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과 펜을 든 할머니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해보세요!


“이렇게 발음하는 게 맞아요?” “어떤 맞춤법이 맞나요?” 타 부서에서 종종 아나운서국으로 이런 질문 전화가 온다. 직업이 아나운서다 보니 지인에게도 자주 듣는 질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표준어가 아니었던 말이 오늘날엔 표준어가 돼 있어 가끔 헷갈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이젠 겸허하게 한 번 더 사전을 검색하거나 때론 국립국어원에 묻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말은 평생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다.
 
맞춤법을 잘 아는 것 이상으로 이 시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덕목은 표현 속에 담긴 의미를 면밀하게 살피는 감각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에 관심을 갖고 어떤 표현을 지양하고 혹은 선택해서 쓸 것인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특정 단어에 편견을 담고 있진 않은지, 표현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진 않은지. 우리말에 관해 적극 논의하고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MBC 장수 프로그램 〈우리말 나들이〉는 아나운서가 직접 PD가 돼 아이템을 선정하고 연출한다. 나도 2년 동안 〈우리말 나들이〉 PD를 맡은 적 있는데, 표현의 대안에 대해 고민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했다. 

익숙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성 역할에 편견이 있는 단어들, 예를 들어 아이들의 교통 지도를 하는 ‘녹색어머니회’는 ‘녹색학부모회’로, ‘유모차’는 ‘유아차’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생방송을 진행하면서도 다른 대안을 고민하는 순간이 자주 있다. 살림 아이템을 소개할 때 흔히 쓰는 ‘주부님들’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 어학사전을 보면 주부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사람’ ‘한 집안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사람의 아내’로 쓰여 있다. 주부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돼 있는 것이다. 아직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했지만 ‘주부’ 대신 ‘살림하는 분들’로 부르려 한다.

최근 한 모니터 프로그램에서도 이에 대해 비슷한 지적이 있었다. 살림 팁을 전할 때 출연자가 100이면 100이 여자인데 이제 남성이 살림하는 경우도 많으니 남성도 살림의 고수로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방송의 역할은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시화하는 것이니까.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또 다른 단어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표현이다. 친근함을 더하려 출연자를 할머니, 할아버지라 칭하는데 가끔 그런 호칭이 개인의 개성과 색깔을 가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상에서도 사용이 늘어난 어르신,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출처 Unsplash

아나운서가 말에 시대를 반영해 나가는 속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사회의 인식 변화에 발맞출 것인가, 그보다 보수적으로 한 박자 늦게 움직일 것인가. 언젠가 부부의 날인 5월 21일에 프로그램 오프닝에서 부부의 날을 설명하면서 해석을 덧붙였었다. 본래 부부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21일이 됐다지만, 둘이 만나도 둘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다. 의미는 잘 알지만, 각자의 독립성을 지키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많은 시청자 또한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한 커뮤니티에서 마치 결혼을 부정하는 것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또 다른 프로그램에선 친구 부부의 신혼 집들이에 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딸 같은 며느리’라는 표현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며느리는 며느리지, 결국 딸이 될 수는 없기에 과한 기대 대신 며느리로서 역할을 하며 시댁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면 안 되는 걸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 장면 또한 일부 커뮤니티에서 왜 남의 집에 가서 콩 놔라 팥 놔라 하느냐며,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는 해석까지 나아갔다. 

생각은 다양하고 누군가의 의견이 맞다 틀리다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런 의문은 들었다. 가족 안의 여러 갈등이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해 주지 못해서 각자의 역할에 의무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지,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서로를 존중하고 싶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닐는지.

사랑이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나는 서로의 주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생각을 담는다. 각자의 삶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말. 나는 그런 말을 사랑하고,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말들의 힘을 믿는다.



Writer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를 펴냈다. 
- <엘르> 2022년, 5월호 발췌


채워지고 싶은 마음_요주의여성 #57
드라마가 보여준 적 없는 속마음.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

JTBC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 김지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것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낸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한테 난 그렇게 평범하진 않겠죠. 누구인지도 모르는 당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나지지도 않은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취업을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서울에 집을 알아보는 거였어요. 인천시민으로 살면서 기나긴 1호선 전철과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며… 힘들었거든요. 첫 수업을 듣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고, 시간에 쫓겨서 다른 애들처럼 클럽에서 놀지도 못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올 때 느껴지는 피로한 삶의 냄새들.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매일 전철에서 흔들리고 사람들에 치이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어요. 미정이처럼 마음속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진 않았지만, 나 역시 채워지지 않은 마음에 버석거리던 때가 있었어요. 기정이처럼 자꾸만 한숨이 나오고 누워있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예뻐지고 싶어”라고 읊조리던 때가.  

