학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 자세를 뉴턴 과학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부득이한 결과라고 단순히 치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 자연신학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선행 은총’ 사상에서 보면, 인간이 비록 타락하였어도 인간 이성은 선행 은총으로 인해 부분적으로나마 새롭게 되어,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존 웨슬리는 ‘건전한 이성’을 신학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했다. 성서, 전통, 경험과 함께 이성 역시 신학 밑천이다. 그가 강조한 건전한 이성이 추구하는 과학은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교만한 과학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겸손한 과학이다. 선행 은총과 건전한 이성을 통해 존 웨슬리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적극적인 만남을 주선하였다. 18세기 영국 전역에서 두 불길이 타올랐다. 존 웨슬리가 지핀 영혼의 불길은 뉴턴 과학이 일으킨 과학혁명의 불길을 마냥 거부하지만은 않았다. 서로 만나서 큰 불을 이루어, 하나님과 우주를 총체적으로 바라고자 하였다.

안녕하세요!

 

 과신대 행정팀장 박아론입니다. 이제 무더위가 불쑥 찾아오는 6월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한 것 같습니다. 이런 날씨에 건강 관리 잘하시길 기원합니다. 최근 사무국은 정신이 좀 없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책상에 이것저것 널브러져 있네요. 포럼 준비와 아카데미에 대한 고민, 사무국 내부적인 행정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 가끔은 일의 가짓수가 많아서 제대로 하고 있나 싶은 의문이 듭니다. 그래도 배워가는 즐거움이 있고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부족해도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근황을 공유드리면, 비영리단체 관련 교육을 듣고 있습니다. 다시 대학교 수업을 듣는 느낌입니다. 교육 내용 중에 가장 깊게 생각해 본 건 비영리단체와 영리단체의 차이였습니다. 영리단체는 사업을 통해 나온 이익을 구성원들이 나누어 갖지만 비영리단체는 불특정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돈을 낸 사람들이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돈 안 낸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영리단체는 ‘가치’와 ‘의미’를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돈을 어떻게 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는 단체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무신론에 대한 대응과 균형 있는 창조신앙의 확산이라는 가치를 위해 후원자분들의 돈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후원자님들의  물질적인 헌신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직접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아시는데도, 한국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바보 같은 우리 후원자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후원자 여러분들의 동역이 있어서 과신대가 계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동지애를 느끼곤 합니다.

 

 바라기로는 우리 과신대가 무신론의 도전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세상에서 대안이 되는 것을 보이는 단체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성의 등불로서 교회의 전 세대가 감히 물을 수 있는, 서로의 계급장(?)을 떼고 열린 마음과 자세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대화의 장(場)을 마련하는 단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달려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박아론 올림

이 달의 소식 📧


1. <과학 시대의 신앙> 제주도 특강  

  6월 16일에 과신대 제주 북클럽과 제주 더불어행복한 교회가 함께 준비한 <과학 시대의 신앙> 특강이 있습니다. 강사에는 과신대의 대표인 우종학 교수님이 수고해 주십니다.
 특별히, 과학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자녀를 균형 잡힌 신앙으로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진행된 오프라인 행사를 위해 여러분들이 많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신뷰 편집장이자 제주 북클럽 지기를 맡고 계신 김양현 목사님이 많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 과신대 서포터즈 1기

 과신대 사역을 함께 동참할 신학대학(원)생 분들을 1기 과신대 서포터즈로 모집했습니다. 이번 1기 서포터즈는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했지만, 점차 외연을 확장해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과신대 사역에 동참해 과신대의 비전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3. 교사 모임/ 목회자 모임
    • 교사 모임 : 과신대 교사모임에서는 교회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워크북 제작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다음세대에게 균형 잡힌 창조 신앙을 전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교사 모임 참여에 관심 있는 선생님들께서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 목회자 모임 : 6.12(월)에 진행된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멀티버스, 미국 이민자 사회, 페미니즘, 성소수자, 부모와 자녀 세대의 소통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나눴습니다. 다음 모임은 7. 10.(월) 오후 8시 '공공신학으로 보는 교회의 에너지 전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과신대 목회자 모임은 다양한 사역 현장의 경험을 나누고, 목회 현장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연대하고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정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4. 과신대 북클럽

