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2023년 1월, 죽음을 말하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써티랩은 2022년 1월에 희망을 말하며 진정한 나를 들여다보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또 다른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죽음을 말하려 합니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면 새해를 맞아 더 희망차게, 용기를 갖고 죽음을 말할 수 있는 우리이길 바라면서요. 우리는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나요?

30대가 되고서는 장례식을 참 많이 가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선배와 친구까지 많은 죽음을 목도합니다. 장례식에 가면, 너도 나도 죽은 이를 추억합니다. 저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손주 온다는 소리에 매번 달콤한 식혜를 만드셨던 외할머니, 언제나 기도로 새벽을 여신 친할머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우리집에서 함께 살부비며 살았던 친할아버지와 절대 잊지 못할 외할아버지와의 하룻밤까지. 그뿐일까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들과의 추억들이 가끔은 갑작스럽게 사무치죠. 여러분은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나요?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올해 1월 24일까지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습니다. 수많은 순례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프랑스 길을 걸었는데요. 길을 걷다 보면 900여 년 동안 쌓아놓은 수많은 순례자들의 흔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이건 도대체 얼마나 된 걸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철의 십자가(Iron Cross)’이죠. 11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데요. 철의 십자가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재미난 전통 때문이죠. 순례자가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철의 십자가 기둥 밑에 두고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고, 각자 소원을 비는 전통입니다.

탑 아래에는 어마어마한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900여 년 동안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순례자가 놓고 간 것이죠. 철의 십자가 앞에는 많은 이들이 두고 간 수많은 염원이 큰 돌부터 작은 돌까지 곳곳에 낙서와 편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가족 행복하게 건강하게 해주세요.’, ‘사랑한다 ㅇㅇ아’, ‘보고싶다 ㅇㅇ아.’ 11세기부터 쌓인 이 염원들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지는데요. 철의 십자가 앞에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수백 년 묵은 그들의 염원은 이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큰 인상을 주며 새로운 기억과 추억으로 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우리는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추억을 남기고 싶나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돌아보니 행복했던 순간만이 추억으로 남는 건 아니더라고요.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어떻게 간신히 먹었던 양파 수프, 4시간 동안 벽난로 앞에서 불을 땐 경험도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에 상황과 환경의 좋고 나쁨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발견합니다. 함께 하는 이들과 만들어가는 소중한 시간들은 우리가 서로를 추억하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겁니다.

매일매일 마주하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쌓기를 바라요. 그러다 어느 순간, 어느 때에 우리는 분명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요.

저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책을 추천해 주는 유튜브 채널을 좋아합니다. 그중 제일 자주 찾아보고 좋아하는 채널은 단연 겨울서점입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책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는 걸 듣고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인터넷 서점과 동네 도서관을 검색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새삼 헤아려보니 그렇게 구입만 해두고 아직 못 읽은 책과 대여했다가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반납한 책들이 꽤 됩니다. 얼마 전에도 보이는 라디오처럼 책 하울 영상을 틀어두고 소일거리를 하며 듣다가 우연히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 레슈코의 ‘사로잡는 얼굴들’입니다.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설명하듯 책에는 작가가 수년간 미국 각지의 생추어리(구조된 동물이 평생 머무르는 보호구역, 임시보호소와는 다른 개념으로 미국에서 시작됨)를 방문하며 기록한 다양한 동물의 노년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공간에서 물끄러미 카메라 너머의 작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익숙한 동시에 낯설기도 합니다. 대부분 가축 농장에서 구조된 동물이기에 친숙한 동시에 그 얼굴에 깃든 세월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기 위해 작가는 조심스레 그들의 삶의 공간에 들어가 기꺼이 그들과 시선을 맞춥니다. 작가가 편한 스튜디오로 불러내 인공적인 조명 아래 찍은 초상이 아니라 피사체에게 익숙한 장소에서 자연광 아래 담아낸 초상에는 그간 몰랐던 아니 어쩌면 외면 해왔을지 모를 무언가가 담겨 있었습니다. 젊음 특유의 빛이 물러난 자리에는 왠지 모를 여유와 함께 그가 지나온 삶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빈자리를 드러낸 깃대와 희끗하게 변한 털색보다 화면 가득 깃든 평온함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문득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던 반려견 초롱이가 떠올랐습니다. 17년을 함께 하고도 여전히 곁을 떠나가는 게 아쉬웠던 존재와 채 1년도 살지 못하고 소비되거나 제 소임을 다하고 나면 거리낌 없이 처분되는 존재.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반려동물과 가축 동물을 나누고 무슨 권리로 그들의 삶을 결정지어 왔던 걸까요? 만약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 순응할 수 있을까요? 생의 끝이 어떠할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생의 전체를 쥐고 있다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끝이 아름답고 떳떳하기 위해서 그 손에 쥐어진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곰곰이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새삼 생각이 깊어지는 겨울입니다.

(누군가에겐 진부한 문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또 누군가에겐 생소할 수도 있으니,) "모든 죽음은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로 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모든 죽음은 정치적입니다. 좁은 의미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추구의 경합과 갈등'을 조정해야만 합니다. 모든 게 정치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정치'는 피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에, 우리는 장례식장을 갑니다. 함께 애도하기 위해서요. 타인의 죽음은 단지 프라이버시가 아닌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입니다. 한 개인의 죽음에 우리는, 부지중에 수많은 조정을 거쳐 만들어진, 합의된 추도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최대한 검은 옷을 찾아 입고, 옷매무새를 살핍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죽음이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길어내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정치의 과정을 거친 결과를 따르고 있었다고요.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이를 '함께' 위로함에 우리만의 독특한 '인간다움'이 드러납니다. 

