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시.사 레터 23회 (2021.09.29.)

<우리는 시를 사랑해>의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유튜브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고 라이브로 이야기를 나누는 김사슴입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대체로 세상에 대고 혼자 말하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요. 드물지만, 듣고 대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혼자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적이 흐를 때도 잦은데요, 그때는 조금 외롭습니다. , 합쳐보면 제 일은 대답 없을 것을 각오하고 대화하기,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일하지 않을 때에도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요. 혼자가 아니라고도 할 수가 있겠더라고요. 카페의 사장님들, 말은 섞지 않더라도 같은 장소에 머물렀던 손님들, 거리의 행인들, 글 속에, 영화 속에 있는 누군가가 항상 함께였으니까요.
 
제가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도와준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1인 가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니까 여기에도 저와 비슷한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유튜버 김사슴이 사랑한 첫번째 시💌

터미널 카페(심재휘,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여름의 긴 어스름을 제대로 읽지를 못하여
눈이 아픈 그 격문을 낮의 가장자리에 붙여놓고서도
제 곁의 어둠을 쉽게 예감하지 못하는 칠월의 저녁
책을 들고 사람 가득한 터미널 카페로 간다
 
이곳을 떠나거나 그곳으로 돌아가거나
몇 개의 달, 몇 척의 목선, 몇 그루의 기다림이 얼비치는 입술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그날들 가질 수 없는 것들,
온통 알 수 없는 언성만으로 만선을 이루는 터미널 카페
그래도 그물의 멸치떼처럼 재재거리는 소리가 머리끝까지 덮을 만해서
비늘을 다친 날에는 숨어들기 좋은 곳 터미널 카페
 
하지만 차표대로 하나둘 사투리를 챙겨 떠나고 나면
채워지지 않는 자리마다 어둠이 차올라 예정대로 막차가 온다
차표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이에게
달그락거리는 제 커피잔 소리에도 놀라는 시간이 온다
쓰레기통에는 냅킨에 휘갈겨 쓴 낙서들이 있고
아무리 눌러쓴다고 한들 유리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는다 그런 귀가가 있다
아무 할 일 없이 늦은 저녁에 일어난 하루가 있었습니다. 커튼을 걷어 창밖을 올려다보니 우중충한 회색 하늘이 보이고 주어진 일도 힘도 없는데 어디라도 가고 싶고 무엇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내려본 적 없는 역에서 내려야겠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남부터미널이었죠.
 
남부터미널은 근처의 휘황찬란한 센트럴시티와는 달리 규모가 작고 낡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요. 토스트와 꼬치 어묵을 사 먹고 차표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채로 긴 의자에 앉아 떠나거나 돌아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외로워지기는커녕 점차 편안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멸치떼처럼 재재거리는소음 속에서 저는 문득 알게 되었어요. 나는 사실 누구를 잃어버렸고,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사람은 나라는 것을요.
 
여러분도 기다릴 사람이 전혀 없는 하루가 있다면 자기를 마중하러 터미널에 가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은 어느 누구의 장소도 아니고, 아무도 그 누구가 아니니까요. 어차피 모두가 흘러가는 곳인데, “달그락거리는 제 커피잔 소리에 좀 놀라면 어때요.
 
그래도 아무도 오지 않는 기분이 든다면……
💘 막간 우.시.사 소식: 김유태 시인의 미니 인터뷰 최초 공개!
문학동네시인선161 『그 일 말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출간!
관념의 영역을 넘어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물질세계에 들끓고 있는 언어의 박동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김유태의 시집은 고유의 욕망과 육체를 지닌, 죽음을 모르는 말들이 도사리고 있는 소요의 장입니다.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에서 위태로운 활력과 에너지로 끓어넘치는 시를 만나보세요!
유튜버 김사슴이 사랑한 두번째 시💌

일어나지 않는 일(정영효, 『계속 열리는 믿음』)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고
기분과 눈빛을 함께 이야기하려고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태어났으면 좋을 사람과 사귀면 건강해지고
가지 못하는 나라의 소식을 듣는 게 오히려 경험적이다
오 분을 먼저 걱정할 때마다 오 분간만 해야 하는 생각
우연히 마주쳤는데 마주치지 않더라도 생기는 일
그런 상황이 나타나는 곳에서 멈춰야 할 순간이 생긴다
하나쯤 붙잡고 싶은 의지라는 것
졸음이 묶인 개의 꼬리를 풀어주고
정오에 들리는 종소리가 누군가를 신실하게 만들듯
가까이할수록 멀리서 진실이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를 바라보며 떨어진 과거를 찾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란 쉽지 않다
유일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다만 당장을 불러보면서
이제부터 끝으로 밀려나는 세계를 믿고
문을 잠근 채 누워 있는 너를 친구로 여기고
꿈을 가진 자의 속물을 감춰주는
그런 상황을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나에 대해서만 말하는
일어나지 않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는 것 또한 방법일지도요
김사슴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소개합니다★

유튜버 사슴님과 함께 책 읽고 이야기 나눠요! 
각양각색의 책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독서하는 멋진 경험을 해보세요:-)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이제니 시인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이제니 시인입니다. 시를 만나게 될 때 이전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시인, 이제니 시인이 추천하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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