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4
타협하지 않는 글쓰기

결혼, 행복도 포기도
아닌 곳에서 쓰기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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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

결혼, 왜 하는가 



결혼에 관한 글을 많이 써왔다. 배우자와 가사와 육아를 나눈 과정부터 육아가 결혼생활 유지의 목적이 되었을 때 배우자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지까지. 내 생활만 소재로 하지 않았다. 근대적 결혼의 형성 배경,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 배치, 나아가 이성애가 가진 근원적인 불평등함까지, 사회학과 여성주의 책들을 샅샅이 읽어 오며 책 세 권과 블로그에서 넘치도록 썼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결혼제도가 가부장제라는 체제 유지에 얼마나 복무하는지, 남성과 여성이 제도 안에서 얼마나 불평등하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쓰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왜 내가 결혼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지, 또 제도의 내부자인 기혼자들이 결혼에 관해 글을 쓸 때 봉착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써보려 한다. 


나에게 결혼이 탐구 주제로 부상한 시기는 아이를 낳으면서부터다. 처음엔 자식과의 관계를 내 방식대로 새롭게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데 공을 쏟았고 그 과정을 글로 정리해 나갔다. 앞의 연재 글에서 썼지만,  자식과의 관계에서 엄마는 권력을 가진다. 또 마음대로 끊을 수 없는 운명으로 묶여 있다. 이 사람은 내 자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들, 내 몸에서 나온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부모-자식 관계에서 어떤 부분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을 내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선택해 나갈 수 있었다. 


아이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 나름대로 글로 정리가 되자 배우자가 다음 순서로 따라왔다. 배우자와의 관계는 아이보다 복잡했다. 자식에겐 양육자와 보호자이면 되지만, 배우자는 여러 층위로 나뉘었다.  ‘나는 이 남자가 너무 좋아요! 이 사람 옆에서만 자야해요..!’ 같은 상태였다면 어쩌면 단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배우자가 나에게 ‘남자’가 된다는 건, 그만큼 내가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에게 여자로 보이기 위해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돌봄이나 노력을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배우자라는 존재는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이자, 주거생활 동거인, 부모 이외의 법적 보호자, 양육의 동반자였다.  


그런데 여자로서 역할을 포기하자 사회규범과 나의 행동 사이의 괴리를 풀어가야 할 과제가 생겼다. ‘내가 비정상인가?’ ‘이건 부부답지 못한가?’ ‘그렇다고 동반자로서의 애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남녀관계를 떠나면 ‘정서적 친밀성’ 자체가 없어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러다, ‘남자와 여자로 사랑하고 싶으면 그냥 연애만 하면 되지 왜 번잡한 결혼을 하지?’까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가 되었다.  


어떤 남자와 노는 게 재미있다면 친구로 남아서 가끔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굳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내놓는 빨랫감과 쓰레기를 매일 보면서 살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성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과의 섹스가 좋다면 가끔 만나서 자면 되지 같이 살기까지 할 이유가…? (결혼이 보장하거나 억압하는 ‘성적 독점권’에 관해선 너무 길어지므로 이 글에선 다루지 않는다.) 


이런 내 생각은 ‘낭만적 사랑의 완성품’처럼 믿어지는 결혼관과 대단히 상충했다. 배우자라면 모름지기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며 대화를 들어주고 보호하며 여전히 밤엔 열정을 부르는  단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결혼관 말이다.  부부 관계를 남자와 여자의 독점적 관계로 보기보다 여러 역할을 협력하면서 사는 ‘동료’로 접근하는 글을 쓸 때마다, 많은 이들이 반감이나 냉소를 보였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구독자 수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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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제도다.  그러나 결혼 이탈자는 늘고 있다. 체제와 국가엔 필수이지만 개인에게는 필수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혼자 살아도 되는 시대, 누구나 이혼할 수 있는 시대, 이혼해도 사회적 낙인이 대놓고 찍히지 않는 시대에 결혼 한다는건 무엇인가.  


저출생 시대엔 자식 한 명의 가치가 하늘 높게 치솟는다. 자식은 부모에게 유일무이한 기쁨처럼 믿어진다. 자식을 행복하게 키우지 못할 바엔 안 낳는게 낫다고 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이 희소해질수록 배우자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결혼이 사회의 부조리나 차별에 복무하고 기득권 유지에 보탬이 된다고 해도, 막상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순수한 목적(사랑과 헌신 같은)’으로 결혼하는지 증명하고 싶어한다. 나는 다르다고 말한다.


