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너와 함께 전시를 보고 왔다. 간만에 예쁘게 차려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섰고, 돌아오는 길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꿈과 영감 같은 것들을 가득 채워왔다. 전시를 보며 느낀 것이 흘러넘쳐 놓칠까 봐 너와 쉴 새 없이 입 밖으로 늘어놓았다. 그곳에 있던 누구도 그렇게까지 동요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우리 둘은 전시를 보며 울컥하다 못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심지어 전시가 끝나고도 여운이 남아 굿즈샵에서도 한참을 머물렀다.

일단 내게는 좋지 않을 수가 없는 전시였다. 김초엽 작가님과 디지털 아티스트 7인이 함께한 전시였는데, 나는 김초엽 작가님의 팬이자 그래픽 아트를 직접 배울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게다가 주제가 유토피아라니. 내가 대학 졸작 때 주제로 정했던 키워드가 유토피아다. 아무튼 이 전시 소식을 접하고 당장 얼리버드 티켓을 2장 예매했다. 네 생일 즈음이었기에 그냥 너랑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런데 너와 함께 가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나만큼이나 몰입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 보여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동심을 가졌던 그 시공간에 잠깐이나마 머물렀고, 너도 잊고 있던 너만의 유토피아에 다녀온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작품에 더 오래 머물렀지만, 분명 이 경험이 우리가 함께 품은 꿈에 좋은 거름이 되겠다는 것을 갈수록 확신했다.

각자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유토피아를 발견하고 나서, 우리는 함께 공유할 새로운 유토피아를 그릴 동력이 생겼다. 나는 당장 그래픽을 다시 시작하겠다며 흥분했고 너는 잃어버린 애플 펜슬을 다시 주문했다. 영감을 가득 충전하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만큼 설레는 순간이 있을까. 새삼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우리 동네에는 미술학원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취미로 다니는 화실, 다른 하나는 입시미술학원. 학교 친구들은 모두 후자에 다녔건만 나는 전자 미술 학원에 등록했다. 그곳엔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는 어린아이들이 수강생 전부였기에, 고학년이었던 나를 위한 단독 이젤과 고정 자리가 있었거든. 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라디오를 들으며 붓칠을 했다. 특별한 가르침은 없었다. 물로 명도 조절을 하라, 흰색과 검은색은 쓰지 말라.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건 그것뿐이었다.

소나무 위 파랑새, 해바라기 침대, 하늘로 이어지는 넝쿨 등 그리고 싶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그렸다. 나 자신이 오두막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고독하지만 행복한 화가라고 상상하면서. 흰 도화지가 색과 빛으로 점차 채워지는 게 좋았고, 그림 속에 들어간다면 나는 어떤 캐릭터이려나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미술 학원을 그만뒀다. 학교 미술대회에서 처음으로 1등을 놓친 날에. 어느 순간부터 세밀한 묘사와 기술이 살아있는 친구들의 그림이 더 멋져 보였다. 그게 잘 그린 그림이고, 정답 같았다.

미술을 그만두자 내 상상은 멈췄다. 그렇게 몇 년 후, 지금 이 시점. 유진이 네가 예약해 준 이 <유토피아>라는 전시를 보고 마음 한 곳에서 무언가 꿈틀하는 것이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이다. 작품들이 아주 이상적인,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장면들이었다. 하늘을 나는 집, 행성을 잇는 징검다리 그런.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멀뚱히 서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었다. 언젠가부터 내게 상상이 뜸해졌다면 그건 어른이 되어 변한 탓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던 소녀가 웬만한 현실적 의례에 자신을 끼워 맞춰버린 까닭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잠든 얼굴을 뜯어보듯 나는 작품이 주는 여운을 한올한올을 더듬고 기억하려 애썼다. 좋은 향이 나는 공간에서 이렇게나 이상적인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삶이란 것이 지금 이 타이밍에 유진이와 나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쇼핑몰에 대한 힌트와 더불어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두 눈 똑바로 바라보고 전한다. 나는 그림에 몰입하고, 무아지경으로 상상하고, 판타지 소설을 쓰고, 또 무언갈 그렇게 표현하고 창조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아, 맞아 나는 그랬다.

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