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보이는 쓰레기일지라도 이 브랜드의 로고가 붙으면 너도나도 열광합니다. 그 이름하여 ‘발렌시아가(Balencaga)’, 고작 영어 단어 하나지만  이것이 품고 있는 애티튜드는 절대 무시 못 하기 때문이죠.

기하학적인 재단, 과감한 실루엣, 대담한 색상과 소재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미래를 엿보고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브랜드입니다. 누군가는 어렵다고 손사래를 칠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발렌시아가의 이런 도발적이고 마이너스러운 행보엔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 오늘 EGOZINE을 보면 깨닫게 될 겁니다. 옷과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렌시아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페인 출신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1937년에 런칭한 브랜드, ‘발렌시아가(Balenciaga)’. 현재는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에 의해 관습을 탈피한 비전으로 실험적인 디자인의 옷들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가장 큰 특징은 스트리트 웨어와 하이 패션의 혼합. 발렌시아가의 옷들은 어떻게 보면 로고 하나 여유롭게 들어 들어가 있는 고급스러운 클래식이지만, 어떤 면으로는 스포티하고  캐주얼하여 언제 어디서 입어도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가위의 마술사’, ‘디자이너의 디자이너’라고 불리며 1950년대 패션계에 큰 획을 그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hristobal balenciaga).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데요.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은 그를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 바스크 해안의 게타리아(Guetary)에서 태어난 발렌시아가는 16세에 꾸뛰르 아틀리에를 개설할 정도로 패션 감각이 뛰어났는데요. 1937년 스페인 내전으로 이주한 파리에서는 자신의 살롱을 열었어요. 당시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완벽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품질이 완벽한 맞춤옷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디자인 스케치에서 패턴, 재단, 재봉까지 전 과정을 그가 직접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모국인 스페인의 전통과 색상, 로마 가톨릭교회의 의례 등에 엘레강스, 호화로움 등 프랑스적 감성이 더해진 맞춤 드레스를 제작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드레스메이커이다. 발렌시아가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등장은 다른 여성들의 존재감을 무력하게 만든다.

(다이애나 브릴랜드, 1960)”

동시대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올이 낭만을 담은 로맨틱 무드를 지향한 것에 비해, 발렌시아가는 심플함과 모던함을 지향했습니다. 그가 만드는 옷의 대부분은 단순한 라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필요한 디테일이 없었지요. 기하학적 구조미와 추상적인 입체감을 기반으로 발렌시아가는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재킷 뒷부분에 넉넉하게 여유를 준 ‘세미 피티드 재킷 (Semi Fitted Jacket)’, 가느다란 팔과 팔찌를 돋보이게 하는 7부의 ‘브레이슬릿 소매 (Bracelet Sleeves)’, 편하게 허리선을 없앤 ‘튜닉 드레스 (Tunic Dress)’와 누에고치 모양으로 볼록한 ‘코쿤 코트 (Cocoon Coat)’ 등은 전형적인 옷의 형태를 깨뜨리는 발렌시아가의 패션 실험으로 태어난 역사적인 결과물이었죠.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점차 맞춤복보다 기성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옷을 사 입지 않으려고 했지요. 이는 장인의 마음으로 의상을 다루던 발렌시아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였습니다. 더 이상 우아한 꾸뛰르를 위한 시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에 낙담한 발렌시아가는 결국 1968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1971년 코코 샤넬(Coco Chanel)의 장례식에 모습을 보인 후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지금 패션 뉴스를 보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임명했다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단순히 ‘디자이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반적인 디자인 방향성을 넘어서 광고와 매장 인테리어 등 브랜드 이미지 자체를 완벽하게 바꿀 수 있는 존재이죠. 그래서 낡은 이미지로 쇠퇴해가는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선,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필요합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없는 ‘발렌시아가’에도 그런 사람이 필요했어요. 발렌시아가는 총 세 번의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 ‘알렉산더 왕’, 그리고 ‘뎀나 바잘리아’에 의해서요.

