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에세이를 읽다가 문장을 봤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춘다.
애도하며 꽃을 놓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 익숙한 모습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비극 속에서 제가 어릴 적 뉴스들은 슬퍼하기보다는 슬픔 이후의 분노, 절규, 단죄를 보여줬습니다. 슬픔 자체는 내용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겠죠. 거친 말의 자락들을 일부처럼 옮기는 뉴스들, 공기를 부스러뜨리는 영상의 간판들, 군중 사진에 동그라미를 치며 벌할 사람을 찾는 눈빛들, 무의미한 분노에 대한 분노, 근데 그것조차 무의미해 보입니다. 저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요.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게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용 없이. 대상 없이. 어딘가 부족하게. 익숙지 않은 슬픔을 나누는 시간. 애도를 표하는 시간. 기리는 시간. 눈물을 흘리는 시간. 진심으로 슬퍼하는 시간. 곁에 있었을 이들과 곁을 지키고 싶었던 이들을 끌어안는 시간. 맥락을 따지지 않는 시간. 서사를 상상해내지 않는 시간. 정의내리지도 정의를 좇지도 않으려 하는 시간, 오로지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눈 돌리는 시간. 낮은 목소리와 응시하는 눈. 퍼지지 않는 말, 제 알아 멈추는 말, 제 스스로 비우는 단어. 슬픔. 오직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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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레터는 여기까지 썼었습니다. 짤막한 두 줄의 공지를 보내기 전에는 원래 위 단락의 글만을 실어보낼 예정이었지요. 그렇지만 그조차도 다시 한번 글로써 감정을 파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제대로 된 애도인지, 저는 애도를 '잘'하고(그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다가 그냥 아무것도 보내지 않기를 선택했지요.
그 후로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하지 못하기에 말하지 않는 것과, 숨기만 하는 금기시가 무슨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BBC 코리아의 보도를 봤습니다. 전문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가슴까지 압박하는 꽉 막힌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동물적 본능, 생존의 본능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이 적절한 사회적 관리가 없는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면 이상군중으로 변화합니다. 누굴 탓하고 집어낼 게 아닙니다. 확실한 건 이 사고가 예방되거나 완화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정부가 미리 알고 통행을 통제했다면요. 관리했다면요. 그건 정부의 역할이었습니다. 확실한 건 그뿐입니다."
주절거리는 부연같기도 하지만, 한 주의 시간차 역시도 이 글에 담겨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감정들도 모두 이 시간차를 싣고 있을 겁니다. 부정확한 단어와 흐려지는 어미 같은 것들을요. 그래도 끊어지는 단어들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명징함 이전에 사랑이 있었고 망설임이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고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전히 떠나간 이들과 상처입은 이들을 기억하고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요.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게서 잊지 않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