자식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수록 자식의 작은 결함도 큰 문제로 느껴지듯이, 이런 시대엔 작은 갈등만 생겨도 결혼 생활을 ‘불행’으로 환원해 버리기가 쉽다. 부부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보다 특별하고 충만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관계 안에서 느끼는 결핍은 커진다. 그리고 묻는다. 행복하지 않을 거면 왜 살아? 


결혼 생활에 다소 불만을 가진 채로 쓰는 글은 대체로 이와 같은 행복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혼에서 행복을 강조하는 일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행복의 약속>, 사라 아메드)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느냐만 찾으려 한다. 그러나 과연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일까. 


결혼이 줄어가는 시대에도 결혼은 여전히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막강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제도다. 하지만 그 선택이 개인에게 다 옮겨졌다고 믿어지는 때에, 우리에겐 오로지 두 가지 선택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행복하게 살거나 헤어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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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제국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임상심리학자인 노부타 사요코의 대담집, <결혼 제국>은 두 사람의 촌철살인 토론으로 가득하다. 글로 먼저 쓸 땐 자기검열에 걸릴 수 있는 날 것의 의견을 두 사람의 케미에 힘입어 솔직하게 내뱉는다.  


이 책에서 노부타는 결혼을 “제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제도 속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이 제도이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 그 제도 안에 있다고. 그의 말에 독신자인 우에노는 노부타 본인이야말로 “공동화된 결혼”을 하는 건 아니냐며 신랄하게 맞받아친다.  


공동화는 중심이 비어있다는 말이다. 학교, 관료조직, 회사, 결혼 모두 ‘사회 제도’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일종의 ‘틀’이다. 모양을 잡아두었을 뿐이지, 그 틀의 중심을 채우는 실체는 사실상 없다.

예를 들어 학교를 보자. 학교의 실체가 ‘배움’이던가? 근대에 생겨난 학교라는 제도는, 이 사회에 필요한 노동자를 만들어 내고 자격을 부여하는 곳이다. 배움을 얻지 못하는 학교도 얼마나 많은가. 배움은 학교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진 실체가 아니라, 학교에 관계된 사람들이 각자 적극적으로 만들고 찾아내야 하는 의미 중 (전부가 아니고) 하나이다. 


우에노와 노부타는 결혼도 학교처럼 여성에게 ‘자격증’을 주는 제도라고 말한다. 여성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남성처럼 획득하지 못한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라도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또는 ‘이혼했으면서’라고 후려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기혼여성들은 육아와 살림으로 여러 제약을 받고 있는데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기혼여성들의 역할과 별개로 세상의 시스템은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여성’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말이다. ‘대졸자’들은 취업 시장에서 대학 졸업장을 보유했다는 자체만으로 더 이상 질문 받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중졸이나 고졸일 경우, ‘왜 대학을 안 갔냐’라는 질문과 편견이 따라온다. 이와 비슷하다. 


기혼여성이 가지는 자격증명이란 한 남자에게 승인받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한 남성에게 속해졌다는 말이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면, 지금은 폐지된 ‘호주제’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호주는 남성 우선이었을까? 또 일상적인 예로 작은 일이 생기더라도 직접 해결하지 않고 ‘남편 데려오겠다’고 하거나,  투표 할 때  ‘남편이 하라는 대로’ 했던 어머니들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가부장제는 근대에 들어와 남자로부터 받는 승인을 ‘이 남자에게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승인으로 바꿔냈다. 즉 결혼이란 타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나를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사는 일이다. 요약하자면 이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순수한 관계’를 가져야 내 존재는 인정받는다. 그 결실을 결혼으로 이루자!  요즘 말로 하자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브랜딩’을 잘했다고 해야할까.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우에노는 이걸 ‘젠더병’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증명을 남자에게 받아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전전긍긍하게 되는 병.  


