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76회 (2022.10.19)
▲ 박선우 소설가가 직접 찍은 시집 사진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박선우라고 합니다. 요즘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공유오피스를 오가며 혼자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공유오피스까지 버스로 일곱 정류장 거리여서 산책 삼아 늘 걸어다니는데요. 덕분에 가을볕이 얼마나 따가운지, 내가 얼마쯤 걸으면 이마에 땀이 맺히는지, 회사에 다닐 적에는 땀 흘리는 게 그리도 싫었는데 지금은 왜 아무렇지 않은지, 몇 주 전에 급히 입원하게 되었다며 문 닫은 베이커리는 왜 아직도 열지를 않는지, 다들 괜찮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날을 보내는 중에 함께 읽고 싶은 시를 두 편 골라보았어요.

💙박선우 소설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여행하는 눈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한 송이 눈은 착각에 가깝다

그것은 빠르게 녹아서 사라진다

다른 눈 한 송이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쉽게 잊힌다

그러나 나는

홀로

여행하는 눈을 봤다

돌 하나가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고

계속

굴러떨어지고

잠들었다 깨어나도 떨어진다

눈이 뒤따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닳아져서

굴러가던 자리가 허물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사면을 따라

완전히 닳기까지

굴러서

떨어져

멀리 가서

가나

 

그러나

눈은 돌에 닿지 않는다

떨어지는 돌을 따라

간다

 

손에 받아서 쥘까

쉬게 해줄까

먹어버릴까

 

몸속으로 눈이 스며든다

한 송이

멈추지 않고 나를 들어

바닥 밑으로 떠나간다

돌을 찾아낼 것 같다

돌을 먹었어야 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릴 텐데요. 그중에서 맨 처음에 떨어지는 눈송이는 누구에게 발견될까 하는 궁금증이 늘 있었습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하리라는 예감 탓이었겠죠. 홀로 낙하하여 바닥에 추락하고 소리 없이 녹아갔을 눈송이는 마치 혼자 태어나 혼자 생을 살고 혼자 죽음을 맞이한 존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물며 단 한 송이만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다른 눈 한 송이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눈송이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이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시인은 그 눈송이를 바라봅니다. 주목하고, 따라갑니다. 그리하여 눈송이가 굴러떨어지는 돌을 뒤따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도무지 닿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눈송이의 운명이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도 그리 녹록한 형편은 아닌 듯합니다. 눈송이가 바란 것은 그저 닳는 것이 아니라 닿는 것뿐이었는데요. 돌이 완전히 닳아 사라지고 난 후에도 돌에게 닿으려는 눈송이의 안간힘이 마지막 연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눈송이의 운명과 별다르지 않은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막간 우.시.사. 소식🤍

★시믈리에 박선우 소설가, 두번째 소설집 『햇빛 기다리기』 출간!★
구독자 님, 오늘의 시믈리에 박선우 소설가의 두번째 소설집 『햇빛 기다리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려요. 아주 따끈따끈합니다! 세계와 사물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밀도 높은 아름다움과 낙관을 발견해내는 작가 박선우의 세계로 구독자 님을 초대합니다.

설령 그 끝이 아득한 나락일지라도,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실감과 절망뿐일지라도……
나는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다.
_본문에서
💗박선우 소설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이 순정한 마음을 알 리 없으리(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오늘 서울에는 첫눈이 내리었어요

쌍판댁에서

훈이 형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언니, 영삼이 언니 코 세웠대

미친년 자존심을 세우라고 해

미끄러졌습니다

그놈의 년 소리 좀 그만해

미친년 날아가는 방귀에 시비야

시절이 그런 시절이 아니야

눈은 쌓여 우리

죽상이 되어

이모 이게 구찌 홀스빗 로퍼야

구차한 인생을 자랑스레 여겼죠

두 손 두 발을 들었습니다

형, 크루아상님 알지?

이년은 술만 취하면 형이래 알지 개말라잖아

죽었대

뭐래

뛰어내렸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갔네

걸렸대 공원 화장실에서 하다가 잡혔대

시대가 어느 시댄데 시대착오적인 년

두 손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형 나는 가끔 이성애자들이 핍박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

거리에서 손도 못 잡고 뽀뽀도 못하고 회사에선 전전긍긍하길

시대를 앞서가자, 우리

형 영삼이 언니랑 크루아상님이랑 레테님이랑 와수리 갔었잖아 직업군인님 만나러

그 오빠 천연끼가 대단했다 혀를 내둘렀다 눈이 쏟아졌다 차가 빠져서 발이 묶여서 처갓집에서 닭을 네 마리나 먹었다 버스는 떠났다 오고 떠났다 그 오빠가 데리고 온 상병이 식이 됐다 일병보단 상병 상병보단 병장 하사는 나가리 중사보단 대위 대위보단 해병대 장례식장에 갔다 온 사람은 있다니

태어나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못 볼 거야 그런 눈은 형 와수리가 왜 와수린 줄 알아

몰라 누울 와 물 수 마을 리

 

형, 그게 벌써 십 년 전이다, 자?

