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의 시대’가 온 이래로, 그러니까 인문사회 편집자로서도 에세이라는 형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게 되면서부터 줄곧 던져온 질문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 (편집자인 나는 저자에게 어디까지 써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는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의 침해가 발생합니다. 에세이든 다큐멘터리든 이런 ‘침해’를 감수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면, 그 윤리적 선은 어디까지일까?

레슬리 제이미슨은 동시대의 가장 주목받는 에세이스트인 동시에, 에세이를 쓸 때의 이런 질문들에 집요하게 천착해온 작가입니다.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는 타인의 삶을 쓰는 일에 관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쓰는 일에 관해 제이미슨이 던져온 질문들이 꽉꽉 눌러 담겨 있는 책입니다.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가 던지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기에 적합한 책들을 가져왔습니다.—편집자 Y

레슬리 제이미슨을 수식하는 표현 중 하나는 ‘동시대의 수전 손택’입니다. 보통 이런 표현은 책 판매를 위한 홍보 문구라고 여겨지고,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이번 책을 만들면서 저는 정말로 손택을 자주 떠올렸던 것 같아요. 아주 지적이고 열정적인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미슨이 추구하는 바가 손택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요.

 

“사람들을 재현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을 축소하는 일이며,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이런 축소와 불편한 휴전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심 이런 압축에 반발했다. 내심 이 말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이게 다가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니라고, 이게 다가 아니라니까. 내가 종종 의뢰받은 분량보다 1만 단어나 더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211쪽

 

제대로 쓰고자 하는, 대상을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쓰고자 하는 집요한 모색은 손택에게서도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해석에 반대한다」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손택은 이를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해석에 반대한다』, 33쪽)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책타래에서는 이 투명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추구를 잘 볼 수 있는 두 편의 저작을 권하려 합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된 「해석에 반대한다」로,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고수하며 예술을 ‘진술’로 축소하고 작품의 진술을 ‘해석’하는 데에 치우친 당대의 예술 비평을 격렬하게 비판한 글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약 10년 뒤 쓰인 「은유로서의 질병」입니다. 손택은 이 글에서 결핵과 암을 소재로 질병을 은유화해온 오랜 역사에 관해 다룹니다. 그리고 병을 병이 아니라 은유로 해석하는 일이 야기하는 낙인 효과를 이야기합니다. 한국에는 이로부터 약 10년 후 쓰인 「에이즈와 그 은유」와 하나로 묶여 출간되었습니다.

 

“진짜 예술에는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해석에 반대한다』, 26쪽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해석에 반대한다』, 35쪽

1998년 10월, 와이오밍주의 래러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게이 청년 매슈 셰퍼드가 혐오범죄를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극단 ‘텍토닉 시어터 프로젝트’는 공연예술가로서 사회적 사건을 둘러싼 담화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이 사건을 연극으로 다루기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들이 택한 방식은 먼저 래러미 주민들을 만나 사건에 관해 듣는 일이었습니다. 극이 완성되는 데에는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결과물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일종의 다큐멘터리 희곡이 됩니다.

텍토닉 시어터 프로젝트의 극에서 중요한 단위는 전통적 연극의 단위인 ‘장면’이 아닌 '순간(moment)’입니다. 이들의 희곡은 브레히트의 에세이 「거리의 장면」에서 언급된,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사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방식으로부터 발전된 기술인 ‘순간 작업(moment work)’을 통해 쓰입니다. 배우들이 실제 인물을 만나 경험을 수집하고, 단원들이 그것을 극으로 구성하고 의미를 찾아내며, 극단 전체가 공동으로 그 구조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지요. 이 책에 실린 「래러미 프로젝트」와, 10년 후 다시 래러미를 찾아 쓴 「래러미 프로젝트: 십 년 후」에서는 텍토닉 시어터 프로젝트 특유의 이런 접근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데에 어떤 효과를 지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비극을 맞이한 한 평범한 마을이 이를 어떻게 다루고자 하는가, 그리고 예술은 바로 이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기록하고 또는 재현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아주 성실하고 감동적인 작업입니다.