반감이 생길 수 있다. 21세기에 누가 그러냐고 말이다. 맞다. 이 책은 20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쓰였다. 시대적 간극이 분명히 있다. 책에서도 남자로부터 승인이 필요 없는 세대가 출현하고 있다고 밝힌다.  한국 페미니즘의  4B운동(비섹스,비연애,비출산,비결혼)은 젠더병을 거부하는 단적인 예시다. 또 하나 여기서 말하는 남자로부터 승인, 하나밖에 없는 존재,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은 다분히 중산층적이다. 모든 계층에 통용되지 않으며 당장의 생계가 중요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계급과 시대를 떠나 남자의 승인 없이도 ‘사회적 존재’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경제적 조건이 철저히 뒷받침 되어야지만, 설사 경제적 능력이 되어도 ‘법이 보장하는 남자 파트너’ 없는 젊은 여자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가혹하다. 당해보지 않았다면 운 좋게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잔뜩 모인 공간에서 살고 있어서인지도. 남자나 지배계급의 의식 문제만도 아니다.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더라도, 한 남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수많은 여자에게 혼령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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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너무 나갔는데, 공동화된 결혼으로 돌아와 보자. 노부타는 말한다. 결혼의 공동화가 ‘잘못’된 것인가? 애초에 결혼은 제도이기에 공동화될 수밖에 없다. 결혼이 부여하는 자격 증명의 내용은 텅 비어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환상으로 결혼을 꽉 채우고, 그것에 매달려 없던 불행도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노부타는 임상심리학자다. 그는 ‘바람직한 가족의 이상’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상담소를 찾는다고 영업기밀을 누설한다. 부부 상담은 공동화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 결혼 관계에서 부부가 함께 이루어야 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으며 그걸 간절히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 우에노는 이걸 자승자박(‘자신의 밧줄로 자신을 묶는다’는 의미.)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가족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은 무얼 해야 하나. 노부타는 하나밖에 없는 순수한 관계, 영원한 나의 단짝, 나를 완전하게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으니, 환상을 깨부수고 제도의 공동화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행복한 가족을 만들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최소한의 규칙과 예의만 지키며 살자고 한다. 어떤가. 동의할 수 있겠는가? 


이 글에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결혼생활에 관한 글을 쓸 때 어떤 태도와 관점을 취할 것이냐를 말하고 싶다. ‘하나밖에 없는 관계’가 환상일지라도 그 환상 속에서 노력하는 나에 대해 글을 쓸 것이냐, 아니면 내가 가진 환상들을 한 겹씩 벗겨내는 글을 쓸 것이냐다. 


환상은 그것이 배신당하지 않고 유지될 거라는 믿음만 있다면, 혹독한 세상을 필터 하나 끼고 보는 것처럼 나쁘진 않다고 본다.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하나밖에 없는 관계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현재에 충실하는 일도 무척 훌륭하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이 서로에게 통한다면 그야말로 ‘모범 근대 가족’이다. ‘학교에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배움을 얻었어요.’라고 말하는 모범생처럼. 이 입장에 있는 글쓰기는 정치적으로, 규범적으로 딱히 거슬릴 게 없다. 오히려 환영 받을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 내가 의지하는 사람,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말들은 우리를 언제나 안심시킨다.

 

반면 환상에서 균열을 보고 분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환상이 나에겐 먹히지 않거나 혼자 갈아 넣어 만들거나, 그걸 유지하려다가 쥐어 짜지고 고갈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글은 몇 가지가 있다. 환상이 깨졌고 그 자리에 참을 수 없는 폭력이 드러나서 이혼한 경우가 있다. 이혼 당사자의 글은 결혼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고 많은 공감을 받는다. 아니면 환상이 깨진 자리에 다른 환상을 만들어 넣기.  ‘부부관계 개선 비법’을 쓴 자기계발서가 예시다.

 

교과서 같은 근대 가족의 이야기나, 이혼 수기나, 부부관계 개선법은 모두 확실한 결론이 주어져 있다. 문제는 환상은 깨졌고 공동화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그걸 다른 환상으로도 노력으로도 메우지 않는 경우다. 게다가 제도의 속성 때문에 기능은 여전히 작동한다. 


이때 쓰는 글들은 결혼제도의 메마른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읽는 이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환상이 벗겨진 자리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맨몸, 몸들이 부딪히는 힘의 작용이 필터 없이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 그리고 이 글에서 말하려는 글쓰기는 이것이다.  


글쓰기의 예시로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와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를 가져와 본다. 


수십 년 전 쓰인 이 두 권의 책은 현재 상황과는 동떨어진 면이 다소 있다. 특히 박완서의 책에서 묘사되는 성대한 약혼식, 남편의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들의 태도, 여자와 남자,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수시로 훈계처럼 강조하는 대사들은 프랑스인인 아니 에르노의 글보다 낯설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가져온 이유가 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한 남자인데’라는 태도 속에서 결혼을 제도로 보려는 측면은 약화되어 있다. 반면 ‘남녀평등 사상’이 막 들어왔지만, 결혼제도와 사정없이 충돌하던 시대의 텍스트들은 결혼의 뼈대를 좀 더 훤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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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얼어붙은 여자>는 한 여자가 남자들에게 선택받기 위해서 바둥댔던 10대를 보내고, 부르주아 남학생과의 결혼한 다음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하고, 어머니이자 아내 역할에 완전히 순응하기까지를 담은 글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르노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이 책도 사건 위주로 정리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그때그때마다의 사건에 따른 나의 반응만을 보여준다. 