형, 우리도 다됐다 혀가 꼬부라지기 전에 고개부터 고꾸라진다

인생 뭐 있니

살다

간다

구두에 검은 봉지를 씌우고 나와

훈이 형은 타락 벙개에 가고

고객님이 타고 계신 차량은 안전하고 친절한 택시입니다

상훈이 형

오늘 서울에는 큰 눈이 내리었어요

형이 와수리에서

폭설에 파묻혀서 들려주던 남자들에 관해 자주 생각해요

꽃부리 영 수컷 웅 호걸 호 뛰어날 걸

형도 참 겉은 바삭 속은 축축 바텀 인생

그때 형이랑

그 형들이랑 살림을 차렸더라면

형은 꽃 같은 인생, 살아 있었겠죠?

형 저는 이제 홍차장이 되었고

여의도에 살고 있습니다

대출 끼고 도보 출근 가능 삼억팔천

테마파크에서 가짜 자연을 즐기고

대물훈탑의 자위쇼를 봅니다

부모형제는 지긋지긋하고

견미리팩트와 요술세럼을 샀습니다

저는 어째서 이토록 역사적인 인간일까요

현대의 누구도 더는 저를 영웅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똥꼬충들이 설쳐대며 에이즈를 옮기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더러운 에이즈 캐리어

동성애는 정신병이다 정신 바짝 들도록 북한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라

시절이 그런 시절이 아니었더라면

상훈이 형

저는 가끔 본색을 드러내고 싶어요

부부 동반 홈파티

세상에 지들밖에 없는 것들

지 새끼들밖에 모르는 것들

거리낄 것 없는 단란한 식탁 위에

똥 무더기를 쌓아올린 접시를 내가고 싶어요

구리면 구린 의미가 있죠

그러기 위해 저는 하느님을 믿고

양이사, 조부장과 산을 타고

관혼상제를 중히 여기고

연말정산은 제때

자주 흰죽을 먹습니다

맛도 없고 향도 없고

거짓도 없는 부드러운

영혼의 봉변을 기대합니다

말로에는 누구나 비참하여라

주님 메시지

오늘 타락 물 안 좋네

형,

우리는 왜 타락하지 않았을까요?

먼 길 가는데 그 돈밖에 못 보내 미안해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이 시에서도 첫눈이 나옵니다. 그 눈을 바라보며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군가 죽었고, 죽은 이유는 공원 화장실에서 하다 걸린 것이고, 아마도 그로 인한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치 한 송이의 눈처럼요. 시에서는 그러한 일 역시 과거가 됩니다. 십 년이 훌쩍 넘어가고 오늘은 큰 눈이 내립니다. 그동안 화자는 그럴듯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지긋지긋한 염증을 느낍니다. “동성애는 정신병”이라는 도무지 끝나지 않는 혐오의 시절을 견디듯 살아갑니다. “영혼의 봉변을 기대”하며 “말로에는 누구나 비참”하리란 예감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이 시는 종내 “미안해요”라는 한마디를 읊조리기 위해 쓰인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생의 말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잘한 일보다 차마 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죽음에 당도했을 때 저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기를, 아쉬움이 없기를, 부디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김화진 소설가입니다. 유튜브 채널 <민음사TV>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문학 편집자이자 첫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 출간을 앞두고 있는 김화진 소설가가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이 메일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오늘이 수요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을 이것으로 읽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상협 디제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함께 울려퍼져 더욱 반가웠습니다. 해설을 읽으며 더욱 깊이 공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처음엔 시가 너무 어려웠는데 며칠 전엔 시집 코너에서 시집들을 뒤적여볼 정도로 시와 안면을 튼 느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시를 소개해줘서 좋다!!

💬저를 시로 안내해준 이상협 아나운서의 우시사, 기다리고 있었는데 메일로 도착해 무척이나 반가웠어요. 라디오에서 매일 시를 한 편씩 낭독해주시거든요. 덕분에 시를 내 일상으로 끌어와 감상하는 방법도 배워갑니다. 저 또한 코로나 시기, 소중한 사람을 하늘로 떠나보내며 죽음과 삶이 함께라는 걸 더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 이상협 시믈리에의 시를 통한 죽음에 대한 성찰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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