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서 여자에게 반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사랑’은 연인의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계속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정도를 넘어 취향을 송두리째 흔들고, 삶의 태도마저 바꿔버리며, 궁극적으로 앞으로 발자취를 결정 지을지도 모르는, 전 우주적인 일! 과장이라고? 아니다. 미심쩍은 이들을 위해 반 칠십 평생 내가 반해온 여자들이 삶 순간순간의 결정과 정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얼마나 힘이 됐는지 읊어보도록 하겠다.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기 전인 10대 무렵.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2000년 ‘성인식’을 부르던 박지윤의 등장이다. 노스페이스 패딩을 교복보다 자주 입던 내게 양옆이 쫙 트인 스커트를 입고, 번개 맞은 헤어스타일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겼다. 선정적인 가사나 단지 ‘야해 보여서’가 아니다. ‘관능’이라는 것의 개념을 처음으로 골똘히 생각하게 됐으니까. 그때 내 나름대로 정의한 관능의 의미는 ‘날카로움’이었다. 누가 뭐라든 그냥 하는 것, 뾰족하게 안 하던 걸 하는 여자! 이후 나만의 날카로움을 찾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자존감이 흔들리던 때, 확신과 용기를 준 여자들도 있었다. 2003년까지만 해도 나는 내 까무잡잡한 피부를 미워했다. 싸이월드 속 밀가루 색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얼짱’의 기준으로 보이던 때. 주변에서는 까만 피부색을 내 주요 특징으로 기억하고, 친구들은 ‘깜’자가 붙은 모든 단어를 내 별명으로 삼았으니까. 그런 내 피부가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건 이효리 덕분이다. 핑클 활동 때도 까무잡잡한 피부 톤이었으나 핑클의 ‘코디’는 그런 특징을 가리는, 귀엽고 청순한 방향으로 꾸려졌다. 그러나 ‘10 Minutes’ 무대에서 구릿빛 피부와 이를 극대화하는 오렌지 브라운 헤어, 누드 립, 밀리터리 카고 바지까지 2000년대 여성의 취향을 잔뜩 뒤흔드는 모습으로 당당히 등장한 그녀! 그와 일종의 내적 동질감을 갖게 된 나는 성격마저 닮아갔다. 피부를 활짝 드러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옷차림도 과감해졌던 시기. 그러니 최근 <엘르> 인터뷰로 ‘효리 언니’와 마주했을 때 보자마자 ‘폭’ 안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2005년에는 다소 삐딱한 ‘해방’의 여성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정점에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가 있다. 배우 스스로 ‘산소 같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여성들의 ‘친절한’ 얼굴을 재정의한 사건. 내가 ‘빨강’에 이토록 열광한 적 있었던가? 친절해 보일까 봐 빨갛게 칠한 눈 화장으로 복수 길에 나서는 모습은 꼭 감옥이 아닌 아닌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간 한국영화사에 ‘킬러’와 같은 캐릭터성 혹은 ‘팜므 파탈’로 일컬어지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전형적이지 않았나. 붉은 아이섀도와 붉은 립 또한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전술 도구인 양 그려졌지만 금자 씨의 레드는 순전히 자신을, 자신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기에 나는 그녀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대쪽 같던 생각을 변화시킨 여자도 있다. ‘헤이 모두들 안녕! 내가 누군지 아니?’ 바로 그 이하늬다. 2007년, 미스 유니버스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하늬의 모습은 미인대회를 바라보는 내 편견조차 뒤흔든 미인 그 자체였다! 그간 미인대회 참가자들 대다수가 ‘얌전하고 순종적인’ 방식으로 구축해 온 이미지를 시원한 미소와 구릿빛 피부, 탄탄한 몸으로 전복시켰으니 말이다. “코리아!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전 세계에 장구 소리를 전파한 그의 얼굴에서는 후광마저 비쳤다. 이후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극한직업>에서 볼살을 못생기게 털던 그 얼굴에서 느낀 아름다움은 또 한번 생경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선을 역전시키는 여자만의 아름다움 말이다.
고백하건대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배우 한소희다.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탓에 강력한 미모를 지닌 신예 배우의 등장을 목도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녀는 어딘지 좀 달랐다. 특히 <부부의 세계>로 세간의 호기심을 한 몸에 받던 시절에 보여준 의연함.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그녀가 과거 담배를 물고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거나, 양쪽 팔을 휘감은 타투 사진이 화제였다. 혹자는 이를 ‘논란’으로 만들고 싶었겠지만 한소희에게 타격감은 ‘제로’였다. 되려 남성 스타들이 같은 무드의 사진을 선보였을 때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는 행태에 견줘 ‘타투와 담배 사진이 여성 스타들에게만 논란이 되는 건 차별’이라는 여론을 이끌어낸, 작품 밖에서도 유의미한 담화를 만들어내는 최강의 존재감! 특히 최근 방탄소년단 정국의 솔로곡 ‘Seven’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얼굴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간 국내 가요 뮤직비디오에서 ‘여친 룩’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어딘지 창백하고 남성 주인공보다 터프하며 ‘그런지’한 모습은 K팝이 세계적 흐름을 맞은 이때, 새로운 명장면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한소희도, 이하늬도, 금자 씨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한 내 마음은 한 방울씩 단단하게 응축돼 지금 내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사랑하는 나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겐 시시하거나 ‘그래서 어쩌라고?’ 싶을 정도로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여성은 여성들의 등불이 된다는 것. 그러니 여성들이여, 우리 모두 오늘도 용감하게 누군가를 '홀딱' 빠트려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