작품의 화자는 여대생 친구들과 결혼에 대한 환멸을 쏟아내며 결혼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굴욕으로부터 자신을 피신시켜 줄 남자도 애타게 기다린다. 남자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는 말로 프러포즈를 했을 때 은총이 내린 것과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결혼 생활에서는 본격적으로 복잡한 태도를 섬뜩하게 내보인다. 요리와 육아를 맡은 자신과 집에 오면 신문을 읽는 남편. 이런 상황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현명함과 지혜"를 얻었다고 쓴다. “나의 귀염둥이, 내가 접시 닦는 걸 잊어버렸어”라며 예의 바르게 웃고, 가끔 장도 보며 집안일만 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다정한 남편에게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 “남편을 거세하는 역겨운 여자”는 될 수 없으니까.  


기혼 여성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지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배우자의 나태한 행태를 고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을 고발하거나 폭로하긴 어렵다. 배우자 한 명 나쁜 놈으로 만들고 자신에겐 티끌 하나 없는 듯 그리기란 얼마나 쉬운가. 또 반면 배우자가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기념일에 선물을 주거나, 아이라도 봐주면, 고마움을 표현하는 걸 넘어 이 틈을 놓칠세라 그를 추켜세운다. 화목함으로 냉큼 숨어버리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남편을 높여야 그런 그에게 선택받은 ‘하나 뿐인 나’의 가치도 격상하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써야 안심되는 것이다. 모두 내가 써 본 글이다.   


그러나 에르노는 남편의 수동적이고 안이한 태도를 돌려까기하면서도, 다정하고 지적인 남편의 이미지에 안주하고 말없이 불평등을 수긍하는 자신의 공모성 또한 폭로한다. 인물이 가지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면을 여러 각도에서 비춘다. ‘그와 나는 구조적으로 불평등 해!’,  ‘나도 이혼 안 하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로 사는게 다 그런거지’,  ‘그래도 이 사람 밖에 없다’라고 퉁치고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어떤 변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역시 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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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서 있는 여자>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는 평등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의 자기기만과 착오를 그린 소설이다. 시기는 90년대. 소설의 주인공인 연지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고서도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살기로 약속한다. 결혼식 후 연지는 직장에 다니고, 남편인 철민은 대학원을 다니며 집안에서는 주부가 된다. 그러나 연지는 남녀평등을 바라면서도 수시로 불안을 표출한다. 연지는 철민에게 말한다. 


남성 우위를 짓밟지 않으면 동등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성 우위를 보호해 줬을 때 오히려 편하고, 맞서려면 불편해져, 불편할 뿐 아니라 온통 부자연스러워져.”  


연지는 결혼 후엔 철민에게 혼자 존대하고, 철민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퇴근하고서도 몸이 부서져라 상을 차려낸다. 연지의 성격을 다 받아줄 것 같던 철민의 불만도 커진다. 남녀평등 쇼는 그만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자고 한다. 또 연지의 불안을 알아보며 그녀가 주장하는 평등이란 고작 ‘열한 평’에서만, 그것도 단둘이 있을 때만 활개 친다고 비꼰다.  


연지의 평등관과 대치되는 인물은 철민만이 아니다. 연지의 엄마인 경숙 여사가 있다. 경숙 여사와 남편은 연지가 결혼하면 이혼하기로 약속했다. 막상 연지가 결혼하고 남편이 짐을 싸서 나가겠다고 하자, 경숙 여사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모든 재산을 남기고 몸만 나가겠다고 남편이 말했지만, 경숙 여사가 두려운 건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교수 부인’이라는 지위 상실이다.  


남편이 자신의 돌봄을 원할 때만을 기다리는 경숙 여사. 철민과 평등한 결혼생활을 바랐지만 철민의 실추된 남성 우위를 보며 마음이 복잡해지는 연지. 박완서는 여자들이 공허함을 느낄 때 무엇이 나타나는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려나간다.  


연지가 철민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력은 다름 아닌 ‘연민’인데, 박완서는 연지의 심리를 빌어 부부 사이에서 연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생기가 회복될 가망이 없는 거라고 진단한다. 연민은 위로를 주고 받는 애정의 일부일 순 있지만, 서로에게 자극과 성장은 주지 못한다. 변화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관계가 아니다.


