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맑스의 기계론에서 자본이 기계류를 사용하는 세 가지 조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세 조건은 71쪽)
1) 노동자가 자신의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해 쓸 수 있게 한다.
2) 노동자가 자기 시간의 더 많은 부분을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다.
3) 노동자가 타자를 위해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기계 사용은 자본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갖다 바치는 수단으로 규정됩니다.
최근 우리는 기계화가 노동시간을 절약하여 실업을 양산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것(4차산업혁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맑스의 이러한 생각이 우리 현실과 대립하는 것일까요?
ㅂ) 표면적으로 보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노동자가 자신의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해 쓸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키오스크는 종업원의 임노동을 고객의 무상노동으로 전환하는 장치. 라는 이야기를 지난 열린세미나 시간에도 했던 것 같아요.
ㅈ) 비고용노동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맑스가 비고용노동의 노동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자본론에서 기계사용의 조건은 기계의 사용에 의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 노동의 사용에 의해 그럴 수 있는가가 초점이었는데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는 기계 사용이 더 많은 노동시간의 착취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또 자본론에서는 기계의 채택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력하게 만드는 투쟁수단이라는 점도 강조되는데 여기에서 그 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ㅂ) 저도 궁금해요, 맑스가 공장 밖 노동과 공장 안 노동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동' '노동자' 등을 언급할 때 꼭 공장 안 노동자에만 국한하지 않은 여러 맥락들이 있고, 따라서 위 구절도 광의의 노동으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ㅈ) 비고용노동, 비임금노동이 역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ㄱ) 이 책을 편집한 가속주의자들이 맑스의 글을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ㅂ) 맑스의 글을 가속주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 같아요, 1부의 첫 글!
ㅈ) 71쪽 끝에는 자본이 어쨌건 기계화를 하게 되면 “어느 특정한 물건 한 개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최소한도로 줄어든다”라는 것과 이것이 “인간노동,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도로 줄인다”라는 것(72)을 강조하면서 이 과정이 노동해방의 조건을 창출한다고 씁니다. 즉 기계화의 가속이 노동해방의 전제이고 조건이라는 생각에 가속주의적 사고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 책의 첫머리를 맑스의 글로 시작했다고 봅니다.
ㄱ) 감사합니다. 서론으로 돌아가보니 엮은이들이 맑스의 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개인들은 새로운 기계문화에 편입되며, 그리하여 그 세계에 적절한 사유의 습관과 패턴을 갖추게 되기에 사회적 존재자로서 불가역적으로 재주체화된다" (20쪽)
ㅈ) 노동을 인간의 활동으로만 보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노동의 범주를 기계노동, 동물노동 등으로 확대하는 견해가 부상하고 있는데(<임상노동>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맑스에게서는 그런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 것 같고 사무엘 버틀러에게서는 그런 관점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ㄱ) 그런 것 같습니다. 서론에서 엮은이들도 버틀러의 '범기계주의'가 인간의 노동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맑스가 매료되면서도 자본의 환상이라고 비난해야 했던 인간과 기계의 통합에 부합하는 버틀러의 시각, 즉 나중에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영감을 제공할 범기계주의는 인간의 노동에 어떤 특별한 자연적이거나 원초적인 특권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20쪽)
ㅂ) 맑스에게서 기계노동으로 노동의 범주 확대가 가로막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ㄱ) 맑스는 범기계주의라고 할 수 있을 관점('모든 것이 기계다'일까요?)이 자본의 환상이라고 보았고 버틀러와 들뢰즈 과타리는 범기계주의를 비인간으로 확장했다는 것이 엮은이들의 해석일까요?
ㅈ) 맑스 당시의 정치경제학 논쟁에서 가치생산의 원천이 무엇이냐가 계급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는데 맑스는 기계에서 가치원천을 찾는 산업자본가, 토지에서 가치원천을 찾는 지주 및 농업자본가와 투쟁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가치원천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그러한 견해들과 구분되는 독자적 노동가치론을 확립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부의 원천과 가치의 원천을 구별하는 문제일 텐데 맑스는 토지와 기계가 부를 생산하지만(즉 부의 원천으로 기능하지만)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여기서 가치는 교환가치)
사회를 인간사회로 상정하는 한에서 맑스의 이 구별을 비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맑스의 시각에서 동물, 기계, 토지는 그 자체로 인간과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니며 인간과 동등한 교환관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에 대한 실증적 서술로서 맑스가 그리는 사회가 그러한 시각에 제한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통한 사회로서 인간중심적이지만 맑스가 상상하는 코뮤니즘 사회는 교환관계가 중심에 놓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이고 여기서 동식물, 기계, 자연은 인간과 교환관계를 떠나 협력 관계를 맺는 것으로 위치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ㅂ) 설명 감사합니다. 맑스도 기계를 주목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이 자본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게 하는 매개체, 즉 생산수단으로써의 기계를 말하는 것 같아요, 인간노동과 기계‘노동’의 차이가 맑스에게서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노동가치론 분석은 넘어서야 할 현실(자본주의적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쟁점은 자본의 가치법칙을 얼마나 잘 밝혀내는가이고요) 현실을 넘어서는 전망과 관련해서는 노동가치론에서의 노동, 즉 인간과 기계 노동의 구분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ㅈ) 노동가치론(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가치론)을 자본주의 비판의 가치론으로 한정하고 76-77쪽에 나오는 가처분시간가치론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사회의 가치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뮤얼 버틀러는 이런 다른 가치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간-기계 연합체론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기계 관계론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버틀러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ㅂ) 네, 오히려 현실이 그렇다는 환상을 줄 수도 있고, 이는 맑스의 말처럼 경계해야 할 지점 같습니다. 기계가 자본의 기관인 한에서 인간과 기계의 통합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또 그렇기에 인간과 기계의 통합이 자본을 넘어서는 한 방편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ㅈ) 네. “기계 없는 인간은 멸종할 것, 반면 인간 없이 기계도 존립이 어렵다.”라는 생각이 매우 중요한 지점을 언급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가치관계는 그보다 한층 복잡한 관계를 인간-기계 속으로 도입하며 인간을 계급화하는데 그 점은 버틀러의 관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