    북클럽은 정회원들이 직접 주관하고 참여하는 독서 모임입니다. 모임 참여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5. 과신톡(Talk)
    '샤르댕 북클럽'과 '성서와 여성 북클럽'이 함께 준비한 ‘과신톡’ 행사가 열립니다. 
    이번에 함께 읽을 책은 무사 두베의 <제국·성서·탈식민 여성주의>입니다. 번역자이신 이해청 박사님의 인도로 함께 읽습니다.  탈식민주의의 주제이기도 한 ‘주변부를 돌아보기’는 문자주의 성서관에 매몰되지 않고 과학, 이성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고자 하는 과신대의 노력과도 방향이 일치합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제국·성서·탈식민 여성주의> 책 읽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과학 시대에 함께 신앙의 길을 모색하는 과신대 북클럽에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신청 링크 : https://bit.ly/3N70DoZ
    5. 2023년 5월 재정 보고

    이번 달 재정은 수입 6,391,937원, 지출 7,604,790원입니다. 장기 후원자님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와 오프라인 모임 준비가 있어서 지출이 많았지만,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이번 달도 과신대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재정 보고는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함께해 주세요! 🙌


    1. 7월 포럼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과신대의 꽃, 포럼이 여러분들을 찾아갑니다.
    신청 기간 동안 많은 관심과 성원 그리고 (제일 중요한) 신청 부탁드립니다.
    영화 칼럼🖋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글 | 김양현
    과신뷰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제주 북클럽지기로 섬기고 있다.

    1. Everything


     모든 것이 엉망이다. 삶이 뒤엉켜 버렸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았다. 세탁 일을 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세탁이 맘에 안 든다며 돈을 내지 않는 손님, 옷감이 상했다며 물어내라는 손님,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다. 게다가 지금은 세무서, 이 깐깐한 직원은 온갖 잔소리를 하며 서류를 보완해 내라고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살만했다. 에블린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다소 융통성이 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 가끔 속을 뒤집어 놓지만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버지 때문에 견뎠다. 가족은 그녀에게 희망이었고 삶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남편이 이혼 소송장을 내민다. ‘당신하고 더 이상 못 살겠다, 당신은 일 밖에 모른다. 나에게 관심도 없다.’고 같잖은 이유를 들이댄다. 딸은 미국 여자아이를 데려와서 굳이 가족들에게 소개하겠단다. 자기는 동성애자라고, 여자 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한다. 잘 지켜왔던 세탁소는 세무 관련 법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골칫거리다.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내 삶이 그렇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내려앉다니.

    2. Everywhere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려는 시점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무서에 앉아 있던 에블린에게 이상한 모습을 한 남편이 등장한다. 분명 소심한 남편인데 무언가 다르다.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공격을 가하는데 남편이 다 물리친다. 그리고 에블린은 남편의 손에 이끌려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멀티버스에서 왔고,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블린 당신이 그 세계의 희망이라고 한다. 순간 다른 세계의 악당이 등장하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 조이 아닌가? 조이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조부 타파키라면서 사정없이 에블린을 공격한다.

     알고 있던 세상이 모두 달라졌다. 남편 에드먼드가 하라는 대로 엉뚱한 짓들을 하자, 에블린 역시 대단한 능력자로 변신한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굉장한 실력자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조부 타파키를 물리쳐야 한다. 에블린은 이 세상, 저 세상, 다양한 멀티 버스를 오간다. 에블린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그녀의 과거가 펼쳐진다. 다른 세상에서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멋진 영화배우며, 남편 에드먼드 역시 멋진 미남 배우다. 또 다른 세상에서 에블린은 화려한 무술 실력을 발휘하는 여 전사다. 멋진 투사가 된 에드먼드가 에블린에게 말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생각하겠지. 당신은 항상 긍정적인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이야, 그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부드러움은 살아남기 위한 내 전략이야. 내 삶에서는 나도 투사야.” 에드먼드의 말에 따라 에블린도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다.