 

“로저 슈미트 신부: 여러분들은 여기 자료 조사를 하러 오셨겠죠. 그런데요. 저는 이럴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일을 희곡으로 쓴다면, 전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포즈) 제대로 말할 거라고, 옳게 말할 거라고. (……) 진실만 다루어 주세요. 진실이 뭔지 아시죠. 그걸 올바르게 말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래러미 프로젝트』, 84쪽

오늘 책타래에는 특별 기고가 함께합니다. 대중문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에서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와 나란히 경험하면 좋을 대중문화 콘텐츠 큐레이션을 보내주셨어요. ‘콘텐츠 로그’는 이 책을 읽고 어떤 작품을 떠올렸을까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가 궁금하다면 여기😎)

(편집자Y의 지난 10일 동안 가장 좋았던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여기😍)

이 책의 「최대 노출」 챕터 속 미국인 사진작가 애니 아펠은 휴가차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의 한 판자촌에 다녀온 후, 앞으로 25년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신하게 됩니다. 그는 “아기가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나중에는 부모가 되어 또 아이를 낳는 내내”(181쪽) 2세대에 걸친 한 멕시코 가족을 촬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결과물로는 2만 3000여 프레임이 남았고요. 이 책에서는 “애니를 헌신적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테고, 집착적이라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181쪽)고 하며, 장기 프로젝트에 온몸을 던진 사람의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애니 아펠은 레슬리 제이미슨에게 당신의 글과 나의 사진 사이에서 동류의식이 느껴진다는 요지의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해요. 그 동류의식이란 아마도 제가 영화 「보이후드」를 연출한 리처드 링클레이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의 전부인 ‘그러나 결국 해내고야 마는 무모함’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 영화는 6세 소년 ‘메이슨’의 성장기를 아역 배우 ‘엘라 콜트레인’을 실제로 12년에 걸쳐 촬영해 만들어냈어요. 이 영화에 투자된 시간은 한없이 길지만 할리우드 영화산업 기준 저예산 영화로 평가받는다는 건, 애니 아펠이 “어떤 유의미한 재정 지원도 없이” 촬영 프로젝트를 해나간 것과 공통점을 가지기도 합니다.

한편,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또 다른 영화 「메릴리 위 롤 얼롱(Merrily We Roll Along)」을 무려 20년간 제작할 계획을 밝힌 바 있는데요. (모든 일정이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 관객은 이 영화를 2041년에 볼 수 있게 되는데 그즈음 감독은 81세가 된다고 해요. 과연, 우리는 함께 이 영화를 보고 후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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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에서 레슬리 제이미슨은 '타인의 삶'을 쓰는 문제에 본격적으로 직면합니다. 온갖 종류의 글을 쓰는 그는 여행잡지로부터 의뢰받고 난 후 “잡지에서 내 글에 원했던, 자그마한 일화로 만들어 구슬 팔찌에 엮기 좋은 이국적인 경험들을 제공한 것"(139쪽)이라며 노련하게 감을 잡는데요. 그런가 하면, “논픽션 글에 실리기로 동의한 사람들은 기사 또는 책이 나온 뒤 각자 쓰디쓴 교훈을 얻는다."(64쪽)는 점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제 삶의 주인공이 아닌 그럴듯한 글감으로만 머물지 않도록 아무리 애를 써도, 용기 내 목소리를 들려준 취재원을 다치지 않게 하려 아무리 조심해도, 이는 남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가진 한계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에세이스트와 싱어송라이터가 하는 업의 본질에는 크게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일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조금씩 끌어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때로는 분열하게 되니까요. 헤이즈 미니 6집 「Lyricist」 타이틀곡 「작사가」는 자신이 하는 일의 모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필 작사가가 돼 / 난 널 얘기해야 해”라는 한 줄의 가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죠. 혹여나 싱어송라이터 헤이즈의 음악들이 허구한 날 사랑 타령만 한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있다면 이 노래를 들어주시길요.

 

“난 내 글 안에선 널 지켜주지 못해 / 어떨 땐 생각해 난 저주를 받은 듯해 / 들려주고 싶지 않아도 써야만 돼 / 메모해야만 돼 넌 원하지 않는데도”(헤이즈 「작사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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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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