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이 전하는 격동의 시대, <효자동 이발사>
 
#한국사 #현대사 #블랙코미디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사적인 영화관의 에디터 챙구입니다. 벚꽃이 만발했던 4월 초를 잘 보내셨나요? 며칠 뒤이면, 4·19혁명이 일어났던 날인데요. 4·19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드러났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4·19혁명에 대한 영화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내 영화 중, 4·19혁명만을 자세하게 다룬 영화는 아직 없더라고요. 그래서 4·19혁명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효자동 이발사>(2004)를 가져와 봤습니다. <효자동 이발사>는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시작하여, 신군부가 등장했던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소시민의 눈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영화는 어리숙한 이발사 ‘한모’를 통해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리 현대사를우화와 풍자를 통해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효자동 이발사> (2004)
  • 감독 : 임찬상
  • 출연 : 송강호, 문소리 등
  • 장르 : 드라마, 블랙 코미디
  • 러닝 타임 : 1시간 56분
  • 네이버 평점 ⭐7.50
※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주의해주세요!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효자동의 평범한 이발사인 ‘한모’는 우이독경과 소귀에 경 읽기를 다른 뜻으로 알 정도로 어리숙한 인물입니다. 또, “사사오입이 뭐예요?”라고 물을 정도로 당시의 정치 상황에도 관심이 없는 소시민이에요. 하지만 어리숙한 그는 순진한 성격 탓에, 사사오입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을 원로 최 씨 아저씨의 뜻에 따라 3·15 부정선거를 적극적으로 도와줍니다. 그는 표를 먹어 없애버리기도 하고, 최 씨 아저씨와 함께 마을 야산에 상대 당의 표를 묻기도 했습니다.

🔍사적인 포인트! - “사사오입이 뭐예요?”

    ‘사사오입’ 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 사건은 1954년 11월 27일 개헌안 투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제2대 대선에서도 당선되어 1차 중임에 성공한 상태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제헌 헌법에는 대통령의 임기는 4년에 1차 중임만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항은 3선에 대한 이승만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었고,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은 개헌을 통해 이 1차 중임 제한 조항을 삭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 재적 203명 중 찬성은 135표로, 통과 기준인 재적 2/3 즉, ‘135.333…‘명을 만족하지 못해 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에서는 반올림을 근거로 국회 재적의 2/3는 135.333이 아니라 135라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투표 결과가 가결이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반올림 논리는 그동안 한 번도 사용된 적도 없었고 근거도 없는 논리였습니다. 정부의 이런 어이없는 논리로 이승만은 1956년 세 번째 대선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1960년으로 돌아와 봅시다. 당시 선거가 뭐였기에, 어리숙한 한모까지 애써가며 부정선거를 치렀을까요?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는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과 조병옥이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선거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조병옥이 기존에 앓던 암으로 사망하여,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단독 출마가 되었습니다. 단독 출마의 경우 유권자의 1/3 이상만 확보하면 당선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아주 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부통령 선거에 있었습니다.

    🔍사적인 포인트! - 부통령이 뭐길래🤔

      부통령은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기재되어 있는 직책으로, 정권상 2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에요.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크기 때문에, 부통령은 그간 거의 유명무실한 자리로 취급되었지만 1960년 당시에 부통령은 굉장히 중요한 자리로 여겨졌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임기 도중 사망했을 시에, 그 자리를 이어받는 사람이 바로 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1960년 당시 85세로 당시 남성 평균 수명보다 약 25세나 더 많았던 노령이었어요. 그래서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이승만이 임기 도중 사망할 것을 고려하여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래서 3·15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이었어요.

      1960년 대선 이전에서부터 이승만과 자유당은 상대 당의 표를 바꿔치기하는 등 부정선거를 저질렀지만, 이번에는 투표 과정에서부터 부정선거가 이뤄졌습니다. 자유당은 주로 농촌, 지방에서 3인조, 9인조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투표소로 들어가 투표한 후, 서로 돌려보며 확인하게 하는 방식이었는데요. 이는 명백하게 비밀투표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투표에서는 40% 사전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오늘날 부재자들을 위한 사전투표 개념이 아니라, 자유당은 유권자 명부를 조작하여 이사 간 사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유권자 명부에 등록하여 유령 투표자 몫으로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투표율이 너무 높아져서 문제가 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노골적이고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정선거에 국민은 분노했고, 4·19혁명이 발발하는 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효자동 이발사>  중
      4·19혁명의 모습