JTBC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누구나 자신이 ‘계란 흰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출퇴근에 세시간이 걸리는 경기도 구석 어딘가에 사는 ‘촌스러운’ 삼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아저씨〉를 썼던 박해영 작가는 이번에도 초라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통해 인생의 고독과 ‘존재의 의미’를 더듬어 갑니다.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를 비롯해 등장 인물 하나하나 애틋하지만 그 중에도 ‘미정’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묵묵히 부모님의 밭일을 돕고 언니 오빠의 밥을 차려주는 속 깊은 막내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피곤하고 내가 손해 볼지언정 얼굴 붉히는 일 못 하는 사람.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지만 갑갑한 삶의 굴레에서 누구보다도 ‘해방’되고 싶은 청춘.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하는 미정의 모든 얼굴이 눈에 밟힙니다.

JTBC <나의 해방일지>

그런 미정이 알코올중독자인 옆집 남자를 향해 “나를 추앙해요”(아마도 2022년 최고의 명대사가 될 문장)라고 외치던 순간은 얼마나 놀라웠던지. 예쁘장한 소녀로 기억했던 김지원 배우는 언제 이렇게 ‘추앙’이 어울리는 연기자로 성장한 걸까요.
 
미디어와 언론에서 비추는 삶은 너무나 ‘중심’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억 단위의 부동산 뉴스와 소셜미디어 속 유명인들의 화려한 일상이 실시간으로 전달되죠. 누구나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닌데.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지만 이 세상은 자꾸 나를 조연으로, 루저로 밀어내는 듯한 느낌. 그래서 밀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나날들. 중심에서 비껴 나 변두리에 시선을 둔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버티며 사는 이들의 지친 마음을 끌어안습니다.
 
미정과 구씨(손석구)가 서로를 추앙하고 채워주며 변화하는 모습은 앞으로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겁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청춘기의 쓸쓸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해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보냈던 그 시간들 덕분이겠지요. 부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얻어 뚫고 나갈 수 있길.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과 모든 쓸쓸한 청춘의 해방을 응원합니다.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2년, 5월 웹기사 발췌


➕ 보이스 
엘르보이스가 들려주고 싶은 더 많은 이야기

일곱 명의 할머니 작가들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5월을 맞이해 엘르는 할머니 작가 7인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수술 후 딸과 함께 아파트의 새들을 그리기 시작한 정맹순 작가, 70대에 고양이들의 매력에 빠진 김성일 작가, 얼마전 첫 개인전을 펼친 88세 정선늠 작가, 83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김두엽 작가와 손녀의 치지로 고향 제주의 풍경을 담기 시작한 오경춘 작가, 93세 세상을 떠나기까지 4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던  조무준 작가, 그리고 그림을 통해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한 박옥순 작가까지.

뒤늦게 붓과 펜으로 과거의 기억과 얼굴을 꺼낸 할머니 작가들의 그림에서 세상을 향한 애정어린 시선을 느껴보세요.  

Editors 이마루, 전혜진, 류가영
Art Designer 정혜림
- <엘르> 2022년, 5월호 발췌

오경춘
2019년 전시를 위해 제작된 서귀포시 이미지. 한라산, 산방산, 정방폭포, 귤밭과 동백꽃, 성산일출봉, 범섬, 문섬, 그리고 섶섬을 손녀 양수인 씨와 함께 그렸다. 장지에 물감과 오일 파스텔, 색연필을 사용한 의미있는 작업

정맹순 @bird_books
2020년 1월에 처음으로 그려본 곤줄박이와 손자에게 보낸 편지 글.

김성일 @halmoney_kim
딸의 반려묘 향이가 스크래처에서 자는 모습을 그린 〈피곤해요〉.

🔊지난 주 구독자 보이스🔊
매주 여러분의 목소리 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들의 소중한 피드백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으니 오늘의 <엘르보이스>가 어땠는 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 온갖 혐오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혐오가 약자를 향하는 세상이 싫어지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다정하고 싶고 약자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싶은 마음을 위로해주고 함께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앞으로 더 공감하며, 많은 인생들에게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늘 글 너무 좋았어요. 공감대가 넓어지기에 눈물이 많아지는,, 새로운 관점 신선하고 또 위로가 되네요 ! 엘르보이스 격주가 아닌 매주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최근 파친코가 화제의 작품이었지만 저는 아직 시청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르보이스 스물여덟 번째 뉴스레터의 글을 보고 파친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 받아서 안남기던 의견도 남기게 되었네요.

성인이 되고나서 모든 일에 자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어요. 학창시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왜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지? 싶었거든요! 이번 레터는 자주 우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에게 말해주는 듯 했어요. 항상 엘르보이스 잘 읽고 있습니다👍 요즘 제 최최최애 뉴스레터에욥><

💌  님, <엘르보이스> 스물아홉 번째 레터 어떠셨나요? 
님의 감상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아래 링크에 남겨주시면 정성껏 읽고 다음 레터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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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다양하고 반짝이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길 <엘르보이스>, 나만 볼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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