" Nicolas Ghesquière "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죽음 이후 숨이 죽어버린 브랜드를 살린 건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였습니다. 프랑스의 젊은 디자이너인 그는 1996년에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었어요. 26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침착하게 발렌시아가라는 브랜드를 재정비해갑니다.

니콜라스는 발렌시아가만의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 실루엣’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했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 베트윙 톱, 페전트 드레스 등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전통을 아주 세련되게 발전시키는 데 힘썼어요. 발렌시아가 특유의 풍성한 볼륨 탑을 달라붙는 스키니 팬츠와 매치하거나, 점프수트에 퍼프소매를 연결하는 등 ‘파리처럼 시크한'디자인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보그 USA 와 안나 윈투어 편집장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케이트 모스, 클로에 셰비니들까지 그의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5년 동안 발렌시아가를 훌륭하게 이끌던 게스키에르는 2012년에 아쉽게도 루이비통으로 떠나지요.

" Alexander Wang "

니콜라 게스키에르가 떠나게 되면서 발렌시아가는 하우스의 공백을 채워줄 또 다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기 시작했는데요. 다음 주인공은 바로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은 도회적이고 시크한 디자인으로 뉴욕 패션계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디자이너였지요. 그와 함께 한 발렌시아가는 역시나 현대적이고 트렌디한 모습으로 변모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어요. 혁신적인 아방가르드 디자인을 추구했던 기존 발렌시아가의 정신과는 현저히 멀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결국 알렉산더 왕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발렌시아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 Demna Gvasalia "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떠난 뒤로 계속해서 흔들리던 발렌시아가를 다시 쇄신한 건, 지금의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였습니다. 발렌시아가 입장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모험을 감행한 건데요. 왜냐하면 뎀나 바잘리아는 스트리트 스타일의 패션 브랜드, '베트멍(Vetments)’을 이끌고 있던 신진 디자이너였기 때문입니다. 베트멍의 옷들을 보면 매우 캐주얼한 스트릿 스타일인데요. 발렌시아가는 베트멍이 가지고 있는 은근한 창의성, 그리고 실험적인 모습에 주목했어요. 그들은 뎀나 바잘리아에게 발렌시아가만의 감성을 되찾아 줄 것을 요구했지요.

그가 진행한 첫 번째 컬렉션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도, 니콜라 제스키에르도, 알렉산더 왕도 없었습니다. 오직 뎀나 바잘리아식 발렌시아가만이 존재했어요. 뎀나 바잘리아는 해체주의적인 스트리트 패션을 발렌시아가라는 궁극의 하이패션과 접합해버렸습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기뻐할 만한 과감한 재단의 아방가르드 수트, 코트들은 스포티한 스트리트 아이템과 믹스된 채 등장했어요. 자신의 개성과 하우스의 유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디자인이었죠.

발렌시아가의 로고가 거대하게 박힌 후드 티셔츠나 모자, 스포츠웨어. 뎀나 바잘리아의 철학이 담긴 아이템은 나오는 즉시 대 히트를 기록하며 품절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게스키에르가 핸드백(시티백)으로 인기를 모았듯 바잘리아 역시 핫 아이템이 있었는데요. 다들 아실 겁니다. 양말처럼 발목을 감싸는 '스피드 트레이너(Speed Trainger)', ‘바자백', '에브리데이백'과 독창적인 면 분할이 돋보이는 어글리 슈즈 '트리플 S(Triple S)' 까지. 스트릿과 럭셔리라는 모든 키워드를 어우르게 된 발렌시아가에게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이유죠. 고급스럽고도 강직하며, 재미있으니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스트릿과 오트 꾸뛰르'의 균형을 제안하는 디자인.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열광하는, 뎀나 바잘리아가 창조해낸 발렌시아가 감성인데요.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오랜 전통성을 유지하되 자신만의 개성과 동시대적인 터치를 가미한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결국 본질은 크리스토퍼 발렌시아가 스타일이에요. 우아하고 건축적인 실루엣. 뎀나 바잘리아는 기하학적인 실루엣에, 자신이 선호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디테일을 불어 넣습니다. 소재도 특이해요. 혁신적인 테크니컬 원단만을 사용하지요. 가령 케이블 블 니트스웨터를 메탈릭 원사나 알루미늄 체인으로 만들거나, 악어 가죽 대신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설계한 원단을 수천 시간에 이르는 수작업을 거쳐 구현하기도.