     억척스럽게 투사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렇게 모든 곳을 다니며 삶을 지켜나가는 에블린에게 최강의 빌런이 등장한다. 딸인 줄 알았지만, 그녀는 조부 투파키 – 우주의 최강 빌런이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파괴해 나간다. 조부 투파키는 죽어 버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서 베이글(블랙홀)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은 사랑받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일을 좀 내려놓고 나를 바라봐 주면 안 되냐고 외치는 딸의 투정이다.

    3. All at Once

     다시 삶이다. 멀티 버스에서 돌아온 에블린의 삶은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 보인다. 후회와 한숨으로 살아온 자신의 세탁소는 아름다운 곳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남편은 다정한 사람으로, 속 썩이는 딸은 사랑스러운 아이로 다가온다. 꿈을 꾼 듯 멀티버스의 경험이 에블린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워졌다. 달라진 것은 결국 에블린의 내면이다. 그녀는 진짜 투사로 거듭났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장착한 진짜 투사다.

     가정을 지켜 온 그녀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말했다. “삶은 의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건네주던 동료에게서 그는 진정한 삶을 배웠다. 죽음은 희망의 상실이지만,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때문에 죽음을 이겨냈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자고 역설한다. 현실은 불의와 악이 가득하다.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한 채 포로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현실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 나라에서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굴며,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으며, 대립과 반목은 사라진다. 불화와 오해는 사라지고 사랑만이 존재한다. 그 나라는 나의 상상에서 현존한다. 아니, 믿음은 지금의 현실을 뛰어넘어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한다. 천국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멀티 버스로 존재한다. 언젠가 그 나라로 충만해질 때, 모든 것, 모든 곳이 한꺼번에 새롭게 될 것이다. 그 나라를 소망한다.
    추신 : 멀티 버스는 존재하는가?

     요즘 멀티 버스가 화두다.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멀티 버스를 소재로 제작하고 있다. 마블은 일찍이 멀티 버스를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제목이 멀티 버스의 혼란이고, 스파이더맨에서는 다른 지구에서 온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다. 로키라는 시리즈에서도 멀티 버스를 오가며 그들이 설정한 타임-라인을 혼란시키는 존재로 그린다.

     그럼 멀티 버스(Multi-verse)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용어일까? 그렇지 않다. 콜롬비아 대학의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의 저서 멀티 유니버스를 통해 이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이들 물리 천문학자들이 멀티 버스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빅뱅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빅뱅이 일어나 오늘날까지 우주가 서서히 팽창하면서 존재해 왔으나 그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론적으로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꺼낸 것이 멀티-유니버스다. 즉 다중우주론이다. 우주는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이야기다. 그중 하나가 우리가 확인하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라는 말이다.

     다중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우선 인플레이션 이론을 가져왔다. 빅뱅 이후 우주 초기에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는데, 현재의 공간을 창출한 폭발 이외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로 멀티 버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끈 이론으로 다중우주를 설명하는데, 끈 이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이외에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러한 가설을 영화는 스크린에 녹여 내고 있다. 이들은 멀티 버스를 실제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럼 정말 멀티 버스는 존재할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가져오지만, 여전히 확인할 가능성은 없다. 또한 어떤 천문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공상 과학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럼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멀티버스가 신학적으로 가능할까?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메시아가 필요한 것인가? 그들은(만약 있다면) 죄를 지었을까?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다만, 성경을 읽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과 다른 영역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계시고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존재다.