또 경숙 여사는 부부관계에서 화해의 방법으로 ‘육체의 화해’ 밖에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까지 아내 지위를 포기 못해, 남편에게 납작 기어 들어가며, 결국 남편과 육체관계를 맺어야 여자는 예뻐진다는 논리로 빠진다. 경제적 능력이 있어 이혼했지만 남자없는 외로움에 자신을 생활을 방치해버리는 경숙 여사의 친구들도 있다.  


<서 있는 여자>는 단지 결혼제도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보다 주인공 연지가 스스로를 어떻게 속여가며 결혼하는지를 그려나간다.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고, 평등하기 위해 자기보다 못한 남자를 선택하고, 그 시도가 실패하고,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연지는 본인 약혼식에도 청바지를 입고 오는 여자였다. 그러나 머리로 평등을 주입받은만큼 막상 남편과의 관계에선 몸과 생활을 바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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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 모두 결말은 이혼이다. 에르노는 책을 쓰고 이혼 ‘당하고’, 소설 속 연지는 스스로 결단하고 이혼한다. 결혼 생활에서 자기의 진실을 마주하면 결론은 이혼인 걸까? 나는 이 책들은 이혼에 방점을 두고 독해하진 않으려 한다. 이혼할 작정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거나, 이렇게 사느니 이혼하는게 맞다고 읽지 않는다. 


그보다 인물들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또 배우자와 자신이 맺는 관계의 방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탐구하는 태도에 주목한다. 그들은 묻는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특별한 관계, 단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환상이 거둬지고 공동화가 드러난 자리에서 쓰는 글을, 나는 ‘중간지대에서 쓰기’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중간지대는 행복하지도 않지만, 이혼할 정도도 아닌 상태다. 행복해져야 하므로 노력해야 한다거나, 기필코 이혼하고 말겠다며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환상이 거둬진 자리는 견딜 수 없이 황량하기만 할까. 남자와 여자라는 역할과 성별 권력도, 선택받는 나라거나 특별한 관계라는 위치를 떼어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려고 하면 무엇이 드러날까. 앞의 두 권의 책처럼, 결혼이라는 뼈대 자체가 위협을 받고 허물어질까. 아니면 예상치 못했던 관계의 원재료들이 나타날까. 


선뜻 상상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성애 관계가 빈곤하다는 방증일까. 같은 성별끼리 하우스메이트가 되어 살 경우 벌어지는 흥겨운 상상을 부부 관계에서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시도 자체가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갈까 두려운 것일까. 


나는 이미 많은 부부가 이 중간지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제대로 사는걸까, 내가 문제인 것일까, 저 인간은 왜 저 모양일까.’ 질문하면서.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 죽을똥 살똥 노력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 하거나, 헤어지거나 중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정작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는 보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부터 쓰는 연습을 하면 어떨까 싶다. 결혼이란 적당히 내려놓고 포기하고 사는 것이라는 전제, 행복하지 못할 바엔 헤어져야 한다는 전제, 부부 사이엔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긴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 백년해로 해야한다는 전제, 이 사람이야말로 유일무이하다는 모든 전제를 버리고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한다, 해야 했는데 못했다, 무얼 하겠다’라는 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것’부터 관찰하며 써본다. 거기에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가게 될 것이다. 기혼여성들에겐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나보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도록 너무 오래 훈련받았으니까. 


그러나 어쩌면 그런 글에서 새로운 관계를 위한 상상력의 실마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제도가 중심이 비어있고 실체가 없다는 말은, 삭막하고 헐벗은 틀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제도의 내부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채워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성물은 저마다 달라진다. 결국 뼈대의 모양도 바뀌게 된다. 


결혼에 관한 탐구는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과 나누는 정서적 친밀성, 성적 독점권, 육아와 가사 협력, 경제적 공유가 무엇인지 파헤치는 일이다. 한 사람과 이토록 많은 활동을 한다는 건 놀랍고도 끔찍하며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끔 나는, 결혼이 이런 징그러울 만치 복잡한 모순에서 파생되는 질문 자체를 즐기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생활은 좋아할 수 없는데, 질문과 호기심은 즐기는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한 이 마르지 않는 번뇌와 질문의 원천에서 가능한 박박 긁어낼 볼 작정이다. 단 이 과정에서 내가 감당하고 지불해야 할 비용은 지독한 고독일 것이다. ‘선택받은 나’, ‘나의 단 한 사람’, ‘나의 짝꿍’, 이런 관계를 해체하고, 제도 속에서도 단독자로 살기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고독은 못 견딜 것일까? 우에노 지즈코의 말을 빌려본다. “여러분은 고독이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그런 고독이란 직접 맛을 보면 '정말 상쾌한 것'입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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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토) 밤 9시 


목요일의 고독한 기록가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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