발렌시아가는 매 컬렉션마다 패션의 관습을 깨는 걸로 또 유명한데요. 올해 S/S 컬렉션도 아주 재밌었어요. 발렌시아가는 패션쇼 대신 레드카펫에서 컬렉션을 공개한 뒤, 뜬금없이 심슨과 협업한 애니메이션을 상영한 거죠. 1년간 준비했던 심슨과의 협업은 10분짜리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결과로 보였습니다.

만화의 내용은 심슨의 사랑과 마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한 뎀나 바잘리아가 스프링필드 주민들을 초대하여 패션쇼 모델로 서게 한다는 스토리였어요. 종종 패션 산업을 비판했던  뎀나 바잘리아의 일관된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패션계를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죠.

2022 SS 구찌-발렌시아가 협업도 재미있는데요. 둘은 ‘해커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발렌시아가가 구찌를 해킹했어요!”라는 위트 있는 메시지로 패션계 내에서 진정성과 모방 및 도용에 대한 탐구를 이뤄냈습니다. 구찌 특유의 더블 G 문양 대신 발렌시아가의 글자인 B로 로고를 달거나, ‘This is not a Gucci bag(이건 구찌 백이 아니다)’ 문구가 적혀있는 가방을 선보이는 식이었죠. 구찌의 로고 플레이와 발렌시아가의 위트가 더해진, 아이코닉하고도 새로운 컬렉션이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적이 없죠. 이번 22 FW 패션쇼만 해도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보호 유리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쇼장이라니! 심지어 쇼장 안에는 눈보라가 끊임없이 휘몰아쳤는데요. 모델들은 눈보라 속에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가 뒤섞여 있었던 것. 뎀나 바잘리아는 이번 쇼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보내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이번 시즌을 통해 ‘친환경’에 한 발짝 다가선 듯합니다. 쓰레기봉투를 연상케 하는 트래시 파우치가 이번 시즌의 시그니처 아이템. 여기다 테이프로 칭칭 둘러싼 보디슈트가 함께하니 이번 시즌 메시지가 더욱 빛을 발하는 느낌인데요. 몸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보디수트는 실루엣을 중시하는 발렌시아가의 아이덴티티를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매끄럽게 잘 구성된 실루엣은, 어떤 아이템이든 200% 고급스러워 보이게 해줍니다. 블랙으로 통일한 룩에서는 특이나 이런 새로운 방식의 피트가 중요해요.

발렌시아가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액세서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슈즈와 재킷, 그리고 백을 오버사이징으로 재탄생 시켰어요. 이번 시즌 트렌드임을 증명하듯, 한껏 올라간 파워 숄더가 오버사이즈 아이템들과 맞물려 더욱 진가를 발하고 있습니다.

겨울의 거센 추위를 막아줄 고급스러운 퍼 코트에 발렌시아가 감성이 씌워졌습니다. 모든 룩에 함께하는 버그 아이 선글라스로요. 그리고 퍼 코트에 가죽 벨트라는 뻔한 공식을 따르는 대신, 포장 테이프를 활용해서 발렌시아가만의 재미를 더한 모습. 랩 코트나 배기 팬트의 벨트 역할을 톡톡히 해냈어요.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제가 제 패션 옷장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느낌이 들어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쿠튀르를 만들기 전까지는 저는 그저 그림자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뎀나 바잘리아,  2022 WWD).”

자, 어떠셨나요. 발렌시아가의 역사는 많은 디자이너들, 그리고 긴 세월을 지나 현재는 뎀나 바잘리아를 통해 또한번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80여 년 넘게 잠들어 있던 발렌시아가가 그의 손을 통해 오트 쿠튀르로 어떻게 색다르게 변모할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시길. 장담컨대 곧 이 브랜드에 푹 빠지게 될 겁니다. 어느새 발렌시아가의 패션쇼를 챙겨보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거에요. 저도 그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