      3월 15일의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인해서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다시 하고, 책임자를 규탄하라.”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을 시작으로 19일에는 서울 각 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여기에 시민들이 가담하여 그 규모는 약 10만 명에 달했습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115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위는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그러다 4월 25일에 대학 교수진이 이승만 하야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사회의 원로이자, 엘리트로 굉장히 존경받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도 교수진을 섣불리 진압하지 못했고, 군대에서 대응이 없자 시민들은 다시 시위를 재개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26일 하야 의사를 발표하고 27일 국회에 사표를 제출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일원이 되다. 


      혁명의 열기가 식고, 한모는 다시 이발소를 운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모의 이발소 앞으로 탱크 한 대가 지나갑니다. 한밤중 시끄러운 탱크 소리에 한모는 나와보는데요. 탱크는 마침 한모네 이발소 앞에서 멈추고, 탱크 안에서 한 군인이 등장해 한모에게 “야, 청와대가 어디냐?” 하고 묻습니다. 한모는 친절하게 알려주면서도 탱크가 지나가자, 어디서 반말이냐며 구시렁댑니다. 이것이 <효자동 이발사>가 표현하는 5·16 쿠데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26사태로 막을 내릴 때까지, 약 16년간 이어졌습니다. 이 긴 군부정권 동안 조용히 이발소를 운영하던 차에 한모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우연히 대통령 경호실장이 한모의 이발소를 방문하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모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영화 속 통치자의 전속 이발사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효자동의 평범한 이발사였던 그는 청와대에서 ‘성 실장’이라 불리며 권력의 중심 바로 옆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서 1·21사태, 유신 체제, 10·26사태 등 박정희 정권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게 됩니다.

      <효자동 이발사> 중
      한모와 통치자의 모습
      🔍사적인 포인트! - 1·21사태와 10·26사태

      1. 1·21사태

      • 1968년 1월 21일, 30여 명의 북한군 게릴라가 남침하여, 서울로 진격했으며 청와대 부근에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체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말하며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 10·26사태

      • 박정희에게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유신 체제도 1978년 즈음이 되면 균열을 맞이합니다.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시위가 발생했고, 이 시위를 진압하는 방식에 대해서 정부 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진압이 너무 과하다고 주장했던 온건파와, 더욱 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강경파로 나뉘었는데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온건파였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강경파였습니다. 이전부터 둘 사이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박정희가 차지철을 좀 더 지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어요. 이에 김재규가 10월 26일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을 가격했고, 둘은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유신 체제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모와 낙안


      영화에서 주인공 한모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또 한 명 등장하는데요. 물러난 이승만도, 권력을 꿰찬 박정희도 아니고 바로 한모의 아들, 낙안입니다. 낙안이는 4·19혁명 당시, 치열한 시위가 일어나는 도중에 태어났습니다. 한모는 손수레에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가다가 시위 현장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시작된 군인의 발포에, 어쩌다 보니 다친 학생 여럿을 태워 도와주게 되고, 이 상황에서 낙안이가 태어납니다. 어리숙한 한모와 달리 낙안이는 냉철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은 영화 내내 진행되는 낙안이의 내레이션을 통해 드러납니다. 4·19 혁명에 대한 낙안이이는 “그날 저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경무대 앞에서는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라고 하며 그날의 아픔에 대해서 위로합니다. 

      <효자동 이발사>  중
      시위 속 출산 장면

      이 과정에서 한모는 권력의 맛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정에 큰 역경이 생기는데요. 낙안이가 정보부에 불려가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모는 생애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최악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 속 한모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어딘가 닮아 보입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들에게 독재 정권의 무서움과 그에 희생되는 일반 사람들을 보여주고, 나아가 권력의 위험함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려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효자동 이발사>  중
      낙안이와 한모

      어느 덧 사적인 영화관에서 열 번째 편지를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늘 관심을 가져주시고 긴 편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100호, 1000호까지 전해드릴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최근 <사적인 영화관>이 스티비를 만드는 팀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를 소개하는 뉴스레터' BE.LETTER.에 소개되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구경가셔도 좋을 듯합니다. 👉 구경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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