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너의 수수께끼 💌 우.시.사 레터 4회 (2021.05.12) 안녕하세요!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한국소설과 시를 담당하는 MD 김효선이라고 합니다. 서점에서 MD가 하는 일은 책을 파는 일입니다. 아름다운 책은 별처럼 많지만, 제 마음에 특히 오래 남는 책은 제가 조금 더 잘했다면 더 잘 팔 수 있었을 것 같은, 잘 '만지지' 못한 책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가닿길 바라는 시집 두 권을 소개합니다. 💗 김효선 MD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오리들의 합창(주민현, 『킬트, 그리고 퀼트』) 여기 보세요, 소리치는 어미 오리를 따라서 우리는 꽥꽥,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모여 섰어요 수영의 기본은 호흡이에요 무릎을 쭉 펴고 허벅지로 차는 거예요 먹이를 꿀떡꿀떡 받아먹으면서 하나씩 전진했어요 아직은 우리가 닭인지 오리인지 모르고 이왕이면 물에 잘 뜨는 오리가 되고 싶은데 들리는 귀로 안 들리는 소리도 안 들리는 귀로 들려오는 소리도 모두 뽀글거리는 기포로만 남은 물속에서 수영복에 딸려온 싸구려 수경은 세상을 많이 왜곡하고 그러나 수경을 벗어도 진짜 세상이 보이는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사실은 거대한 어항 안이라면 언제나 벗을 수 없는 수경을 한 겹 쓰고 있는 거죠 일렁이는 물빛은 라틴 음악을 닮았고 다른 행성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독히도 춤을 못 추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잘못 들어온 개 한 마리가 수영장의 리듬을 바꾸고 지난겨울 당신은 퍽 쓸쓸해 보이는 사냥개를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지요 퇴역 군인으로서 개와 친구가 된 당신은 옛 버릇처럼 엄포만을 놓기 일쑤, 개는 이제 당신만 보면 슬슬 손길을 피하고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맘대로 되는 게 없군요 물속에선 뭐든 천천히 힘을 빼야 하는군요 저녁반 수영장에 오는 사람들은 누구든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같아요 토요일에 본 영화 속 악당들은 집행유예와 정상참작으로 교도소와 면회실을 들락거리다 좀도둑은 좀도둑대로, 날강도는 날강도대로 일벌백계도, 개과천선도 없이 늙어버렸지요 그러나 물속에서는 밖에서의 규칙들을 잊어버려도 좋아요 잔뜩 마신 물이 수염맛인지 양떼맛인지 나의 말도 앞사람의 기침 소리도 모두 뽀글거리는 기포로 남는 물속에서 어느 땐가 내 차 앞으로 뛰어든 자전거를 생각했고 눈을 꼭 감고 미끄러지던 새파랗게 젊은 사람의 자세 같은 걸 생각했어요 계속 나아가세요, 물장구치세요, 멈추지 마세요, 밖에서 들이쉰 호흡과 안에서 마신 물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 눈을 감고 두 팔을 휘휘 저으면 해변의 플라밍고들 거꾸로 된 물음표처럼 서 있고 눈을 뜨면 초보 오리들은 어둡고 둥글게 휘어진 수경 안의 세계로 한 발씩 전진하고 있네요 👍 서점MD의 감상 주민현 시인의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는 “미래의 여자들은 강하다”(「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펭귄」)라는 문장에 사로잡혔습니다. 2020년은 개인적으로 모든 게 혼란스럽던 해였습니다. “갈등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되고”(「사건과 갈등」) 이 한 줄을 두고 한참 읽기도 했습니다. 저는 올해부터 엄마와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입장, 엄마는 배우는 입장입니다. 엄마는 물을 무서워해서 물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맙니다. 꽉 쥔 주먹으로 킥판을 누르면 허리가 꺾이며 저절로 물에 가라앉습니다. 토요일은 엄마와 함께 수영하는 날입니다. 토요일 오후 수영장에 가기 전, 거실에 누워 주민현 시인의 이 시집을 다시 읽다 2021년의 저는 「오리들의 합창」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수영의 기본은 호흡이에요/ 무릎을 쭉 펴고 허벅지로 차는 거예요”, 이 오리 선생님의 강의는 제가 수영장에서 늘 엄마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엄마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이 시를 들어보라고 말했습니다. 좀처럼 무릎을 쭉 펴는 걸 해내지 못하는 엄마가, 저를 통과한 시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 얘기 같아?” “내 얘기구만.” “이왕이면 물에 잘 뜨는 오리가 되고 싶은”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제게 이 시집은 우정으로 읽힙니다. “오늘은 나의 이란인 친구와/ 나란히 앉아 할랄푸드를 먹는다”(「철새와 엽총」) “히잡”을 두른 여성과 “반바지 위에 긴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을 떠올리면, 마치 그곳에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수영 친구가 엄마와 제 얘기에 이런 문장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물 밖에서보다 물 안이 더 자유로울지도 몰라요.” 