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Vol.91
"3개월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보고 싶습니다."

한껏 긴장된 모습으로 'PTKOREA'라는 광고 마케팅 회사의 시니어 인턴 면접을 보고 있는 사람은 한 반도체 회사의 부사장이었던 오창규 님입니다. 그는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HP(휴렛 팩커드)에 입사했습니다. 2001년에는 반도체 회사로 이직 후 부사장으로 승진해 16년을 근무했죠. 정년을 5개월 앞둔 어느 날, 인사팀에서 '희망퇴직' 권고를 받았습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그는 퇴직 후 방황했습니다. 30년 넘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회사로 출근했는데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으니까요. 

일을 쉬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한국어교원 자격증, 화물운송 자격증, 스마트스토어판매 자격증 등 각종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과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했고, 카페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해봤지만,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일하는 카페에서 시니어의 자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10곳에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어도 봤습니다. 딱 한 곳,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막상 면접에 가보니 회사는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기존에 부사장으로서 가져온 '인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일자리가 간절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일자리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한줄기 빛처럼, PTKOREA의 시니어 인턴 면접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면접에 합격해 8년 만에 첫 출근을 하던 날을 회상하며 그는 말합니다. 옷을 차려입고 나간다는 자체가 감격스러웠다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고. 

"우리가 실업, 즉 직장의 상실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물결은 새로운 직업을 창출해 내겠지만 오직 준비되어 있는 사람만을 위한 자리가 된다."
-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에서
누군가는 그 정도까지 올라가 봤으면 이제 맘 놓고 쉬어도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부사장 타이틀까지 달았던 사람이 굳이 체면 구겨가며 인턴을 할 필요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죠. 이것은 '일'의 개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창규 님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 일을 했다면, 결코 회사 탕비실에 과자를 채워놓는 업무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일은, 자신이 계속해서 어딘가에 쓸모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것 아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오창규 님이 마케팅 트렌드의 중심에서, 젊은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배움을 얻고, 본인이 쌓아온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창규 님의 이야기를 보며, 부끄러웠던 제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대기업의 타이틀을 달고 3년 반 정도 일하다가 한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을 때, 불만이 참 많았어요. 대기업에선 호텔 화장실 부럽지 않게 화장실이 깔끔하고 크기가 컸는데, 이직한 회사는 직원 수가 거의 100명 정도였는데 여자 화장실 칸수가 2개인 데다가 세면대도 하나뿐이라서 점심시간마다 화장실 대란이 일어났어요. 엘리베이터도 대기업에 다닐 때에는 6개나 되고 속도도 빨랐는데, 이직한 회사는 엘리베이터가 너무 낡고 느려서 출근시간마다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죠. 

그 스타트업에서 퇴사하고 꽤 오랜 경력 휴식기를 가질 때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대기업의 화장실이든 스타트업의 화장실이든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회사의 타이틀과 회사에서 제공해 주던 복지가 곧 '나'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회사의 네임밸류나 직함이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데 있어 분명 좋은 이득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 전체의 보증수표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악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부사장에서 인턴으로. 영화 <인턴>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지만, 저는 앞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더 큰 편차를 경험하게 되겠죠. 인생을 '산'에 비유하여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요. 저는 인생을 '산'보다는 '마라톤'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어요. 골인 지점에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코스를 달려보는 것. 죽기 전에 한 코스만 달리는 것보다는 다른 코스도 달려보며 여러 풍경을 즐긴다면 보다 다채로운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오창석 님의 제2의 마라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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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법은 바로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과거를 기억하는 데 사용되는 능력은 기억력이다. 그러나 미래를 기억해 내는 데 사용되는 능력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없는 현재는 껍데기와 같다.

📝 과거의 성공은 오늘의 변화에 짐이 된다. 성공은 곧잘 우리를 도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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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 발행인 유수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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