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의 ‘문화비축기지’입니다. 석유를 비축하던 5개의 탱크가 문화 예술의 기지가 되었다는 것이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석유탱크라는 단어로 상상할 수 있는 사이즈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의 개념으로 상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건설된 5개의 탱크는 당시 서울시민 한 달 소비량에 달하는 석유를 보관할 수 있었던 제법 몸집 큰 공간입니다. 30여 년간 운영되다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폐쇄되어 10년 넘게 방치되었던 이 공간은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문화예술공간으로의 변신이 결정됩니다. 석유 대신 문화를 비축하게 된 이 공간은 시민들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를 잡습니다.

 휘발유를 보관하던 탱크를 해체하고 유리 벽과 지붕을 얹어 만들어진 파빌리온(T1)은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베스트 포토존 역할을 합니다.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과 탱크 주변을 둘러싼 자연이 이색적으로 어우러진 파빌리온은 패션쇼, 광고 등과 같이 특색 있는 전시나 공연 등에도 적합한 장소입니다. 탱크를 해체하여 외형 없이 개방해 둔 공연장(T2)과 반대로 석유 비축 당시의 원형을 보존한 탱크 원형(T3)은 각각의 용도 외에도 석유비축기지의 역사와 현재를 대비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거대한 철제 외벽과 파이프를 그대로 살려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형시킨 등유 보관 탱크였던 T4에서는 공간을 십분 활용한 공감각적 전시로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또 다른 전시공간 이야기관(T5)에서는 석유비축기지 시절의 역사와 함께 문화비축기지가 되기까지의 타임라인을 전시하여 문화비축기지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센터는 이름 그대로 커뮤니티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시민들이 다양하게 활용하고 쉬어 갈 수 있는 카페테리아와 생태 도서관 ‘에코 라운지’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SNS에 태그 된 기록만 봐도 셋 중 가장 늦게 개관한 빛의 벙커는 현재 127,446개의 게시물에 태그 되어 있지만, 부천아트벙커 2,448개, 문화비축기지 35,642개로 관심도가 현저히 낮음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B39와 문화비축기지 모두 그 역사적 가치를 품은 지역 문화공간으로의 역할은 해내고 있지만, 패션쇼나 큰 전시 등과 같이 1년에 몇 번 없는 행사가 있지 않고는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또 어떻게 알고 공간에 방문했다 하더라도 막상 진행 중인 전시나 행사가 전혀 없어 방문객이 외관만 둘러보고 갈 수밖에 없는 일이 부지기수라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전시나 문화 행사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공식 사이트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고, 일부는 블로그 게시글 정도로 행사 정보를 찾아야 하는 불편함도 개선 시 입객에 크게 도움 될 부분입니다. 

위에 소개한 장소들은 모두 기존 공간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공간을 재생시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각장이었던 특성 때문에 만들어진 39m 벙커가 예상치 못하게 예술과 만나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광활한 자연 속에 구축되었던 다섯 개의 석유 저장 공간이 각기 다른 문화적 용도로 활용되며, 한줌 빛도 들어오지 않던 숨은 공간에 갖은 예술 작품을 빛으로 뿜어내는 등 일반 건축물은 가질 수 없는 공간의 서사를 기반으로 각각의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국내 여행지, 국내의 특색 있는 공간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여행의 묘미를 발견한 사람도 많고, 코로나가 끝나도 국내 여행을 더 선호할 것 같다는 의견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새로 생긴 카페나 편집숍, 전시 공간들은 쾌적하고 편리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재생 공간들은 어떤 용도를 가지고 설계된 건축물에서 찾을 수 없는 공간의 의외성과 평소 접할 수 없었던 건축물의 내부를 엿보는 생경한 경험, 공간 본연의 특성을 활용하여 새로운 의의를 찾아내는 재미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습니다. 과거를 간직한 채 재생된 아트 벙커, 문화 기지 등의 이름을 가진 공간들이 더 많은 문화 예술 콘텐츠를 담아내고,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대표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단순히 지역의 문화 중심지가 아닌 코로나가 끝난 뒤 세계에서 찾는 문화 관광지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