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선생님에 대한 아버지와 두 딸의 글입니다.
2024.8.1. 스물두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선생님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여러분에게 선생님은 어떤 의미인가요? 님도 오늘 땡비와 함께 내게 울림을 주었던 선생님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by. 흔희)


나에게는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선생님이 없다. 나는 학창 시절에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160센티를 겨우 넘긴 평균키를 가지고 머리를 한가닥으로 질끈 묶어 다니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비교적 착실한 편이었으며 적당히 활발하고 적당히 밝아 교우관계도 원만한 편이었다. 요약하자면 나는 선생님들에게 별로 손이 가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것이 꾸중이 됐든 칭찬이 됐든 선생님의 시선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어 나는 선생님은 그저 선생님으로서 예의를 다할 뿐이었지 인간대 인간으로서 또 다른 유대를 만들어가진 않았던 것 같다. 진급을 하고 반이 달라지면 그만인 관계. 졸업을 하고 나서 우연히 길에서 선생님을 마주친다면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는 분이 계실까.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부분에 있어서 나는 내 존재감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기억되기보다는 잊혀지는 쪽이 많지 않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었지만 나는 대학생이 아니라 재수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등교를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나는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터덜터덜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그날도 재수생의 무수한 아침 중에 하루였을 것이다. 완전히 잠을 떨치지 못한 멍한 상태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승용차 한 대가 도로 갓길에 멈춰 있었다. 운전자로 보이는 사람이 차 옆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길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흔희야, 안녕!”


선생님과 나의 거리가 백 미터쯤 되었을까. 고개만 돌아봤던 나는 몸의 방향을 선생님 쪽으로 틀어 선생님과 마주 섰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크게 두어 번 흔들다가 이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를 하였다. 얼른 가던 길 가보라는 선생님의 손짓에 몸을 다시 틀었고 발걸음을 학원으로 향했다. 기억해주고 있음이 고마웠다. 바쁜 출근시간에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던 그 마음이 고마웠다. 걸어가는데 눈가 주변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그 아침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응원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김애란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사랑을 '나의 부재를 알아봐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네가 안 보여서 찾았어.’라고 말하며 나를 찾아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울고 웃으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상대가 나를 떠올려주고 있었다는 순간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이만하면 그래도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가 잘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삶을 살고 싶다. 천성이 다정하지 못해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살아간다. 살다 보니 내 목표는 나를 완전히 개조하는 어마무시한 작업인 것 같아 목표를 다소 작게 수정하였다. 억지로 다정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최선을 추구하기가 버거워 최악을 피하는 형국이다. 아무래도 목표를 다시 수정해야 할 듯하다. 


누군가의 부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기억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름을 잃어버린 선생님들(by. 아난)

선생님은 이름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직업 중 하나다. 그저 '선생님'으로 편하게 불리거나 과목명이 이름 마냥 붙어 '영어쌤' 같이 불리기 마련이다. 반이 바뀌고 졸업을 하고 때론 선생님이 떠나면서 제대로 된 작별을 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게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진하게 남아 있는 세 분의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이 따뜻한 존재라는 걸 처음 알려준 분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다. 전학 온 새로운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께서 몸을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뵙지 못했다. 잠시동안 그 자리를 맡아주고 계셨던 젊은 여자 선생님을 '우리반 쌤'으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첫 제자라고 하던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에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봐 주셨다. 세세한 행동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님은 손수 쓴 편지를 아이들에게 주기도 하며 애정을 듬뿍 나눠 주셨다. 선생님의 마지막 근무날에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오열하며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선생님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한다. 비록 기억 속에서 선생님의 이름은 흐릿하지만 이제는 나보다 더 앳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내 추억 속에는 남아 계신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은 선생님은 우정을 쌓는 걸 알려준 과학실 선생님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과학실 청소를 담당하였는데 청소를 검사하며 과학실을 관리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몸집이 제법 큰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손재주가 참 좋으셨다. 과학실 귀퉁이에는 성인 두 명도 눕기 힘든 좁디좁은 선생님의 전용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십자수라는 걸 처음으로 알려주셨다. 이후 우리는 청소 검사를 다 맡고서도 집에 가지 않고 선생님의 공간을 아지트 삼아 십자수를 놨다. 한 땀 한 땀 십자수를 선생님에게 배우고 나서 학교 앞 편의점으로 가 컵라면을 먹는 게 우리만의 코스였다. 선생님과 함께 열심히 자수를 놓은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기도 하고 받으면서 친구들과 서로의 정성을 알아봐 주는 그 마음을 배웠다. 친구들이 좋아졌다. 저마다 미루기 바빴던 과학실 책상마다 있는 거름망 오물 청소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서 끝내고 십자수를 하러 가야 했다. 선생님, 친구들과 더 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하기 싫던 일도 해내버리며 우정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과학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세 번째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고2 때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였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수학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학원에서 인근 학교와 우리 학교 이름의 앞글자를 딴 '신양반 수학 선생님'으로 불렸다. 나는 고1 때 도형을 거치며 수학과 벽을 쌓게 되었고 원리는 모르고 요령으로만 수학을 대충 푸는 학생이었다. 열심히는 하는데 점수를 깎아먹는 내가 안타까웠던 건지 선생님은 어느 날 나를 남겼다. 텅 빈 강의실에 나만 남겨두고서 기초인 근의 공식을 완전히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나는 2ab 어쩌구 하며 근의 공식을 축약해서 활자로 외워도 a가 뭘 뜻하는지를 까먹어서 공식 자체를 적용 못하는 바보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게 문과 맞춤형으로 오히려 공식을 풀어서 ‘2 곱하기 앞항 뒷항’ 식으로 설명해 주셨다. 톱니가 움직이듯 멈춰있던 공식이 원리와 함께 머리로 들어오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공식을 외우면서 선생님의 손 제스처까지 따라 하다가 보았는데 선생님의 엄지 손가락 하나가 반토막이 나있었다. 꽤 오래 봐온 선생님이었는데도 분필 쓰는 모습만 보았지 가까이에서 본적은 처음이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 놀랐지만 애써 숨기며 수업을 이어갔다.


