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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2023)에서 갓 죽은 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을 향해 접수원은 이렇게 말한다.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과테말라 개미핥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고요. 왼쪽 문으로 나가면 지금 살았던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공이 n번 환승하는동안 그에 비례하게 n번의 물음표를 건네는 접수원 역은 바카리즈무가 연기했다. 바카리즈무는 <브러쉬 업 라이프>의 출연자일 뿐 아니라 각본가이기도 한데, 그는 일전에도 드라마 <가공OL일기>(2017)의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각본까지 쓴 전적이 있다.
<가공OL일기>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동안 편당 20분의 러닝타임, 총 10부작의 이 드라마는 우리의 인내심과 기대 사이를 내내 효과적으로 조종한다. 몇 번이나 맥이 빠지지만, 바로 그게 이 드라마의 정수다.
“우리는 월요일을 의인화해서 험담하는 것으로 우울함을 누그러뜨린다”는 나레이션이 흐르지만 <가공OL일기>를 오피스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든 회사는 제각기의 방식으로 전쟁터인데, 오피스물이라면 좀 더 회사를 배경으로 스펙타클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구내식당의 메뉴가 치즈함바그였다가 갑자기 두부튀김으로 바뀌었을 때 묘하게 분개한다. 탕수육의 익힘 정도를 구내식당에서 크게 기대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실패한 점심 탕수육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같이 퇴근 후에는 회사 근처 중식당에 간다. 그리고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 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2차는 카페로 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더도 덜도 않고 조직에서 일하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 그 자체다.
물론, 주인공과 은행 동료들에게는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한 구석이 있다. 공공의 적인 상사가 한 번 말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길이, 요즘 혼자만 미는 것 같은 재미 없는 유행어, 말을 걸 때 너무 가까이 들이미는 얼굴 등, 단지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상사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을 낱낱이 해부하며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지 재확인한다. 가끔 주인공 ‘나’는 속으로 이렇게까지 뒤에서 누군가를 가루가 되도록 빻아버리는 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는동안 시청자들은 중년의 남성 배우인 바카리즈무가 20대 중반의 ‘OL(오피스 레이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남성 상사의 말과 행동을 공격하는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진짜처럼 연기하는 거죠?
* ‘OL’(Office Lady)은 결혼하지 않고 일하는 2-30대 여성을 지칭하기 위해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어 왔지만, 이런 시대착오적 용어가 드라마 제목에 포함 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바카리즈무는 2000년대 중반에 은행에 출근하는 OL인 척 하면서 가명으로 블로그에 <가공OL일기(架空OL日記)>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써내려간 것이지만 사람들은 작성자가 진짜 ‘OL’일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실적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가공OL일기>는 추후 동명의 책, 드라마, 영화로 각색 됐다. 나는 <가공OL일기>를 이러한 일련의 정보를 모르는 채로 보았는데, 마치 파워블로거들의 영역싸움에서 자유로우나 정기적으로 기능 업데이트는 되지 않고 있을 정도로 방치된 게시판에 일일 연재되는 포스팅을 보는 기분을 안겨주는 드라마같다고 생각했다.
02.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SNS #진정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