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모든 인원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엔 높이가 낮은 나무 탁자가 있는데, 오래된 물건 같았다. 어쩌면 정원이 어릴 적부터 사용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정원의 어머니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스웨터 몇 벌과 거의 새것 같은 등산용 백팩, 카메라, 선글라스, 털장갑 등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정원이 평소 사용하던 물건 중에서 친구들에게 줄 것들을 추린 듯했다.
“너희 필요한 거 있으면 좀 가져갔으면 해서.”
정원의 어머니가 상자 속에서 물건들을 꺼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상자에서 나온 것은 손목시계였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쏟아지는 햇볕을 받아 메탈 손목시계가 반짝거렸다. 그건 내가 정원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원래는 남성용으로 출시된 제품인데, 정원은 여성용은 시계판이 너무 작아 답답하다며 그것을 골랐다. 그러고는 옷차림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 시계를 차고 다녔다. 겨울에 정원의 왼손을 잡으면 선득해질 만큼 차가운 금속이 한 번씩 살갗에 닿곤 했다. 나는 어째선지 그 감촉이 무척 비밀스럽게 느껴져서 정원의 손목을 잡고 시계를 만져 보곤 했다.
“부담스러우면 가져가지 않아도 돼요.”
그녀가 상자를 보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를 두고 말했다. 나는 혹시 내 표정이 좋지 않았나 싶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갖고 싶어요. 안 그래도 정원이 기억할 만한 게 있었으면 했어요.”
나는 말했다. 그건 사실이어서, 내게는 정원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원이 내게 선물해 준 물건들을 제외하면 우리 집으로 놀러 올 때 입곤 했던 파자마와 티셔츠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시계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기환 씨가 먼저 시계를 집어 들었다. 정원의 손목에 맞게 밴드의 체인을 여러 줄 제거한, 다이얼은 크고 밴드는 짧은 그 이상한 시계를 바라보면서, 기환 씨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곁에 앉은 영진 씨가 다정한 말투로 일렀다.
“그건 너 가져.”
정원의 어머니가 시계의 손목밴드를 늘릴 수 있는 체인을 가져다주겠다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진 씨와 규석 씨가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때에야 다른 친구들이 기환 씨를 조금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환 씨가 정원을 좋아했던 것을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기환 씨는 정원을 좋아했다. 정원은 그 사실을 알았고, 나 역시 정원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정원은 그의 연정을 모른 척했다. 밤늦게 보내오는 문자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고, 단둘이 만나자는 제안은 내가 알기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정원은 기환을 불편해했다. 다만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지나치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기환 씨에 대해 얘기했을 때, 정원은 이제 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고 내게 말했었다. 잠시 뒤 정원의 어머니는 시곗줄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제가 시계를 갖고, 기환 씨가 가방을 가지면 어때요?”
기환 씨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그러자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기환 씨가 내 곁에 앉자 소파 쿠션이 아래로 훅 꺼졌다. 기환 씨는 커다란 손을 펴서 반짝이는 시계를 보여 주었다.
“이거 누나가 선물하신 거죠?”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묻고는 시계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시계를 받아 들었고, 순간 묵직한 무게감을 느꼈다. 나는 시계를 왼쪽 손목에 감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시곗줄이 잠겼다. 시계는 내 손목에 꼭 맞았다.
기환 씨는 살짝 취한 듯 보였다. 덩치와 다르게 술이 약한 듯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정원의 어머니는 와인을 한 병을 꺼내 왔고,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기환 씨와 영진 씨는 정원의 어머니와 함께 와인을 두어 잔씩 마신 터였다.
“정원이가 그랬어요? 내가 줬다고?” 기환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 좋아했어요. 맨날 차고 다녔잖아요.”
그는 정원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고, 나는 그 점이 반가웠다. 정원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정원의 친구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지만 정작 정원에 대해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대화는 계속해서 정원의 주변을 에두르다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거나, 의미 없는 좋은 말로만 마무리됐다. 정원이 정말 좋은 친구였다는 것. 정원이 가족들에 대해 많은 애정을 드러냈다는 것. 그 정도가 내가 그 자리에서 정원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이야기들은 온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나는 정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하거나 듣고 싶어서 마음이 초조했다. 정원의 죽음 이후 정원에 대해 말할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는 이 자리를 오래 바라고 기다렸다. 나는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정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정원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도 궁금했다. 정원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가까운 친구로 소개하곤 했다. 머지않아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정원의 시간이 멈춰 버리며 이 모든 것은 가정의 형태로만 남게 되었지만.
정원 어머니 댁을 나와 어둡고 조용한 신도시 도로 위에 있을 때엔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사이 소나기가 쏟아져 도로는 젖어 있었다. 도로의 물기 위에서 신호등이 어룽거렸다. 나는 그걸 지켜보다가 옆자리의 기환 씨에게 문득 물었다.
“정원인 산에 왜 갔을까요?”
정원은 혼자 등산을 갔다가 실족했다. 정원은 한 번씩 혼자서 산을 올랐는데, 정원에게 듣기론 등산보다 산행에 가까운 일인 듯했다. 운동화를 신고 아스팔트가 깔리거나 야자수 매트가 놓인 길을 조금 걷다 오는 정도의. 그날 정원은 북한산에 혼자 올랐다. 어떤 이유에서 험한 길을 택해 정상까지 올라가려고 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정원이가 산에 가끔 갔던 것도 잘 몰랐거든요.” 기환 씨가 말했다. “그냥, 그즈음에 뭘 기도하러 간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무슨 기도인지는 저희한테 말을 안 해줬고요.”
“기도요?”
“네, 그날도 산에 간다고 안 하고 기도하러 간다 그랬어요. 절에 간다고 했던 거 같아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정원은 내게 무언가를 기도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정원은 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삶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약간은 체념하고 수용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즈음 정원은 변화를 겪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언가를 기도한 쪽은 나였다. 정원의 말에 따르면 나는 온갖 것에 대고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달과 별과 바다와 어쩌다 마주친 작은 돌탑 같은 것들에 대고서 나는 이런저런 소망을 빌었다. 정원과 만나던 시기에는 정원과의 행복을 주로 빌었다. 다 옛날이야기다. 정원이 죽은 뒤로는 기도를 안 했으니까.
기환 씨를 내려 준 뒤 나는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잠깐 밖으로 나왔다. 이미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없었다. 달은 보이지 않았고, 짙은 구름이 어둡고 둥근 천체를 감싸고 있었다. 곧 다시 비가 내릴 듯했다. 나는 왼쪽 손목에 걸린 무겁고 둥근 시계 알을 만져 보았다. 차 안의 더운 공기 덕분에 시계는 차갑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 손목을 잡고 아주 오랜만에 잠깐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