     또한 성경의 인물들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야곱은 하늘과 맞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다니엘은 하늘 보좌를 보았으며,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멀티버스에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니버스(Universe)의 다른 차원(Dimentions)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실 것 같다. 일찍이 에드윈 A. 애벗이 쓴 플랫랜드에서 그린 것처럼, 우리보다 높은 차원, 그것을 우리는 영원, 영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정리하면 멀티버스라기보다 유니버스의 다른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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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새롭게 구성된 과신대 이사님들을 만나는 시간
    과신대 사람을 만나다
    연구이사 정대경 교수
    인터뷰어 | 김양현
    과신뷰 편집장

    Q1 교수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  저는 현재 숭실대학교에서 교수로서 기독교 교양과목들과 과학신학, 종교와 과학 관련 수업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교목으로 서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적으로 전달하는 역할 또한 하고 있습니다. 학부, 교역학 석사는 기독교 신학을 전공했고, 박사는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이란 곳에서 과학신학을 주 전공으로 학위를 마쳤습니다.

    Q2 과신대를 알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A : 2015년에서 2016년 어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과신대라는 단체 보다 우종학 교수님 개인이 페이스북 활동하시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과학신학 혹은 신학과 과학의 대화 관련 활동이 국내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1회 과신대 포럼이 서울대에서 열리는 것을 보고 과신대라는 단체가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버클리 GTU 학교 전경  
    Q3 과신대에서 지금 맡고 계신 것은 어떤 것인가요?


    A :  연구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과신대에는 대략 2017년부터 시작된 연구모임이 있습니다. 제가 4회 콜로퀴움인가에서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콜로퀴움 마치고 우 교수님을 포함한 참석자 몇몇 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기독교와 자연과학 사이 대화를 바탕으로 하는 대중적인 작업이나 교육과 병행해서 전문적인 연구모임과 그룹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후, 과학신학 전공자들이 2017년 어간에 몇 분 더 학위를 마치고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구모임이 시작되었는데, 현재 과신대 연구소는 이 모임을 모체로 두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연구팀장을 맡으면서 연구모임에 참여하시는 박사급 연구원들과 다양한 전공의 현직 교수들과 함께 과학신학을 개론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으로부터, 특정 주제를 선택하고 해당 주제와 연관된 문헌들을 선택한 후 이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연구모임을 코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연구모임을 투 트랙으로 구분해서 운영하자는 제안에 따라, 현재 연구모임은 박영식 연구소장님의 리드 아래 과학신학 전문 서적들을 읽고 독서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이와 독립되어 연구팀이 과신대 펠로우십을 받아 운영되고 있습니다.


     연구팀은 이성호, 전진권 교수님과 저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 연구하는 주제는 대략 1950년대부터 시작된 종교와 과학, 신학과 과학 사이 대화와 협업을 주도했던 연구소들과 단체들을 개략적으로 파악하고 정리하면서 최근 10년 내 출판된 과학신학 관련 연구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국내 신학과 과학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향후 과신대가 대중교육 작업과 더불어 수행해야할 전문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필요한 기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4 과학신학을 전공하시고 과학신학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기독교신앙과 과학 사이 조화를 꿈꾸는 청소년, 청년들 혹은 이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  저 역시 중학교 시절 경험했던 과학적 사고와 기독교신앙 사이의 괴리감으로 인해 신앙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기독교 신앙과 과학 사이의 괴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해석해온 신학의 특정 입장과 과학적 발견과 이론 사이 괴리였습니다. 이런 괴리감의 원인은 제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반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 없었던 상황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제가 가진 신앙을 비판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러한 과정은 신학을 공부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인데, 우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해 본 적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이 2천 년 이상 세상 안에서 호흡해오면서, 사회로부터 제기되는 질문들에 응답해오면서 쌓아왔던 신학의 전통을 우리는 모른 체 신앙생활을 보통 해왔던 거죠. 보면 볼수록, 우리가 지금 씨름하는 질문들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과거 이미 씨름했던 질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질문들에 기독교적으로 올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신앙의 전통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 혹은 조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믿는 전통에 대한 공부, 우리가 가진 신앙에 대한 이론적 정립인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5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의 관계란?


