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나는 10년 가까이 잡지사에 몸담아 에디터로 일을 했다. 분야별로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월간지 에디터의 루틴은 대동소이했다. 월말에 다음 호 기획을 시작하고, 배당된 아이템에 따라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출장을 다녀오고, 원고를 쓰고, 기사 편집을 하고, 교정을 보고, 인쇄를 마치고, 대휴를 쓰는 것으로 꼬박 한 달을 보낸다. 이런 루틴을 돌고 돌다 보면 그야말로 한 달 아니 1년이 쏜살같이 사라진다. 잡지 인쇄 직전의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는 통상적으로 마감 기간에 해당한다. 이는 곧 사무실에서의 야근을 의미하며, 막차 시간을 넘겨 자정 이후의 퇴근도 불사해야 한다. 이따금 사무실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반갑지 않은 순간조차 마주하게 될 테고.
여기까지 끄적이고 보니 잡지사 에디터가 참으로 가련한 직업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난한 마감을 수없이 견딘 끝에 스스로가 한 뼘 성장했다고 믿는다. (이렇게라도 애써 위안을 삼지 않으면 더 서글퍼질 테니) 일단 잡지사 에디터라면 자신이 맡은 기사를 어떻게든 완성시켜야 하니 불굴의 집념과 끈기에 관해서라면 타 직종보다 월등해진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연차와 능력에 비례해 심적, 물리적 체력을 탕진하면서 남들보다 번아웃을 일찍 겪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 더불어 늘상 호기심을 갖고 여러 분야에 발을 걸쳐 두어야 하기에 제법 잡학다식해지는 이점도 있다. 평소 나의 관심사와 거리가 먼 분야라도 일단 기사 아이템으로 배당을 받으면 최소한의 지식을 쥐어짜내야 하니까. 그렇게 나를 둘러싼 영역을 얄팍하게나마 넓혀갈 수 있었고, 그런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술이다. 더 정확하게는 바로 위스키다.
어쨌든 마감 근무를 마치고 자정을 넘겨 집으로 돌아오면 왠지 모를 서글픈 기분에 잠기곤 했다. 이는 허기짐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온종일 편집부 사무실에 틀어박혀 키보드를 두드리고 온 나 자신에게 보상을 주어야 해소가 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돌아오면 일단 맥주부터 찾았다. 맥주에 필요한 간소한 안주도 곁들이면서. 그렇게 마감 혼술이 나만의 루틴이 됐다. 어느덧 퇴근 후 편의점을 들르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문제는 술의 양이었다. 맥주는 아무리 마셔대도 헛헛한 기분을 채워주지 못했다. 1캔으로 시작한 마감 혼술은 어느덧 편의점 4캔 프로모션의 덫에 걸려 기어코 4캔을 채우게 됐다. 그와 비례해 안주도 늘어갔다. 과자나 마른안주 코너를 거쳐 도시락이나 한 끼 식사 코너까지 확장됐다. 편의점 프로모션의 변천사와 맞물려 맥주와 안주는 차츰 풍요롭게 변모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헛헛한 기분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뱃살만 비대하게 살찌우고 말았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대안을 고민하던 중, 부엌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쓴 위스키 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출장 때 공항 면세점에서 무심결에 고른 맥캘란 셀렉트 에디션이었다. 나는 <매드맨>의 주인공 돈 드레이크처럼 품이 널찍한 유리잔에 얼음을 3~4조각 넣고 눈 대강으로 적당량의 위스키를 따랐다. 한 모금 홀짝.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모금 홀짝. 위스키를 처음 마신 건 아니었지만, 집중해서 음미를 해본 건 아마도 그날이 처음인 듯하다. 그전까진 만취 상태의 술자리에서 누군가 호기롭게 쏴야 한 번씩 마시던 위스키는 독주의 쓰디쓴 맛 혹은 폭탄주의 기준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그날의 맥캘란은 묘하게 나의 마음을 보듬듯 달콤하고 씁쓸한 맛이 명징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 마감 때, 혹은 어떤 보상이 필요한 날이면 부엌에서 홀로 위스키를 한잔씩 마셨다. 당시 나는 삼청동의 자그마한 한옥에 살고 있었다. 부엌이 턱없이 비좁은 탓에 식탁을 마당과 면한 미닫이 문에 간신히 붙여 놓은 상태였다. 좁다란 식탁에 몸을 구겨 넣고 위스키를 홀짝일 때면 모두가 퇴근한 한옥 바에 나홀로 남아 있는 듯, 쓸쓸하지만 또 어쩐지 위로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 밤 중 어스름한 달빛이 마당 한구석으로 스며들고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나의 억울한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헛헛한 기분도 조금씩 채워져 갔다.
혼술의 주종을 위스키로 바꾼 이후, 공항 면세점을 이용할 때면 위스키를 한 병씩 사 모았다. 위스키에 관해 거의 백지장에 가깝던 시절이라 대충 어디서 이름을 들어봤다 싶은 싱글몰트, 가령 글렌피딕, 글렌모렌지처럼 글렌이 붙은 위스키 중 가장 저렴한 엔트리급 위스키를 고르거나 할인 행사를 하는 프로모션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렇게 5-6만 원 선의 위스키를 1병 구입해두면 너끈하게 두 달은 마셨다. 하루에 한 잔 정도면 충분했고 마감이 한 달에 열흘 정도인 데다, 또 매일 같이 마시는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위스키의 메리트는 안주가 딱히 필요 없다는 점이다. 맥주로 시작한 나의 마감 혼술 연대기는 그렇게 위스키와 만나 가성비도 높이고, 뱃살도 줄어들게 하는 나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만 그때는 몰랐다. 위스키와 가까워지면서 훗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삶의 궤적이 뒤바뀔 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