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언폴드엑스'전 속 '시스틴 채플'

백남준의 1993년 작품 '시스틴 채플'이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 '언폴드엑스'전에 전시된 모습. 사진: 김민 기자

199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비엔날레 전시장 독일관에 백남준은 설치 작품 ‘시스틴 채플’을 선보입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나무 선반 위에 CRT 프로젝터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빈 벽과 천장으로 영상이 가득 메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CRT 프로젝터를 들고 선반 위 높은 곳에서 씨름하던 설치 스태프들이 수일 간 이어진 작업에 지치자, 백남준은 이들이 머무는 호텔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스태프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조식에 계란 하나씩을 추가해주었다고, 그의 엔지니어 존 허프만은 회고합니다.

이 작품은 2022년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지금은 서울문화재단 기획전 ‘언폴드엑스’전이 열리는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시된 이 작품의 형태는 사뭇 다른데요.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백남준이 본 ‘현대판 시스틴 채플’
우선 ‘시스틴 채플’이 어떤 작품인지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 작품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본 전시가 아니라 각 국가들이 ‘대표 작가’를 선정해 선보이는 국가관에서 발표됐습니다. 1993년 독일관은 대표 작가로 한스 하케와 백남준을 앞세웁니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첫 전시를 여는 등 활발히 활동을 한 바 있습니다.

이 때 한스 하케는 독일관의 메인 전시장을, 백남준은 ‘날개’로 불리는 사이드 전시장을 선택합니다. 백남준은 사이드 공간을 받아들이면서 “작품의 볼륨은 원하는 만큼 높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두 사람은 각자 사뭇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하케는 독일관의 바닥을 산산조각 내었는데, 이는 이 공간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파시스트 정부가 만든 것임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의 한스 하케 작품 'Germania'. 

백남준은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스틴 채플’을 미디어 아트 버전으로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작품을 내놓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그린 시스틴 채플에는 종교와 신화, 즉 권위있는 내용이 가득했다면 백남준은 그 대신 플럭서스 예술가와 팝스타의 영상으로 전시장의 벽면과 천정을 채웁니다.

영상 속에는 백남준과 교류했던 예술가들,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샬롯 무어만이 등장한 것은 물론 데이비드 보위, 재니스 조플린, 루 리드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까지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매우 빠른 영상 전환과 시끄러운 음악이 조용하고 정적인 시스틴 채플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과거와 결별하는 아방가르드 예술, 미디어를 통해 발달한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백남준 식 ‘현대판 시스틴 채플’이였죠.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에 전시된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 사진: 김민 기자

나무는 철제로, CRT는 LCD로
그런데 이번 문화역서울284에서 전시되는 ‘시스틴 채플’의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이 1993년 설치된 것과 형태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1993년에 CRT 방식이었던 빔프로젝터는 좀 더 가벼운 LCD 빔프로젝터로 교체되었습니다. 또 이 프로젝터를 받쳤던 나무 선반은 철제 비계가 되었죠.

프로젝터가 벽면과 천장에 송출하는 영상과 음악의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작동하는 기계의 외관은 달라졌습니다. 이는 미디어 아트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우선 지금의 형태는 어떻게 결정된 걸까? 출발은 2019년 영국 테이트 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백남준 회고전이었습니다.

이 전시 기획자들은 1993년 ‘시스틴 채플’을 설치했던 엔지니어, 백남준 에스테이트 관계자 등과 협의해 지금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우선 CRT 빔 프로젝터는 더 이상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 때문에 구형 프로젝터를 구한다고 해도 수리 기술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LCD를 선택하게 되고, 이 프로젝터를 지탱하는 구조물은 전시 되는 공간에 맞춰 형태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옛 서울역사의 높은 천정, 조명등과 어우러지는 '시스틴 채플'. 사진: 김민 기자
기술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 인간
테이트 모던의 당시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는 “백남준은 1993년에 이 작품이 다른 곳에서도 전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며 “그러나 관계자 협의 및 연구한 바에 따르면 백남준에게는 그것을 송출하는 기기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생전 LCD 기술이 발전하자 백남준은 CRT 대신 이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라바글리아의 분석은 백남준 예술 세계의 맥락에 비춰봐도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백남준이 기술을 활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최신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통용되는 방식과 다르게 이용해서 새로운 소통을 창출해낼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TV 프레임 속에 네온 사인으로 문자를 표현한 백남준의 작품 '칭키즈 칸의 복권'(1993) 사진: 김민 기자
이를테면 텔레비전에 자석을 붙여 영상을 일그러뜨리고, 브라운관을 떼어내고 그 안에 촛불을 켜는 등의 작품이 있죠. 여기서 백남준은 기술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지 말고, 그것을 타고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가는 주체가 되라고 주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CRT냐 LCD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떤 모양인지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기술 자체에 대한 탐구나 연구가 아니라, 결국은 그것과 얽히게 되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메시지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다른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살아난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테이트는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백남준의 엔지니어였던 이정성 씨도 과거 “백남준 작품에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TV 프레임 속 청자 토끼가 놓여 있는 백남준 작품 '토끼와 달'(1988). 사진: 김민 기자
다만 미디어 아트 역시 시각 예술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남는 고민들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스틴 채플’이 아니라 다른 조각 작품들은 브라운관이 주는 특유의 형태를 존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또 CRT 영상 특유의 부드럽고 아날로그스러운 느낌이 LCD에서는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면 큐레이터들은 전 세계에 몇 명 되지 않는 CRT 기술자를 수소문하거나, 고물상을 뒤져 브라운관 모니터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장 오랜 시간을 버텨온 회화가 간단하면서도 훌륭한 미디어라는 생각도 듭니다. 20세기에 생겨난 비디오는 계속해서 그 방식이 바뀌니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때문에 백남준의 어떤 작품들은 ‘다다익선’처럼 매번 어떻게 유지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자주 부딪칩니다.

물론 이런 점 때문에 여러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각자 작품에 대해 다르게 해석한 결과물이 탄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시스틴 채플’의 여러 버전을 찾아보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지 비교해 보세요.

*참고 자료
- Sook-Kyung Lee, Rudolf Frieling, Nam June Paik, Prestel(Feb, 2020)
- The Art News Paper, The Sistine Chapel's system upgrade: Nam June Paiks immersive video to be recreated for tate, 2019. 10. 4.
(https://www.theartnewspaper.com/2019/10/04/the-sistine-chapels-system-upgrade-nam-june-paiks-immersive-video-to-be-recreated-for-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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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가 판화까지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니! 놀랍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감동되네요

🔸지방에서 전시된다는데 의미가 깊습니다

🔸판화전이라도 렘브란트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군요. 가서 보면 마음이 막 일렁일 것 같아요. 학예사님과의 인터뷰 고맙습니다. 전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램브란트의 판화를 이리나 많이 볼수있군요🙏 마침 23일에 대구에가는데 꼭들러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psyj)

🔸'에칭'이 판화의 기법의 하나라는 것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 덕택에 새로운 눈이 트입니다. 지난주 선주민과 원주민에 대한 추가 설명 감사드립니다! (수수팥떡)
👉 에칭은 금속 판에 선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 판을 산으로 부식 시켜서 요철을 만들고 찍어내는 기법입니다.
오늘의 '영감 한 스푼'이 전해드릴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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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김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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