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이 나왔다고요?”
8월26일 오후 2시27분께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 외쳤습니다. 조세이탄광 갱도 입구에는 유골이 나왔다는 소식이 펴지면서 일본과 한국의 취재진이 백 명 가까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는 1991년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발족 때 창립멤버로 참여한 이노우에 요코 대표입니다. 지난 30여 년간 무참하게 희생된 조선인의 유골 ‘단 한 조각’이라도 찾아 고향에 보내줘야 한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노우에 대표에게 기적이 일어난 순간입니다. 재단의 후원회원들은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그는 2024년 리영희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된 ‘모임’의 대표로 시상식에 참석해 우익의 방해 책동을 자신의 ‘밝음’으로 배제했다고 말해 감동을 준 바 있습니다.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노우에 대표와 우에다 게이시 사무국장과 굽이굽이를 함께해 온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기적의 비밀을 풀어주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똑같은 전쟁 희생자인데 연금을 받는 자신의 아버지에 비해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에 대한 미안함, 폭우예보에 비행기를 못 탈까 봐 밤새 차로 달리는 충실함. 80여년 만에 수몰과 은폐를 증언하면서 들어올려진 유골발굴을 세상에 있게 한 대책없는 두 분에 관한 얘기입니다.
두 번째 글은 김학민 선생님의 ‘리영희의 슬기로운 감옥생활’ 마지막 회입니다. 1980년 출소 후 4개월 만에 다시 갇히는 세 번째 투옥에서 연이어 기사연 사건, 한겨레 방북취재사건으로 투옥되는 다섯 번째 감방생활까지를 다룹니다.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검찰자료에 의하면 방북취재사건은 시차가 있지만 두 갈래로 따로 진행된 듯 합니다. 일의 성격상 비밀리에 이뤄졌겠고 김학민 선생은 그 중에서 덜 알려진 1차 진행을 위주로 복기해주고 있습니다.
리영희가 마지막 재판에서 행한 ‘모두진술’ 과 ‘최후진술’은 문서로 남겨진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집행유예로 출옥 후 그가 쓴 1989년 출간된 <사회와 사상>12월호에는 그를 다섯 번 감옥에 보낸 국가보안법에 관한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를 위하여”라는 글이 있습니다.
“최근 이른바 방북취재기획사건의 법정심리 과정에서 나는 검사의 공소장 첫 페이지의 첫 줄을 가지고,‘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라는 서른 네 글자, 국가보안법 전문(前文)이 그 전문의 대전제가 객관적 진실 검증에 견딜 수 있는 것인가를 반박했다. 이 달이 지나면 1980년대는 과거 속에 흘러간다. 80년대는 인류사적 차원과 세계적 규모에서 대변혁이 발동한 기간이었다. 1990년대는 그 동력이 더욱 가속화되고 확대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와 21세기를 맞기 위해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자”
며칠 전 있었던 한일정상회담 뉴스화면에서 헤드테이블에 앉은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김영희님은 오찬간담회 다음날 이런 개인적 소감을 재단에 보내왔습니다.
“어제는 꿈같은 하루였습니다. 아~정말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 자리에 초대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믿겨지지 않는 영광이였는데... 여러 선생님들께서 못난 저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단은 지난 6월27일 ‘분단의 비극을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시킨 연인들의 이야기“란 제목으로 유영수 김영희 부부의 토크쇼를 개최했습니다. 뉴스레터 39호에는 토크쇼의 내용을 상세히 전달한 참관기와 동영상이 실려 있습니다. 오찬간담회에는 조작사건의 피해자로 유영수 김영희 부부, 이철 민향숙 부부가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철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회장의 기고는 뉴스레터 3호에 실린 바 있습니다.
8월 마지막 날에 보내는 40호 뉴스레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