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의 아버지,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박서보 화백은 서양의 추상미술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장을 열며 한국 미술이 해외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이끈 주역입니다.

아래의 작품은 ‘박서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묘법(描法, Ecriture)’ 연작 입니다.

박서보가 작품을 통해 비워내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상흔이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젊은 시절 겪었던 좌절과 방황의 돌파구로 그림을 택하며 아픔과 고통, 울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목적 없이 반복적인 선을 그으면 마음이 비워지고 나아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서보는 1950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난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피난처였던 부산에 세워진 임시 교정에 방문했으나 전쟁 중이라 교수들이 오지 않았고, 당시 서양화과에 마침 김환기 작가가 교수로 재직 중이어서, 서양화로 전공을 바꾸기로 합니다.

비록 전쟁으로 약간의 고난이 있었지만, 여기서 인생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김환기 작가와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묘법’ 연작 역시 김환기 화백이 지어 준 제목입니다. 당시 김환기는 박서보를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크게 기록될 작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서보 화백의 작업 연대기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1957년 앵포르멜 시기, 그 안에서도 생명을 향한 에너지를 담아낸 원형질 시기(1960), 서구에서 유행하던 옵아트와 팝아트를 수용한 유전질 시기(1960~70), 1970년대 초기 연필 묘법, 80년대의 한지를 활용한 중기 묘법, 90년대 이후 풍부한 색감의 후기 색채묘법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현재 대표적인 단색화 시기 이전, 초기의 박서보 작품은 전쟁의 충격과 공허가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거친 붓질과 텍스처는 파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당대의 불안과 고독을 분출하는 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1956년, 박서보는 왜색이 짙던 기존의 국전풍 작품에 반기를 들고, 반국전 선언을 하며 강렬하게 작가 생활을 시작합니다. 왼쪽의 작품은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이라고 소개되는 <회화 No.1>으로, 대표적인 원형질 시기의 작품입니다.

*앵포르멜 : ‘부정형(不定形)인 것’ 이라는 의미로, 2차대전 후에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

제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은 황폐화가 되었고, 미술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며, 당시 유럽에선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차가운 추상, 기하학적 추상이 유행했습니다. 이후 잭슨 폴록의 뜨거운 추상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이 경향을 미국에선 '추상표현주의'라 불렀고, 유럽에서는 '앵포르멜'이라고 칭했습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구상주의 위주인 전통적 표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엥포르멜을 표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어두운 색조, 격정적인 마티에르는 앵포르멜 회화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전후 유럽의 정신적 공황속에서 탄생한 엥포르맬은 한국 전쟁 당시의 비극적 상황과도 맞아 떨어져 당시 많은 한국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서구에서 유행하던 옵아트와 팝아트를 수용하면서도 고유의 색감을 찾아가던 시기입니다.

20대에 한국 전쟁을 겪어, 전쟁의 아픔을 작품에 드러내던 앵포르멜 세대와는 달리, 4·19 세대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작품에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이전 세대와는 경험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로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채택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요, 그렇기에 뚜렷한 형태가 없고 거친 앵포르멜이 아닌, 정돈되고 규칙적인 기하학적 추상을 지향했습니다. 박서보는 6·25세대였으나, 매너리즘 상태에 이른 앵포르멜을 탈피하고 그 다음 세대와 함께하고자 기하학적 추상 작업을 했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은 한국의 단청이 떠오르는 색채 표현입니다. 화면 전체적으로 청색, 적색, 흑색, 백색, 황색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오방색의 사용은 한국 전통의 정체성을 작품에 드러내고자 한 의도입니다.

박서보는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고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무수한 선을 긋은 뒤, 다시 물감을 덮어 연필 자국을 지우고, 또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쓰고 지우는 행위의 반복, 반복과 평행을 통한 리듬감을 드러내는 묘법 연작에 대해 박서보 작가는 “무목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67년쯤에 연필 묘법을 작업했지만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당시 집에 방문한 이우환 작가가 공개하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긁는 과정을 반복하면 화면에 움푹한 이랑이 만들어지는데, 이로 인해 평면 회화이지만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옆에서 보면 입체로 보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또한 서양의 종이와 달리, 안료를 흡수하여 일체화 되는 한지를 통해,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담아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해 최근까지 이어졌던 색채 묘법은 대중들의 수요가 가장 많은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박서보가 색을 쓰게 된 계기는 바로 ‘자연’이었습니다.

새빨갛게 불타는 단풍을 보고 감탄하며,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감동처럼 예술도 사람들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을 통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작품에 색을 쓰기 시작했다.”

단풍이 절정이라 해서 갔는데 보자마자 '으악' 소리를 질렀습니다.

골짜기에서 새빨간 불길이 나를 태울 듯이 쳐들어 올라오는 느낌,

그 충격과 감동을 그림에 꼭 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자연은 이렇게 위대하구나. 이런 감동을 그리고 싶다.'

"단일한 색을 썼다고 해서 단색화가 아닙니다. 단색화의 핵심은 색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행위의 무목적성.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듯이 행위를 반복하며 비워내는 것.

작품이 흡인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가 자신을 비워내야 가능하죠.

자신을 비운 작가의 작품은 대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어요."

누군가는 그의 단색화를 서양의 모노크롬에 비교합니다. 이에 대해 박 화백은 이러한 의견을 남겼습니다.

서양의 모노크롬은 하나의 색을 사용한 '차가운' 느낌이 강한 반면, 한국의 단색화는 겹겹이 쌓여 하나의 색이라 말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을 자아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공기색', '단풍색', '홍시색' 등 우리 삶의 속에 존재하는 것들로 작품의 색을 구성합니다. 이는 삶의 경험과 기억의 축적이 불러일으키는 색으로써, '정신적 깊이'가 있는 색입니다.

완전히 비워지죠.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렵혀진 자신을 수신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붓을 들었습니다.

저의 그림도 제가 수신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작품은 그 과정의 부산물이죠.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 작가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각인된 이후, ‘묘법’을 통해 단색화의 기수로 독보적인 화업을 이뤄냈으며, 교육자이자 행정가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통해, 그 치열한 자기 수행적 면모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931 경상북도 예천 출생

1954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199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1 은관문화훈장

2015 제 12회 이동훈미술상 본상

2016 화이트 큐브, 런던

2018 동경화랑, 동경

2018 페로탕, 뉴욕

2019 구겐하임 미술관, New York

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 페로탕, 파리

2020 제 40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공헌예술가상

2021 금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