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생 슬생 즐생 중 제일은 즐생이라
어제는 회사 동호회에 나가봤습니다. 풋살 동호회였는데요, 난생처음 풋살이란 걸 해봤어요. (처음엔 족구랑 풋살을 헷갈렸으니 말 다했죠.) 사실 풋살뿐만 아니라 축구도, 농구도, 배구도, 야구도 안 해봤습니다.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구 토스 시험이나 농구 레이업슛 시험 같은 건 봤지만 그건 진짜로 경기를 해본 게 아니니 넘어가요. 
갑자기 왜 풋살이냐고 하면, 지난번 레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근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거든요. 그래서 뛰고 넘어지고 땀 흘리는 팀플레이에 살짝 미쳐 있는데 마침 같이 슬램덩크 이야기를 하던 회사 분들이 풋살 동호회가 있다며 스카웃 제의를(?) 해주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냅다 두 시간을 뛰어다녔는데… 간단히 말해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 와장창 뛰어다닌 건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아주 가끔씩 등산을 가고 그보다 자주 요가를 하지만, 이런 뜀박질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오랜만이었죠. 하긴 고등학교 때까지 저는 체육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잘하기도 했고요. 여중 여고를 나온 탓/덕에 더 재미있었을 지도 모르죠. 잃어버린 운동장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아무튼 아련한 근육통을 반가워하며 저의 체육 생활을 더듬다보니 어릴 땐 매일 뛰고 그리고 불고 치다가 시간이 다 갔던 것 같아요. 그 기억들은 이렇게 아직까지 저를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다음 풋살 모임에도 참석하게 될까요? 내일 갑자기 벼락같은 근육통이 저를 덮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렇게 걷게 되지 않는다면 대답은 네! 일 겁니다
짤 사용에 영감을 준 하경에게 감사를,,

어릴 때 학원 많이 다니셨나요? 저는 유독 예체능 계열 사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즘 열심히 보고 있는 <일타스캔들>의 치열쌤 같은 사람은 본 적 없어요) 어릴 땐 마냥 즐거웠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 그게 남는 거였다 싶어요. 어린 시절을 즐겁게 해주었고 지금도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니 최고의 가성비(?) 교육이 아니었을까요. 또 요즘은 모르겠지만 제가 초등학생일 무렵 급증한 맞벌이 가정과 방과 후 교실의 도움도 컸을 테고요. 오늘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에 학창시절을 보낸 저의 ‘예체능의 역사’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각자의 예체능의 역사를 떠올려보셔도 재밌을 것 같아요.


[날카로운 처키의 추억]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녔던 학원은 미술학원이었습니다. 네다섯 살때 동네 미술학원에 가서 초코파이랑 야쿠르트를 하나씩 받아 먹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어요. 집에서 엄마랑 하루 종일 노는 것도 (저는) 재밌었지만 (엄마가) 잠시 쉴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엄청난 걸 배우진 않았을 테고 학원 원장 선생님 딸이 저랑 동갑이라 같이 생일파티를 한 기억, 학원 선생님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다입니다. 그 무서운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니 <사탄의 인형> 줄거리였어요.

대여섯 살 때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방이 잔뜩 있고 방마다 피아노가 있는 구조였는데요, 저는 단 한번도 동그라미에 가짜로 선을 그은 적 없었던 게 생각납니다. 이게 생각난다는 건 그때 선을 긋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는 뜻이겠죠? 그 학원은 조금 다니다가 말았는데 당시 그런 구조의 학원이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는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그때부터는 피아노 레슨 선생님이 집으로 오셨는데, 그 선생님한테 13살 때까지 레슨을 받았으니 거의 7년을 함께 한 셈이네요. 전공할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는 모를 일…


[작전명 ‘하버드’]

모를 일이 하나 더 있는데요. 당시 일원동에서 잠실까지 버스를 타고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 쇼트트랙을 배우러 다닌 일입니다. 저랑 동갑인 김연아 선수가 당시 롯데월드에서 피겨 강습을 받았다던데, 행여 강습 시간이 겹쳤더라도 저는 김연아 선수를 한번도 못 봤을 거예요. 종목이 다르기도 했거니와 어린 저는 코치님이 시키는 말을 그대~로 듣는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쇼트트랙은 영원히 허리를 굽히고 타야 하는 종목이라 코치님이 레슨 시간 내내 허리를 못 펴게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허리를 펴지 않았답니다… 나중에는 허리랑 다리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는데 그냥 얼음판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안 폈답니다… 그동안 제 동생은 “에구 허리야!” 하면서 코치님 허리띠 잡고 슝슝 끌려다니고 있었고요. 진짜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말 모를 일…

일원동에서 수서까지도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거기서는 수영과 체조를 배웠어요. 아기 스포츠단 같은 거였겠죠. 엄마들은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에서 애들을 지켜보고… 저는 또 미친듯이 수영을 했습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며… 수영이 끝나면 바로 체조 강습을 받으러 강당으로 올라와 평균대 위에 섰습니다. 예닐곱 살에 평균대, 뜀틀, 온갖 구르기와 돌기를 마스터했었으나 지금은 평균대 위에 올려놓으면 울부짖는 일 밖에는 할 수 없겠죠.