    A : 정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천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을 통해 밝혀지는 세계에 대한 진리는 계시를 통해 밝혀져 온 기독교적 진리와 정합(coherence)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내용들이 진리라면, 그 내용들 사이에는 내적인 모순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분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알아가게 됨으로써 알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자연신학의 전통), 계시된 경전인 성서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계시신학의 전통) 모두가 필요함을 역설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단순히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반드시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모임 후기
    과신대 목회자모임 -제주 리트릿 후기
    글 | 홍은경
    울산 영신교회 교육목사이자 두란노 큐티 집필자이다.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집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시기에 만난 과신대는 나를 먼 우주로 여행 다니게 해준 아주 고마운 모임이다. 내가 알고 믿어왔던 하나님이 지구적인 하나님을 넘어 전 우주적인 하나님이심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해준 그런 모임이기에 나는 과신대에서 하는 관심 있는 포럼이나 세미나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더욱 친밀한 소속감을 갖게 해준 모임은 과신대 목회자 모임이다.

     과신대 목회자 모임은 온라인으로 시작된 모임으로 매월 둘째 주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단순히 목회자라는 공감대로 함께 하는 모임이기에 작년 과신대 송년회 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가 않은 편안한 모임이다. 그동안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서는 각자 다른 교단과 다양한 목회 현장이 있기에 자신의 위치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편하게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고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통을 하며 지내던 목회자 모임에서는 제주에 계신 김양현 목사님도 방문할 겸 제주 모임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 모임은 작년 송년회 만남에서 잠깐 언급된 계획이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4월에 코로나 팬데믹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자유로운 여행이 허용되기 시작했던 터라 그동안 여러 제한 속에서 열심히 목회만 전념하시던 목사님들이 리트릿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구체적인 실행에 나서게 되었다. 목회 현장에서 잠시 물러나 쉼과 회복을 위해 기획되었기에 ‘리트릿(retreat)’이라고 모임의 정의를 내려보기로 했다.

     목회자 모임 단톡방에 공지를 올린 후 부부 동반으로 함께 하자는 제안으로 정삼희 목사님 사모님과 저의 부군 목사님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현식 목사님과 김양현 목사님 그렇게 총 6명이 함께 2박 3일의 제주 리트릿 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각자 주일 사역을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주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공항에서 만났다. 이번이 대면으로 보는 것은 아마도 세 번째였던 것 같다. 그런데도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인 것처럼 모두가 한결같은 반가움으로 서로를 맞이했다.
     피곤한 주일임에도 저녁에 나눈 깊은 목회적인 고민과 경험들은 밤을 새워도 끝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고 흥미 있는 공감대를 이루며 계속되었다. 그렇게 첫날 일정은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마칠 수가 있었다. 다음날은 현지에 계신 김양현 목사님이 우리와 합류하셨고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서로에게 깊은 관심과 환대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걷고 또 걸었다. 비가 오는 축축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의 상쾌한 공기는 그동안의 묵은 피로감을 모두 씻어주는 듯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담아낸 김영갑 작가의 작품들을 관람하러 갔다. 물론 현지에 계신 김양현 목사님이 강력하게 추천한 곳이다. 성산 쪽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는 작은 시골 분교를 개조해 단순하지만 운치 있게 조성해 놓은 곳이었다. 구름과 바람을 주제로 용머리 오름과 그 주변의 아름답고도 신비한 풍광을 넓은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은 멋지고 의미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동안 관광객 모드로 체험하고 먹느라 놓쳤던 깊고 아름다운 제주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이어서 간 곳은 ‘더 벙커’라는 곳이다. 수많은 명화들을 디지털 전시로 소개하는 곳인데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서 작가의 작품들을 재구성해 상영해 주는 곳이었다. 폴 세잔과 칸딘스키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정적인 갤러리에서의 관람과는 달리 입체적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공간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오름에는 꼭 올라야 한다는 김양현 목사님의 추천으로 새별 오름에 올랐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히는 새별 오름은 청명한 날씨 덕분에 정상에 올라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제주의 아름답고도 이색적인 풍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제주의 둘레길 완주를 8번이나 하신 김양현 목사님의 추천 코스는 무조건 덮어놓고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아름답고도 멋진 여정이었다. 그 외 목사님만이 아시는 시크릿 장소들도 많았다. 해변길과 산책길들도 너무나 멋졌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주에 가서 오름을 오른 게 처음이다. 주로 카페 투어나 맛집 투어로 일관했던 지난날의 관광객 모드를 버리고 진지하게 제주를 대할 수 있었던 여행이지 않았나 싶다.

