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타래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리베카 솔닛 전작 읽기’를 진행하고 있는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인데요.

전작 읽기를 진행하는 동시에,

솔닛 책의 키워드와 연결되는 책을 소개해주실 예정이에요.

들불의 시선에서 엮는 책타래에는 어떤 책이 담겨 있을까요?



책타래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낮고 어두운 곳에 불씨를 심으며 길을 내는 ‘들불’의 모임장 구구입니다. 갑자기 등장해서 놀라셨나요? 저도 제가 평소 애정하던 반비 책타래에 글을 싣게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질 않는데요(!), 먼저 제게도 여러분에게도 놀라운 이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리베카 솔닛은 환경, 인권 운동 등에 힘쓰고 있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밀도 높은 저작을 다수 집필해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현재까지 출간된 작품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전작주의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작가이기도 하죠. 저 역시 소문난 전작주의자로, 몇 차례 솔닛 전작 읽기에 도전했는데요. 그때마다 솔닛의 책은 여럿이 함께 읽어야겠단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왜일까요?

 

‘리베카 솔닛’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로 ‘기억’과 ‘걷기’를 꼽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솔닛은 두 키워드를 글 쓰는 방식에도 접목합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찾기 위해 빵 부스러기를 떨어트려 놓았던 것처럼, 솔닛은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 각기 다른 기억들을 뿌려 놓아요. 독자는 솔닛이 뿌려 놓은 기억들을 따라가며 걷고, 또 걷습니다. 종종 헤매기도 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 보기도 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 도착해 있죠.

 

중요한 건, 독자가 도달하는 ‘끝’이 늘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솔닛은 모두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보다 각자의 결론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길 원하는 작가예요. 우리가 동화를 읽으며 상상했을 빵 부스러기와 과자집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솔닛의 이야기는 독자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이끕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절망, 기쁨, 분노, 희망의 모습으로 또 하나의 기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이어지고, 여러 동심원을 이루게 되는데요. 이때 만들어진 개개인의 역사야말로 솔닛이 진정 도달하길 바라는 결론, ‘우리’라는 새로운 가능성이자 희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솔닛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목소리,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장이 필요하다는 사실, 솔닛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속에서 함께 희망을 발견해 줄 동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들불은 2023년의 장기 프로젝트로, ‘희망의 순환’이라는 타이틀로 리베카 솔닛 전작 읽기 모임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이에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반비 책타래에서 솔닛의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을 큐레이션하는 독서 가이드를 자처하게 됐고요.

 

제가 준비한 리베카 솔닛 가이드, 함께 걸을 준비가 되셨나요?🚶🚶‍♀️ 먼저 총 2회에 걸쳐 『야만의 꿈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해보려고 해요. 이 책들이 솔닛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좋은 동행이 되어주길 바라며, 오늘의 책타래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언어는 그렇게 드러내려는 현실을 바꾸어놓는다."(『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87쪽)

 

‘제주’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가족과 갔던 첫 여행이 떠오릅니다. 가깝지만 먼 곳, 그래서 왠지 특별한 이벤트가 펼쳐질 것 같은 곳. 이것이 제가 제주를 떠올리는 방식이죠. 반대로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 먼저 떠오를 겁니다. 이렇게 장소는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 그곳에 부여된 이름에 따라 윤색되고 오염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장소는 때로 정치적 격전지가 되기도 합니다.

 

미 의회는 급증하는 핵폐기물을 저장할 장소로 네바다주의 유카산을 지정합니다. 이에 지질학자들은 유카산의 활발한 화산 활동이 폐기물 저장소를 폭발하도록 만들 수 있다며 저장소 설치를 반대하죠. 이렇게 유카산은 핵폐기물 저장소 설치를 중심으로 정부와 학자, 활동가들이 맞서는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인 쇼쇼니족에게 그곳은 “치아씨와 막대 모양의 잎을 채집하고 큰뿔양을 사냥한 장소”(『야만의 꿈들』, 130쪽)일 뿐입니다. 이렇듯 ‘유카산’은 보존해야 할 장소, 버려진 땅, 식량을 내어주는 삶의 터전으로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정의됩니다.

 

솔닛이 말했듯 장소 그 자체는 고정적이고 구체적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가 그 장소를 쓰임에 따라 다르게 명명함으로써 장소 위에는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지고, 기존의 기억들은 말소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장소는 권력이 정한 용도에 맞게 변모하고, 장소와 함께 머물던 힘 없는 기억들을 밀어냅니다.

 

언어가 가진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은 권력에 의해 ‘이방인’으로 명명된 자들, 여성, 흑인, 원주민과 같이 이름을 잃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권력의 명명에 의해 기억과 함께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들 역시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언어를 놓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언어를 뒤집고 해체하면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했죠.

 

이제니 작가의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에 실린 에세이, 「되풀이하여 펼쳐지는 ㅡ 마전」의 화자 역시 언어의 힘을 두려워하는 기억의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방인이 그러했듯 화자 역시 무언가를 제대로 쓰기 위해,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화자는 권력이 휘두르는 언어의 힘에 번번이 압도당하고, 자신이 감각하는 장소와 권력이 명명한 장소의 간극에서 오래 헤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마침내 ‘글쓰기’를 통해 ‘마전’이라는 지명과 장소를 나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나의 기억으로 구성된, 나만의 장소로 말이죠.

 

“이 글을 쓰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알고 있던 낱말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지 못했던 낱말의. 그 깊은 신비와 마주치면서. 그렇게 오래전 나의 얼굴과 지금의 나의 글쓰기는 희미하게나마 다시 연결된다. 나는 이제야 어떤 장소를 기억하기 시작한다.”(92쪽)

이번 레터를 읽고 나니……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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