유쾌하게 수학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처음으로 수학이 재밌었다. 선생님과 같이 공식을 문장으로 풀어 외우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문제를 푸니 수학 문제를 풀어나갈수록 희열이 느껴졌다. 그렇게 고 2 때 내 성적은 상승에 상승을 이어갔다. 수학이 오르니 영어가 오르고 국어도 오르고 모든 과목이 덩달아 올라갔다. 수학 시험을 치면 기쁜 마음으로 시험지를 가지고서 선생님께 뛰어갔다. 같이 기뻐하고 오답을 체크하고 또 다음 수학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개념과 잔실수 하지 않을 비법을 잔뜩 머릿속에 넣어주셨다.


아쉽게도 선생님과 어떻게 끝맺음을 한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여느 학원 선생님들처럼 어느 날 계약만료나 이직이라는 사유로 사라지신 건지 아니면 내가 학원을 그만뒀던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를 앉혀두고 수업하시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름 석자를 모른다. 가까이에서 내게 헌신해 주시는 선생님이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소중함을 몰랐던 탓이다. 이름 석자, 선생님은 어떤 사연으로 선생님이 되셨는지, 손가락은 왜 그런 건지 궁금한 게 많았는데 입시와 성적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마였던 시기라 어느 것 하나 물어보지 못했다.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라고 10초면 되었을 텐데 여쭤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내내 후회되고 마음에 남는다. 한 번쯤 찾아뵙고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학원도 사라져 선생님은 공허하게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다.


선생(先生)님의 뜻이 ‘앞서 인생을 산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놀랐다. 내게 선생님은 학교에서 지식을 알려주고 평가하는 사람으로서 위엄이 느껴지는 단어였는데 그 뜻은 정반대였다. 내가 만났던 많은 선생님들은 저마다의 교과목 지식을 열정을 다해 알려주셨고 그분들의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정말로 마음에 울림을 준 선생님들은 ‘앞서 인생을 산 사람’으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해주는 방법을 알려준 분들이었다. 좋은 선생님들에게서 잘 배운 덕분에 지금의 나로 성장하였다. 비록 이름도 기억 못 해서 감사한 마음 직접 전할 길은 없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따뜻함을 배웠다고 외쳐본다.

부고를 보내지 말아라 (by. 못골)


  모방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창조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과 생각이 부모님에게서 유래된다면, 또 내가 가르치고 이야기하는 내용과 방법이 내가 가장 이상적인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선생님의 방식과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깡마른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눈초리가 매섭다. 칠판에 글씨를 힘 있게 눌러 써 분필이 부딪치는 소리가 심하게 탁탁 난다. 자주 분필이 부러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손목에 압력을 가해 써 나가는 글씨, 이쁜 글이 아닌 힘 있는 글이 칠판에 질서 없이 매워진다. 그래도 정리되고 이해되어 머릿속에 입력되는 내용은 버릴 것이 없다. 그냥 듣기만 해도 이해가 된다. 담임 선생님 수업이라 더 귀 기울여 듣는다. 고3인데도 잘못을 크게 저지른 친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교편으로 종아리에 회초리를 가한다. 복싱을 하는 친구에게 ‘너는 공부보다 권투를 열심히 하여 그쪽으로 대성해야 한다’며 친구를 격려해 준다.      


학생이 지나치다 싶을 때 체벌을 극히 가끔 할 뿐 좀처럼 그런 경우는 없다. ‘왜 결석했어? 왜 싸웠어? 왜?’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물을 때면 자상한 표정이 늘 얼굴에 깃들어 있다. 교련 조교의 요구를 무시한 죄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담임선생님에게 인계되었다. 웃으며 ‘괜찮냐’하고 묻는다. 선생님은 조교에게 간단히 나의 변명을 대신해 준다. 