저의 피아노에 대한 태도는 그냥 좋지도 싫지도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하라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체르니를 끝내고 쇼팽에 접어들었는데 그쯤 되니 엥? 내가 왜 여기까지 와 있는…? 하는 생각이 들었죠.

고등학교 때였나? 엄마한테 물어봤거든요. 그때 우리를 왜 그렇게 체육인으로 키우려 한 거냐고. 차라리 그 돈으로 그때 유행하던 영어 조기교육 같은 걸 시키지 그랬냐고.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자기는 ‘전인 교육’에 꽂혔었다고, 저를 사립초-중-민사고에 보낸 뒤 하버드에 입학 시키려고 했었대요. 그때 엄마는 30대 초반이었는데 갑자기 애 둘을 낳고 집에만 있게 된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때 생긴 목표가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생기를 줬을지 생각하면 참 귀여운 광기였다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행복했고 지금도 즐거우니 됐죠. 그리고 어릴 때 잔뜩 마셨던 파스퇴르 우유도 맛있었어요. (당시 파스퇴르 우유는 판매 수익의 일부를 민사고 장학금으로 활용했답니다. 미래에 내 아이가 갈 학교의 장학금에 보태기 위해 파스퇴르 우유만 먹은 엄마가 있다?)

여기서 맨 왼쪽이 제가 먹던 파스퇴르 우유입니다... 

[나를 키운 팔 할은 방과 후]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면서 엄마의 사립초-중-민사고-하버드(ㅋㅋㅋㅋ) 플랜은 폐기되었지만 저의 예체능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온갖 방과 후 수업을 섭렵했죠. 영어나 창의력, 독서 교실도 있었지만 저는 플룻과 단소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단소 전공자 선생님의 연주를 들어보셨나요? 플룻보다 단소 연습에 열광했던 저는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대일 수업을 이어갔고, 자칫하면 국악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게 될 뻔 했었답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는 일주일에 최소 열 시간씩 악기 연주에 골몰했던 셈입니다. 그 와중에 집에서는 아빠한테 클라리넷과 색소폰 강습을 (아주 조금) 받았으니 아니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계속 물음표만 쌓여감.

일주일에 열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에는 미술학원에 가서 중고등학생들 틈에 껴 석고상을 그리기도 하고, 파레트에 수채화 물감을 잔뜩 짜면서 학원 선생님과 수다를 떨었고, 아파트 주차장에 나가 또래 아이들과 탱탱볼로 피구를 하거나 주차장을 운동장 삼아 이어달리기를 했습니다. 놀이터에서 얼음땡, 탈출, 경찰과 도둑 같은 놀이를 하다가 2미터 구조물에서 뛰어내려 운동화 뒤축의 에어를 터트려먹기도 했어요.


[덩기덕 쿵더러러러…]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제 주위를 맴돌던 오선지와 정간보(^^)와 스포츠센터와 물감 냄새가 한번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 동네에는 마땅한 스포츠센터도, 미술학원도 없었고 중학교에는 방과 후 수업 같은 것도 없더군요. ‘나도 이제 중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지’, 마음 속으로 다짐하긴 했지만 사는 동네도 달라지고 친한 친구도 한 명 없는 갓 중딩이 그 변화를 받아들이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나온 중학교는 학생들이 자조적으로 ‘**예중’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예체능 수업에 집착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국영수’에 강점이 전혀 없고 학업성취도도 매우 낮은 곳이라 학생들의 시간을 ‘음미체’에 투입시키는 데 저항감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학교는 매년 합창대회를 열어 전교생을 참여 시켰고 그럼 전교생이 두 달 정도를 합창대회에 쏟았습니다. 또 매년 백 점짜리 체육 수행평가로 음악 줄넘기(링크)를 했어요. 1년 중 한 학기 정도는 음악 줄넘기를 준비하면서 보냈습니다. 미술 시간도 엄청났는데, 그때 만들었던 아크릴 판화와 휴지 케이스는 지금 발굴하면 거의 신라 유물 같을 겁니다.

인풋은 없고 아웃풋만 가득한 ‘음미체’에 질려버린 저는 갑자기 귀때기를 뚜드리는 락 음악을 들으면서 사물놀이 동아리에 들어갑니다.

