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최민서 인턴기자가 전 성평등가족부(당시 여성가족부) 차관 김희경 작가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획 노동'에 관한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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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경,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
아이를 위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옷을 세탁하는 과정을 돌봄 노동의 영역이라고 할 때, 냉장고에 부족한 식재료가 있는지 살피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할 일을 생각하는 걸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이가 다닐 유치원의 정보를 수집하고 가족 구성원과 의논하는 일은요?
돌봄을 측정 가능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면 이 지난한 과정들은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돌봄 노동과 살림 전반을 계획하고 정보를 찾고 일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정신적 노동을 ‘기획 노동’이라 칭하고, 기획 노동의 수행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나간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입니다.
기획 노동이라는 새로운 호명 방식은 숨겨진 노동을 조명하는 것을 넘어 그동안 노동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돌봄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과 사고, 판단, 주의력’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획 노동을 포함한 돌봄은 몸과 마음을 쓰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며 필요한 일들을 설계하는 종합역량”인 것이죠. 계획과 조정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집안일보다 더 큰 체력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는 책 제목처럼 보이지 않는 기획 노동은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돌봄 자체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돌봄에 내재한 기획 노동은 더더욱 눈에 띄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모성 본능,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은 효심, 장애인이 자기 돌봄을 꾸리는 것은 생존”인 것처럼 여전히 돌봄은 노동이 아닌 사랑, 감정, 본능의 언어로 불리니까요.
저자는 기획 노동이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것은 “오래된 성별 고정관념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치부해 오면서 돌봄 자체를 본능과 감정만으로 바라본 관행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돌봄이라는 행위에 본능, 감정 등의 저평가 프레임이 붙어있기에 남성이 돌봄을 맡아도, 장애 당사자가 홀로 삶을 살아가도 기획 노동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육아 휴직 등을 비롯한 각종 제도를 통해 돌봄 노동의 물리적 시간은 평등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자녀 양육과 교육 과정을 설계하는 기획 노동의 영역은 여전히 여성의 몫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육아 정보의 기본 소비자를 거의 항상 여성으로 상정하는 정보 환경”을 이야기합니다. 출산 의료비를 지원하는 국민행복카드의 통합 전 명칭이 ‘고운맘카드’인 점이나 육아 플랫폼의 이름이 ‘마미톡’ ‘맘스 다이어리’인 것처럼 육아 정보 환경은 ‘양육을 공부하는 사람은 엄마’라는 고정관념과 성역할 규범을 강화해왔습니다.
기존의 국내 외 기획 노동 연구, 소셜 미디어에서 퍼져가는 기획 노동에 관한 이야기는 맞벌이 부부의 가사 양육 문제만을 다루지만, 책은 더 다양한 사람들의 기획 노동을 다룹니다. 맞벌이 부부는 물론 부모 돌봄을 하는 자녀, 장애아 부모, 장애인 당사자 등을 만나 기획 노동을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종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사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수행 하는 모든 살림과 돌봄”으로 넓혀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장애 당사자와 함께 외출하는 과정만을 돌봄 노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당의 휠체어 접근성, 화장실 위치 등을 찾는 기획 노동 과정까지 돌봄 노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기획 노동은 자녀 양육뿐만 아니라 부모를 돌보는 일, 장애아를 돌보는 일, 장애 당사자의 일이기도 합니다.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 삶이 유지되지 않는 것처럼 필요한 일들을 설계하고 준비하고 기획하는 일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의 일부인 것입니다. 기획 노동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개인의 희생이나 사랑으로만 여겨진 돌봄을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돌봄을 여성 개인의 책임, 가족에게만 기대는 일으로 설계된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기획 노동의 공정한 분담은 더더욱 어려운 작업인 것입니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기획 노동’이라고 호명하는 과정을 이어나가며 계속해서 노동 당사자를 떠올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살림과 돌봄의 기획 노동으로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쓰면서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위안을 전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하는 책은 “우리가 서로 돌보는 사회가 되도록 기획 노동뿐 아니라 돌봄의 구체적 기술과 경험, 감정, 역량, 그리고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보다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돌봄을 저평가해 온 오랜 고정관념을 깨고 돌봄이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길 바랍니다. 몇 달 전 레터에서 소개한 <탐욕스러운 돌봄>과 함께 읽는다면 돌봄과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힐 수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