“얘는 그런 학생입니다. 스스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잘 굴복하지 않습니다.”     


 충청도가 선생님의 고향인데 부산으로 와서 생활하였다. 대학원 진학을 하여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금전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졸업이 힘들었다며 석사학위를 경력에 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 교직을 알아보고 다닌 경험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교직을 구하려 다닌 당신의 과정이 특이하다. 부산은 연고가 없기 때문에 이력서를 여러 장 작성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무작위로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관리자를 면담하였다. ‘꽤 괜찮은 교사이니 고용하여 한번 써 보십시오’라며 준비해 간 이력서를 주고 자신을 선전하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 배짱을 나도 배워 학원에 근무할 때 다른 학원에 가서 자리가 나면 ‘괜찮은 강사이니 한번 불러달라’라고 하며 이력서를 주고 나왔다. 학원에서 생활하고 한참 뒤에 나를 만나지 않았는데도 이력서를 보고 미리 나를 알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너희들 진학지도를 태만하게 하여 너희들에게 지금도 미안스럽다.”라고 했다. 줄담배를 즐기는 끽연가인 그는 폐암투병을 하며 ‘네놈이 사진관 한다고 하니 어디 내 사진 한번 촬영해 봐라’고 한다. 빨조리를 물고 담배 피우는 모습을 연출하여 촬영한 사진을 지금 보니 그립다. 군자란을 길러 온 집에 난이 자라고 있었다. 패각충이 있어 매일 잎을 닦아 주며 확인을 해야 한다고 자식처럼 군자란을 길렀다. 군자란은 꽃을 보는 식물이 아니라 잎을 보고 키운다고 하며 관상용 식물의 용도가 여러 가지로 있음을 알려준다. 산에서 흙을 가져오면 살균하기 위해서 솥에서 찐다고 했다. 대단한 성의이다. 아들이 있는데 입시에 실패하여 삼수를 하고 있다며 나에게 자식이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늦둥이 딸이 있었는데 아주 명랑하고 발랄해서 선생님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사모님은 약사였는데 왜 그렇게 사업이 잘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사도 사업에 실패를 하는가’하는 이해하지 못할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은 나이 많은 백발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내가 임용 후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선생님은 만들어 놓은 진학 지도표를 나의 학급에 대입시켜 입학 가능한 학교를 예정해 주었다. 3학년 초보 담임을 제법 경력 있는 교사처럼 연수시켜 입학 시즌을 슬기롭게 넘겼다. 유락여중을 졸업한 아이가 우리 반에 편성되고 나서 나이 지긋한 어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 부탁을 했다. 아이가 실장으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실장이 되고 그렇지 않고에 담임이 개입할 여지는 크게 없다.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감수한다면 몰라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선생님은 실장을 부탁하는 것은 그런 직책을 감당할 만한 아이이니 부탁하는 것일 거라고 말해 주었다. 실장 선출에 담임이 되도록 개입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선출하도록 두고 보니 이 아이가 자연스레 실장이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다고 한다. 실장이 되니 학급을 잘 이끌어 간다. 실장은 담임 못지않게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으니 부탁을 한 것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89년에 해직이 되고 나서 선생님이 재직 중인 학교의 조합원 동료에게 선생님의 근황을 물으면 ‘자신의 애제자도 해직되어 있다’고 하더란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너희들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미안해했다. 전교조 건으로 해직되고 나서 00여상 김0덕 교장을 소개해 주었다. 정권의 폭력에 의해 해직이 되었는데 어느 누가 임용을 해줄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라며 선생님께 면접을 가지 않겠다고 하니 자기가 이야기해 놓았다며 일단 가서 만나만 보라고 간곡하게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도 제자의 해직을 가슴 아파하는 선생님의 배려가 고마워 헛발질이라 생각하며 김교장을 찾아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곧바로 나를 쳐다보며 ‘꽤 나이가 든 전교조 교사이구만’하며 이어 나오는 말이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하는 책망의 말이 나에게 던져졌다. 속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다. ‘그래서 해직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이상 책임지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요?’ 하고 자문했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전국의 학교가 전교조 사태로 폭풍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다. ‘모든 학교의 관리자가 전부 전교조에 비판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왔다. 당연히 임용은 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불가능 속에서도 나를 위해 애써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늘 고맙게 느껴진다. 94년 복직을 하고 5월인가 전화를 하니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전화로 답변이 온다. 황당해 하는 나의 귀에 ‘선생님이 나에게는 부고를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한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는 유언처럼 들렸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끔 귀에 쟁쟁거린다. 길을 걷다가, 학교 생활에 힘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 기억되는 평생 함께 가는 선생님이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21. 어린이의 지혜)
그라나다님 : 흉내조차 낼 수없을만큼 순수하고 어여쁜 시인인 아이들, 그러면서도 어른과 다름 없는 성숙한 존재의 아이들, 휘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애쓴 우리 속의 아이들. 이렇게나 다양한 관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좋은 글을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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