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써티랩 연구원들은 첫 번째 써티공방을 열었습니다. 써티공방은 써티즈의 다양한 대화와 삶을 뚝딱뚝딱 만들어 가는 공론장인데요! 개인의 작은 고민이 소중한 재료가 되어 사회의 작은 해답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랍니다. 써티공방의 첫 번째 재료는 '내 인생의 얼굴이 되는 모든 것'이었어요. 회사, 집, 학교, 연애, 자산은 때론 나를 말하는 얼굴이 되기도 하죠. 세상이 정한 표준의 얼굴만을 좇고 있진 않은지, 다양한 얼굴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고민하기 위해 써티랩 연구원들과 써티즈가 함께 모였습니다.

첫 번째 써티공방의 주제 선정은 이 두 개의 영상☝️, ✌️에서 시작됐어요. 각 영상에는 94년생 여자와 92년생 남자들이 모여 외모, 연애, 학력, 자산 등 여러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과연 이 세대의 표준에 부합한 사람인지 고민하죠. '나정도면 표준이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나는 표준 이하가 되기도, 그 이상이 되기도 합니다. 대체 우리 나이의 표준은 어느정도인지, 한국사회의 표준은 누가 정하는지 더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써티즈 아이린님, 연우님과 써티랩 연구원들은 낯선 얼굴을 마주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써티공방에서 나눈 이야기들로 아이린님, 연우님이 직접 쓴 글까지 기대해 주세요😉

🐶더기: 결국엔 미디어나 사회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소외없이 다양한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문득 예전에 베르가 말한 ‘둘레세계’ 개념이 어렴풋이 생각났어요. 자세히 어떤 내용이었죠?

📚베르: 아, 동물학자 폰 윅스킬이라는 사람이 진드기를 연구할 때 ‘둘레세계’ 개념을 제시한 건데요. 진드기는 자기만의 둘레세계에서 살아간다고 해요. 진드기의 둘레세계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기다리기, 점프하기, 피 빨아먹기 이 세 가지 뿐이라서 다른 능력은 자기 둘레세계에서는 필요하지 않대요. 근데 우리 인간에게도 둘레세계가 있잖아요. 다만 진드기랑 우리랑 다른 점은 우리한텐 둘레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요. 개인은 하나의 세계이니까 다른 둘레세계와 교류하고 존중한다는 건 자기만의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셈이겠죠. 

🦫비버: ‘표준으로 사는 게 정답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상이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오히려 다양한 군상이 모여 또 다른 표준을 만들 수도 있고요. 둘레 세계를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게 돼요. 그 중 한가지 방법은 완전한 타인을 만나는 경험, 나의 둘레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주디스 버틀러의 책 ‘비폭력의 힘’에 따르면 ‘우리’는 곧 ‘내가 생각하는 평균’인데 그 우리 안에 장애인, 노숙자, 성소수자도 포함되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겠죠. 비폭력적이려면 평등이라는 가치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의 범위가 넓어져야 해요.

🦫비버: 저는 몇 년간 프리랜서로 일해왔는데 정부에서 인정하는 프리랜서의 기준에 들어가기 어려워요. 같은 프리랜서라도 분야마다 하는 일이 다 다를텐데 지원을 받으려면 책을 썼는지, 특정한 활동을 했는지 등 정부에서 정의한 아주 좁은 기준 안에서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게 아쉬웠어요.

🌿아이린: 저도 예술인재단에 등록해보려고 하니 기준에 안 맞았어요. 신청기간으로부터 3년 내에 쓴 곡이나 앨범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국가가 원하는 기준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 명함, 프로필이 되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거죠.

🦫비버: 다양한 기준을 인식하지 못한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더기: 지원정책이나 사업을 기획할 때도 지원대상과 범위를 선정하는 건 물론 현실적인 예산과 인력을 고려해야 하지만 지원주체에 대한 문제의식과 관심이 어느 정도이냐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주체들이 협력해서 알아차리는 일’인 것 같아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에 중요한 건 안 받아도 될 사람은 못 받게 하자가 아니라 지원대상이 얼마나 다양한지 수많은 기준들을 알아차려서 받을 사람은 받게 하자가 우선이고 그게 복지의 둘레세계 아닐까 생각해요.

얼굴. 얼굴이라고 하니, 딱 떠오르는 문장이 있네요. ‘OOO의 얼굴’과 같은 표현이에요. 우리는 이 표현을 어떤 분야나 집단을 대표할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피겨의 얼굴’이라고 하면, 지금은 은퇴한 김연아 선수가 떠오릅니다. ‘한국 축구의 얼굴’은 박지성 선수나 손흥민 선수가 있겠어요. 이처럼 앞에 쓰인 집단의 위상이나 평판을 드높이는 긍정적인 뜻으로 쓰입니다. ‘도박장의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처럼요.

역사 속에서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얼굴’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제 머릿속에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떠올라요. 그럼 고려 시대는요? 태조왕건이나 공민왕이죠. 통일신라의 장보고,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도 있어요. 그렇다면 반대로 ‘일제강점기의 얼굴’이 있나요? 물론 많은 선진들이 떠오릅니다만,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이 있습니다. 식민지 국민은 식민지의 얼굴이 될 수 없으니까요.

첫 번째, 식민지 국민은 자신의 나라를 ‘감히’ 대표할 수 없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성적이 우수한 일본 국적 마라톤 선수가 두 명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였습니다. 일본인 위주로 국가대표를 선발하려고 했던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국가대표가 되어 각각 금메달, 동메달을 땄습니다. 해방 이후 손기정 선수는 ‘기테이 손’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정정했지만, 남승룡 선수를 포함한 조선 선수들이 아직까지도 IOC 수상 명단에 일본식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78년이 지났지만 많은 선수들이 조국의 얼굴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실은 ‘일제강점기의 얼굴’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표현은 앞에 쓰인 집단의 위상을 드높이는 분들께 사용됩니다. 유관순, 안중근, 김구, 윤봉길 등의 선진들은 ‘일제강점기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이분들은 일제 강점 정책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분들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면 일제 강점에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쓰고 싶은 이름들이 많지만 굳이 한 명만 쓰자면 을사오적 이완용이 있겠어요. 이 사람을 아픈 우리 역사의 ‘얼굴’로 쓰고 싶나요? 그렇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추악한 얼굴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흔적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이 있어요. 이완용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중 대부분을 국가에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에요.

식민지를 대표하는 얼굴은 없어요. 빼앗겨버린 우리 조선인들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은 되찾아야 하고, 나라를 팔아먹고 오만하게 조선의 대표자가 되었던 친일 권력자들의 얼굴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해요. 식민지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 아는, 21세기 한국의 얼굴은 바로 당신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