야외에서 '농자천하지대본' 깃발 들고 옆에 잡색들 돌아다녀야 진짜인 거 아시죠?   

그때부터 삼 년 동안 장구를 치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풍물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누가 보면 풍물 하러 고등학교 진학한 줄 알겠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그리고 장구채로 이마를 딱 딱 맞아가며(…) 또 삼 년 동안 장구를 쳤습니다. 중학교 땐 사물놀이였는데 고등학교 땐 풍물이어서 너무 좋았어요. 여러분 풍물과 사물놀이의 차이를 아시나요? 풍물은 여럿이 상모 돌리면서 서서 감았다 풀었다 잇크엣크 하는 거고 사물놀이는 딱 네 명이서 둘러앉아 가락을 치는 거랍니다! 둘 다 너무 재밌어요…

특히 장구는 악기를 몸에 딱 붙여 묶고 계속 뛰면서 쳐야 하기 때문에 더 재밌었습니다. 악기가 몸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뛸 때마다 뼈에 부딪쳐서 멍 들고 아프거든요. 그래서 매번 서로 악기 묶어줄 때 뒤에서 발로 허리 밀면서 땡기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거의 코르셋 묶어주는 유모 그림이었겠네요. 걸고 뛸 때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겹뛰기, 까치걸음 같은 각 장단에 맞는 스텝(?)을 익혀야 해서 더 재밌습니다. 오늘 재밌다는 이야기 과연 몇 번 할까요? 아무튼 그만큼 체력 소모가 컸는데요, 적게 먹는 편인데도 방학 때 하루 종일 풍물 연습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빵이랑 밥이랑 계속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2학년 때는 전국 대회에도 나가고 (”내 꿈은 전국 제패다!!!!!!”였지만 성동공고였나? 북청사자놀이 오빠들한테 졌음) 3학년 때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한테 혼나면서도 꾸역꾸역 축제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동기들하고 야자 시간에 살짝 빠져나와서 축제 연습이 한창인 강당으로 뛰어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수능은 매년 있지만 축제는 졸업하면 끝이라는,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명언을 남긴 친구들은 지금도 각자 잘들 살고 있더라고요. 걔네도 아직 가끔씩 장구 꽹과리 징 북이 치고 싶을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않았어요. 그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태평소 배우러 다닐 줄 알았는데 어림 없더라고요. (풍물에서 태평소가 제일 멋있는 이유: 링크)


[또 보자, 스포츠맨]

대학에 가서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잡지를 만드는 동아리에 들어갔고 가끔 데모에 꼈고 전공 수업을 들었고 책을 읽었고 술을 마시고 연애를 했고 숙취에 찌들었어요. 두 학기 동안 국악 동아리에서 거문고를 배우기는 했는데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더라고요. 몸을 움직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전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네요, 놀랄 만큼 하나도 안 했어요. 이런 걸 하나도 안 해도 그때 제 인생은 충만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너무 텅 비어 있어서 이런 활동들로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나봐요. 거문고에 시들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을까요?

졸업을 앞둔 마지막 방학에서야 잠깐 수영 강습을 받았는데요. 배영을 하면서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보는 게 좋았다 말고는 별로 즐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놈이 다 늙은 것처럼 축 처져서는 말이죠. 지금 봤으면 등짝을 그냥 있는 대로 때렸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뭐가 그렇게 괴롭다고 불 꺼진 방에 드러누워 허벅지에 저온 화상을 입을 때까지 쿠키런(쿠키런 킹덤 아님)을 반복했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무튼.


[악귀야 물러가라]

그로부터 약 10년 뒤. 저는 갑자기 남의 아이패드를 뺏어 그림을 그리고 누드 크로키 12주 과정에 등록하고 풋살장에 가서 냅다 뛰고 날 좋은 주말이면 집 뒷동산을 오릅니다. 머리 깎고 돈 벌기 시작하더니 뭔가 구마된 걸까요? 정대만처럼 예체능이 하고 싶다며 다시 돌아온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진짜라면 지금 잠시 저에게서 물러간 악귀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좋든 싫든 짧은 인생(의 역사) 동안 경험한 것들이 저에게는 있고 이것들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이렇게 남이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언젠가는 지금 까맣게 잊고 있는 싹 혹은 작은 불씨가 다시 되살아날 날도 올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그게 뭐일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인생은 예측불허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회사 쉬는 날이었지만 출근했어요. 조용한 사무실이 마음에 쏙 들었고, 갑자기 찾아온 친구와 점심도 즐거웠고, 저녁 때는 미세먼지가 가라앉아서 집에 걸어오는 길이 상쾌했습니다. 

여러분의 수요일도 행복했길! 안녕=)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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