개인의 죽음도 이러한데, 다수의 죽음은 얼마나 더 정치적일까요. 실질적으로 동일한 위난으로,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 죽음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그 위난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잊히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조정된 합의 없이는,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는 또, 또, 또, 위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다수의 죽음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진전시키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10월의 죽음만이 이 글의 전제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히 하고 싶은 건, 4월의 죽음이든, 10월의 죽음이든, 흩뿌려져 있어서 모아지지 않는 수많은 죽음이든 간에,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말 따위엔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댓글로 얼굴 없이, 합의의 육성을 방해하는 그들이 뭐라 하건, 죽음은 정치적이고, 다수의 죽음은 더할 나위 없이 정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대화할 수 없는 사회, 질문할 수 없는 사회, 합의할 줄 모르는 사회는, 위에 언급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 정의하면, 그건 신의 사회이거나 야수의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힌, 잊혀가는 죽음들을 계속해서 경합의 장에 올려두어야 합니다. 죽었으니 '끝'이라고요? 그건 방구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지우거나, 가리거나, 숨기지 아니하고, 기꺼이 죽은 이들의 입과 손과 발이 되어, 합의에 무능한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운이 좋아 살아난 생존자로서의 삶,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인간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어 가는 게, 제가 발견한 죽음의 수습 방식입니다. '거기는 왜 가서...'와 같은 류의 얄팍하거나, '왜 저렇게 오버해... 지겹다...'와 같이 팍팍한 사유를 거부하고, 인간으로, 잘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1월 2일, ‘죽음을 떠올리는 날’이란 시를 한 편을 지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죽음은 코앞에 보이지 않으니 문밖에 서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는 것, 누군가에겐 느닷없지만 결국 모두에게 기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존재는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지요. 저는 지난 12월 30일, 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7년간의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은 스페인과 모로코를 누비며 대 백수 시대를 개척할 준비를 하고 있겠군요. 모험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니 새로운 삶의 문 앞에서 죽음을 미리 준비해 두려고 합니다.(이것이 바로 대문자 J의 인생이랄까요.) 지금부터 소개할 제 장례식은 꽤 오래전부터 구상되어 온 것으로 만인에게 공고히 하여 두는 바이니, 제가 그대들보다 먼저 환희의 나라로 가거든 부디 저를 아끼는 마음을 담아 지켜 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죽음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상황이 제게 주어진다면 축제의 주인으로서 직접 진행하고 갈 테지만요.

<장례명: 무지 축하합니다.>

• 초대: 그때는 어떤 미디어 플랫폼이 유행인지 모르겠군요. 지금이라면 인스타그램에 눈에 띄는 공지를 올리고 지역 신문에 보도자료도 부탁드려요. (더기가 쓰면 되겠군요.) 저를 기억하는 모두를 초대한다고요. 부의는 제 장례비용,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용하겠습니다. 제 가족이 혹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들도 잊지 말아 주시고요.
• 영정사진: 제가 진심을 다해 웃을 때 어떤지 아시지요? 눈동자를 삼킨 초승달, 코는 찡긋, 볼과 입 주위로도 잔뜩 주림이 생기고 입은 윗니가 다 보일 정도로 잔뜩 찢어진 사진 하나를 골라 주세요. 예시를 드립니다.

• 입장곡: 자유의 노래 <어노인팅>. 시작부터 들썩이는 어깨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장례식은 축제의 자리이니 마음껏 춤추셔도 된다고요!  “그 크신 사랑 노래하리 / 나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 / 산 위에 올라 나 부르리라 오 / 자유의 노래 자유의 노래 / 슬펐던 나를 춤추게 해 / 내 영혼 기쁨 가득하네”
• 드레스코드: 올블랙은 절대 안 됩니다. 살아생전 제가 좋아했던 원색의 옷 혹은 포인트 아이템을 하나씩 착용하고 와주세요. 빨주노초, 형형색색 선명하고 다채롭게요.
• 나눌 이야기: 제가 살고 싶었던 모습을 잘 담은 문장을 하나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두루마리에 캘리그래피로 적어와서 읊은 후, 멋지게 돌돌 말아주세요. 이건 베르가 하면 되겠군요.
• 즐거운 질문: 제가 얼마나 인복왕인 줄 아시죠? 이 기회에 만난 옆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되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서로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며 대화를 이어가 보자고요. “무지는 방금 읽은 그 이야기대로 살다 갔나? 그리고 나는 살고 싶은 가치대로 살고 있나?” 죽음을 아직 만나지 않은 그대라면 언제고, 단 며칠이라도 시간이 남았으니 그렇게 살아보시길 권합니다.

다들 “참 끝까지 너답다.”라고 웃고 있을 생각을 하니 뿌듯하군요. 써티랩을 시작하며 발행한 뉴스레터의 첫 번째 주제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을 여는 1월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저는 죽음과 삶의 희망이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우리를 이곳에 존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러니 살아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현재가 그대의 과거이자 미래입니다. 다들 어떻게 죽어가고 있나요? 아아, 예쁜 햇살입니다.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날,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