저도 엄마에게 이 시의 아름다운 행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물속에서는/ 밖에서의 규칙들을 잊어버려도 좋아요“ 엄마와 저의 우정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 김효선 MD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이다희, 『시 창작 스터디』)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줄자를 하나 줄게. 어떤 깊이도 잴 수 있는 줄자를. 너무 깊어서 어두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지. 어떤 어둠도 잴 수 있는 줄자가 있어. 당신이 나뭇잎 한 장 어둠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면. 나뭇잎이 쌓인 거리를 걸어갈 때 애인과 당신이 다른 기분에 휩싸인다면. 애인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서 내심 안도한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당신의 나뭇잎 한 장 어둠에 조금도 변동이 없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나뭇잎 한 장 흔들리지 않는다면? 줄자로 당신 옆을 말없이 지나갔던 나뭇잎들을 재볼 수도 있겠지. 풍족하게. 아주 평평하게. 단추를 눌러 줄자를 감아도 돼. 줄자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시작이니까. 나뭇잎 떨어지는 게 아름답다고 말할 것 같은 애인에게.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해야지. 밥을 다 먹어도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지. 때맞춰 나오는 눈물에 묻어서 먼 곳까지 가야지. 전속력으로 돌아오는 줄자의 진동이 당신 왼손에서 계속 요동치게. 요동치게. 줄자의 끝이 어둠 속을 헤치면서 당신의 왼손을 찾고 있어. 전속력으로.* 그래도 당신 우니까 계속 울어보니까 슬퍼졌지. 겨우 벌어진 틈으로 뭐가 보여? * 깨끗이 닦아낸 바닥 위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히 걸어갈 때 생각하지. 더러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숨겨졌을까. 👍 서점MD의 감상 2020년에 맹렬하게 싸우던 친구가 있습니다. 주로 이메일로 싸웠던 터라 기록이 남아 있어 각자가 보낸 이메일의 글자 수를 찾아보았습니다. 상대방은 2700자를 썼고 저는 4622자를 썼습니다. 다음 메일에선 상대방이 6058자를, 저는 4623자를 썼습니다. 이렇게 이메일로 미움을 쌓아가던 중 저녁에 시간을 내어 치킨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나름의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생맥 오백 대신 소주를 한 병 시키자(이 친구와 저는 주로 생맥주를 먹곤 했습니다), 소주잔을 가져다주시면 글라스로 바꿔달라고 하자, 글라스에 반병을 따라 원샷을 하고 시작하자, 이렇게 기선을 제압하고 이야기하자. 우리의 우정을 잃고 싶지 않다고, 당신의 흔들리는 나뭇잎을 계속 알고 싶다고. ”당신이 나뭇잎 한 장 어둠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면.“ 서로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나뭇잎 한 장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이 시집을 선물로 준비해 갔습니다. 좋아하는 친구와는 좋은 시를 나누고 싶은 법이니까요. 한참 얘기를 하다 주섬주섬 이 시집을 꺼냈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시가 있으니 함께 읽어달라고요. 얘기 잘 안 되면 안 주려고 했냐고 상대방이 한참 웃으며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이 우정이 영원히 끝이 날 거라고는, 제 나뭇잎을 알아보지 못할 친구는 아니라고 감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막연함을 품고도 나아가는 마음이 있습니다. ”줄자의 끝이 어둠 속을 헤치면서 당신의 왼손을“ ”전속력으로“ 찾던 것처럼요. 이 친구도 여전하고 저도 참 여전하지만, 이 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김효선 MD가 추천하는 다른 시집이 궁금하다면? 😀 구독자님 오늘 메일은 어떠셨어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일링 <우.시.사>가 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의견 부탁드려요! 🙇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이병률 시인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추천인은 바로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병률 시인입니다. 그가 골랐을 두 편의 시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그럼 모두,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이미 신청하신 분들은 구독하기 버튼을 누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