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오랜만에 받은 선물이 구두 한 켤레라니. 평소 운동화를 즐겨신는 나는 구두를 어색하게 바라봤다. ‘같이 입을 옷도 없는데’ 솔직하게 투덜거리기도. 그러나 박스에 함께 담겨 있던 작은 엽서 하나. ‘너의 새 출발을 응원해’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이 선물이 고작 나의 패션 스타일 향상을 위한 의도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일었다.

며칠 후 나는 그속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여야 했다. 또각또각, 조금은 뻔한 소리이지만 다른 신발보다 항상 명쾌하게 존재했기에. 울려퍼지는 파동에 영향을 받으며, 그렇게 길을 걷고, 앞으로 나아가고, 가끔은 쉬다, 다시 소리가 들려오면 화들짝 정신 차리고 스스로 출발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 이따금 나는 청바지 아래에 이 구두를 신는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의 자신감, 나아가는 사람의 지독히 독한 근성의 많은 부분이 또각 구두로부터 나온 게 아닐까 상상한다. 

에디터 허아란

닥터마틴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패션 모델 ‘아기네스 딘’의 사진을 본 후부터다. 숏커트 헤어에 펑크한 스타일로 런던 거리를 활보하던 그녀. 지금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의 뮤즈가 되고 있는데, 이렇게 시대를 넘어 꾸준히 회자되는 모델은 패션이라는 좁은 카테고리 안에서도 극히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 

아기네스 딘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거든. 그녀는 부드러운 실크 원피스 아래에 투박한 닥터마틴을 신고, 백팩을 무심하게 두른 사람이었다. 시그니처인 닥터마틴 구두는 다른 옷들과 포개어져 감칠맛을 냈다. 당시 처음 등장했던 그 기괴한 하모니는 아기네스 딘이 가진 오묘한 매력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이상한 것, 어지럽게 뒤섞인 것, 도저히 함께 입을만한 것이 아닌 이들을 한꺼번에 포용하는 자신감. 그러니 만약, 누군가 어마어마한 패션 뮤즈가 되고 싶다면, 브랜드를 더 공부하고 옷을 많이 사는 것이 빠르고 올바른 길이 아니겠다. 더 이상하게, 더 기괴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디렉터 김유진

신발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앞으로 보내게 될 하루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이 그때쯤이거든. 포멀한 옥스퍼드 슈즈, 편안한 운동화, 캐주얼한 로퍼, 높고 가녀린 힐 등. 어떤 페르소나를 입힐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바로 그 시간이다.

운동화만 신던 네가 처음 구두를 신고 온, 그 해의 놀이동산이 떠오른다. 한 번의 즐거움, 또 다음 즐거움을 누리려 한참이나 걷고, 기다리고, 때로는 순전히 지쳐 걸어 다니기만 하던 날. 너는 분명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예쁜 구두를 신으며 '오늘의 신데렐라'가 되고자 했을 텐데, 넓디넓은 놀이공원은 그런 너의 상상을 짓누르며 현실을 보라 한다. 그때 네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진짜 진짜 편안한 구두’는 내가 선물하겠다. 신데렐라보단 귀여운 앨리스가 네게 잘 어울린다고 설득하면서.

아티스트 하한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