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서른아홉 번째 흄세레터
❄️ 어떤 기억들은 스노우볼 속 눈과 닮았다고 생각해왔어요. 가만히 뒀을 땐 없는 듯 있다가, 외부의 자극이 가해지는 순간 요란스럽게 휘날린다는 점에서요. 잊고 지낸 이름, 오랜만에 찾은 장소, 어떤 노래나 사물이 촉매제가 되려나요. 
대부분은 생생한 장면으로 펼쳐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지만, 어떤 기억은 불현듯 떠올라 지금의 나를 사로잡기도 하죠.
《여행자와 달빛》의 주인공 '미하이'는 청춘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묻어두고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과거의 친구들을 뒤로하고, 그럴듯한 직업을 갖고, 모두가 인정하는 여성인 '에르지'와 결혼하죠. 사건은 미하이와 에르지의 신혼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시작됩니다. 그들 앞에 미하이의 옛 친구가 나타나 잊고 지낸 친구들의 이름을 꺼내죠. 미하이는 애써 무시한 채 여행을 이어나가지만,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중 엉뚱한 기차에 오르면서 에르지와 떨어집니다. 그런 뒤 미하이는 다른 기차에 오른 게 실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쉽게, 아내에게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과거 친구들의 흔적을 쫓습니다. 현재의 시간에 펼쳐진 과거의 기억들은 그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또 에르지 앞에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요?
오늘 흄세레터에서는 김화진 소설가가 쓴 리뷰를 보내드립니다. 💌
  되돌아가는 여행


“너 정말 그걸 할 거니?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 말이야…….”
—나탈리 사로트, 《어린 시절》에서


《여행자와 달빛》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묻는 소설처럼 보인다. 자신이 선택한 동행자와 우연히 주어진 여행지 중 어느 쪽이 더 낯선가. 소설은 서른여섯 살에 신혼여행으로 처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남자 미하이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전남편과 헤어진 여자 에르지의 상반된 입장과 성격을 보여준다. 둘은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다. 소설에서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단 한 문장이다. “미하이는 항상 걱정에 가득 차 있었고, 에르지의 역할은 항상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에르지가 보기에 미하이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인 데다 병이 옮는 것을 두려워하며, 돈 쓰는 것을 매우 아까워”하는 사람이다. 미하이가 보는 에르지는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전부 내맡기고 싶어 하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속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 보다 상대방을 꿰뚫어 보았는지 당장은 알 수 없을지라도 거기엔 누구나 아는 진실이 있다. 그녀는 그를, 그는 그녀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미하이와 에르지는 힘겨운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기우뚱대면서도, 결혼으로 묶인 그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이 시도한 ‘발맞춰 걷기’는 한순간 우연한 실수로 ‘홀로 걷기’가 되어버린다. 에르지의 발목과 미하이의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묶고 있던 끈이 서로의 발이 다른 방향으로 내딛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그 일은 미하이와 에르지가 기차를 타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는 도중, 미하이가 목적지가 다른 기차에 잘못 타면서 벌어진다.


그리고 헤어진 순간부터 둘은 애써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가장 익숙하고 낯선 여행지를 향해 걷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의 내면, 혹은 내면에 뿌리내린 과거, (특히 미하이에게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인물들이다. 10대 시절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주변에 서 있다고 느끼는” 발작 증세가 있던 미하이는 자신을 그 소용돌이로부터 구해준 울피우시 터마시를 동경하게 된다. 터마시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여동생 에버와 친구들까지.


미하이는 그 시절 터마시가 심취했던 종교사, 역사, 연극과 같은 모든 것을 뒤따라가는 모양새로 함께했고, 훗날 미하이가 에르지와 함께 온 신혼여행지 이탈리아 역시 그 시절 터마시가 줄곧 가고 싶어 하던 나라였다. 미하이는 어쩌면 그들처럼 살고 싶었고, 한때 그들처럼 죽고 싶어 했다. 현재 미하이의 현실적이지 못한 면이나 수동적이고 내면을 파고드는 성격적 특징은 전부 그 시절 에버와 터마시로부터 온 것이나 다름없으며, 서른여섯 살의 미하이는 내면 속 과거의 시공간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상태처럼 보인다. 신혼여행에서 에르지와 떨어진 후, 미하이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에르지와 만나겠다는 마음을 접는다. 현재의 동행자에게는 수풀에 머리를 박은 꿩처럼 자신을 숨긴 채, 그가 몰두하는 것은 과거 선구자였던 옛 친구들의 행적을 쫓는 일이다. 미하이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다시 마주하는 터마시의 죽음, 에르빈의 종교, 발트하임의 학문은 미하이가 그 시절 친구들로부터 받은 영감이자 그의 삶을 사로잡았던 것, 그가 이루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들의 목록이다.


미하이는 오랜 길을 돌아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하지 않음’으로 이루어진 미하이 자신을 인정하며. 그렇다면 에르지는? 공교롭게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다른 길로 갈라진 미하이와 에르지는 다른 공간에서 혼자일 때 비로소 닮은 면을 드러낸다. 미하이를 잃어버린 채 친구인 샤리가 지내는 파리로 온 에르지는 길어지는 파리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 어린 시절부터 지녀왔지만 지속할 수 없었던 절약에의 열정을 되찾는다. 식당에 가지 않고, 커피를 마시지 않고, 쇼핑을 하지 않는다.


에르지의 ‘하지 않음’은 자유와 닮았다. 첫 번째 결혼 전 그녀는 “젊은 여성으로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의 신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각 없어’ 보여야만” 했으며, 첫 번째 결혼 후에는 “졸탄의 부인으로서는 절약을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녀 곁에 선 남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사치스러운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미하이와 에르지, 두 사람이 자기 방식에 도달하는 여정은 다른 궤적을 그리지만, 결국 가리키는 곳은 같다. 바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 쪽이다. 미하이와 에르지가 걷게 된 여행길은 삶에 대한 선명한 은유 같다. 결혼과 환상, 오해와 환멸, 우연과 이별, 병듦과 고통, 과거와 친구, 종교와 죽음, 유혹과 배신, 이상과 현실이 도처에서 그들의 발을 묶는다. 그 모든 경험을 거쳐 그들은 어디론가 도착한다. 《여행자와 달빛》을 읽으며 여행에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있다는 점을, 우리가 떠나는 것은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진실을 다시 생각한다. 미하이와 에르지, 그리고 두 사람과 다르지 않을 우리의 삶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떠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달라진 채로.

김화진 |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 《A 군의 인생 대미지 보고서》(공저),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공저) 등이 있다.
여행자와 달빛 세르브 언털 | 김보국 옮김

20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세르브 언털의 마지막 소설.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 앞에 남편 ‘미하이’의 옛 친구가 나타나고, 급격히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 미하이는 한순간의 실수로 아내 ‘에르지’와 다른 기차에 오르는데……. 사라졌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고통과 열망이 은밀하고 매혹적인 메타포들로 몸 바꿔 되살아나고, 유혹의 순간을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자기만의 삶’ 앞으로 독자를 잡아끄는 독특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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