     좋은 목사님들과 아름다운 자연과 그리고 현지에서 만난 제주 북클럽 회원님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꽉 채워진 듯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특별히 둘째 날 저녁시간에 제주의 특산물 황금광어를 맛있게 대접에 주신 김양현 목사님과 사모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함께해 주신 제주 북클럽 회원님들과 기꺼이 점심 만찬을 대접해 주신 팽동국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제주 리트릿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는 우리 과신대 목회자 리트릿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여행지는 과연 어디로 가서 또 즐거운 만남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벌써 기대가 된다.
    북클럽 후기
    《헤아려본 믿음》 관악북클럽 참여 후기
    글 | 백원기
    이혜련의 남편이자 성현, 가은, 시은, 예은이의 아빠이다.
     나는 '복음'을 삶의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불공평함 때문이었다. 선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믿음이 생겼던 계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였을까? 아니다. 나의 회심은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일이 나를 위해서라고 느껴졌을 때다. 그 사이의 인과관계는 6개월간 한 목사님의 설교를 꾸준히 들었던 일뿐이다.

     <헤아려본 믿음>의 레이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측정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뀐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는 주체-의역하자면 삶의 주인-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나도 회심 이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장 뛰어나고 앞선 진리로 여겨, 말씀을 기준 삼아 일이나 현상을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주인을 바로잡자 비로소 나는 자유해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이 깨달음은 빌립보서 3장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며 생긴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알아가는 것이 오히려 저주는 아닐까?'라는 내면의 작은 질문이 아담의 선악과(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사건으로 이어지며 역시 별다른 인과관계없이 얻어졌다.

     어떤 일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관련된 모든 정보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수렴해갈 뿐 모두 알 방도는 없다. 각자의 수많은 변수들로 채워진 경험을 토대로 제한된 정보 안에서 판단할 뿐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질문을 유발할 만큼 영감을 주지 않는 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우리의 답변은 아무리 최선일지라도 언제나 쓸모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다'라고 한 레이첼의 생각과 그 맥을 함께 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리'를 아들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책임을 지셨다. 오직 우리를 향한 초월적 사랑만 있을 뿐이다. 흔히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들어 우리가 예언자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 바리새인은 지금의 종교인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을 것인지 보다 우리가 선과 악을 기준으로 판단해 나갈 때 끊임없이 누군가를 정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우리는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살아낼 힘이 없다. 그리고 아는 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 영역의 주인이 아직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각자의 분야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대응하고자 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본질이 해결되지 않으면 정신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기껏 한다 해도 일곱 번 용서하는 정도다.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만지지 않듯이, 길가 밭이든 돌짝밭이든 가시떨기든 복음의 씨앗이 심겼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고 우리는 비로소 옥토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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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 사정에 따라 해당 기고문이 실리지 않거나 다음호에 기재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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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신뷰 이달책 
    급진적 종교 개혁파의 관점에서 본 신학과 과학의 화해
    - 부제 : 책 내용은 별로 없는 실전 책 서평

    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매달 과신대에서 나가는 책 소개를 맡게 되었다. 그전에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책 서평 코너는 다른 글들과는 결이 다를 것이다.  과신대의 품격 있고 학구적인 다른 글들과는 다르게 생활 때가 묻어나는 일상체로 쓸 예정이다. 그리고 내용도 거의 없을 수도 있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면 뭐 하러 서평을 쓰냐는 질문에는 이 코너의 목적은 어떤 책인지 궁금증을 갖도록 하는 것에 있다. 자 그럼  내돈 내산 리뷰를 시작해 보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사무국 편집팀 회의를 하던 중, 원래 나가려던 주제가 바뀌면서 덩달아 내가 읽고 있던 책도 바뀌게 되었다. 나름 한 달에 한 권이상 책을 읽어야 해서 여유롭게 읽고 있었지만 갑자기 주제가 바뀌면서 주제 맞는 책을 급하게 찾게 되었다. 다급하게 과신대 책장을 살펴보던 와중에 얇은 책 한 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오늘 소개해 줄 《급진적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본 신학과 과학의 화해》라는 책이다.

     

     일단 책 저자인 낸시 머피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과학 철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의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신학과 종교철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것만으로 알 수 있듯이 낸시 머피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다. 뭐 워낙 똑똑하신 분인 건 흥미로운 일은 아니나, 이분의 신앙적인 여정이 흥미로웠다. 원래 가톨릭에서 시작된 신앙은 점차 변화되더니 지금은 급진적 종교개혁파인 아나뱁시스트로 옮겨갔고, 결국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는 개종이라고 이야기한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무엇이 그녀를 가장 보수적인 입장인 가톨릭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불리는 아나뱁시스트까지로 옮겨가게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굳이  왜 급진적 종교개혁파라는 문구가 넣었는지가 의아했다. 

     

     굳이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신앙적인 색깔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나름 학술적인 영역인데 급진적 종교개혁파가 들어갈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서 차츰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바라보는 과학에는 사회 과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지 자연과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이때, 과학을 이루는 하위 층위가 있는데, 바로 이를 계층적 모델로 설명한다. 머피는 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분야에 물리학이 있고, 화학, 생물학 순으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물학에서 분기가 나뉘는데 이제 여기에서 1) 우주론(자연과학)과 2) 심리학, 윤리학(사회과학)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두 분기인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묶어주는 역할을 ‘신학’이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우주론(자연과학)   -   신학

                                                -  심리학 - 사회과학

     

     그렇다면 낸시 선생님에게 과학은 어떻게 정의가 되는가? 바로,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흔히 우리는 추론 방식에 연역적 추론, 귀납적 추론을 많이 이야기한다. 과학철학에서 한 가지 더 추가적인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설-연역 방법’이다. 가설-연역 방법은 이미 관찰한 사실들을 통해서 가장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연역적으로 추론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근본은 귀납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데이터’를 가지고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놓는다면, 이것은 저작권 위반일 것이다. 궁금하면 책을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자. 어쨌든 요지는 과학이란 ‘가설-연역 방법’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특별히, 낸시 선생님은 학문의 계층을 나누어 두는데, 각 하위 층계의 단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상위 층계에서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것을 경계선 질문이라고 한다. 뭐 간단한 예시를 든다면 생물학에서 인간의 발달 과정을 DNA의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그 사람의 행동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다. 물론 현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은 모든 행동을 DNA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방식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정리해 보면 하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체계로서 신학이 존재한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것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주장인 것 같다. 중세 시대 모든 학문이 신학의 시녀로서(?) 생각되는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학문에서 하나님은 배제되고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낸시 선생님의 접근법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변증적인 측면에서 옛 향수를 자극하는 것 같다. 물론, 이는 얄팍한 일개 학생의 생각일 뿐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아, 마지막으로 급진 종교개혁파 이야기가 빠졌다! 궁금하신가? 그럼 읽어보자. 맛만 보여드린다면, 윤리에 관련된 질문에서 일반적인 폭력의 사용이 아니라 비폭력을 주장하고 계신다. 바로, 아나뱁시스트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회과학으로 묶어서 과학 분야로서 생각해 보는 것이 흥미롭긴 했다. 자세히 음미하고 싶다면, 역시나 사서 읽을 것을 권장 드린다. 특별히, 이 책은 과신대에서 자문 위원으로 섬겨주고 계시는 로고스서원의 대표님이신 김기현 목사님이 번역한 책이시기도 하다.(뒷광고아님) 죠이북스에서 2021.12.25에 출간한 나름 따끈따끈한 책이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바란다. 심지어 정가는 1만 원으로 1 국밥 먹을 돈으로 영혼을 살찌우는데 쓰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한 줄 평

    "흥미있음. 짧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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