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의 진리 "마이쮸 먹을래?"


올해 초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나온(?) 친구들은 그렇고, 앞으로는 어떻게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잊으셨겠지만 50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사연을 적어달라고 요청드렸는데요, 거기에 어떤 분이 이직을 앞두고 있다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법이 궁금하다고 해주셨거든요. 나름의 답을 띄웁니다.

누구에게나 새로운 친구가 필요해요!


친구의 소중함은 나이가 들수록 실감한다던데 나는 엄마를 보며 과연 그렇구나 한다. 엄마는 어디에서나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메이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는 ‘마이너 성격’의 소유자… 메이저-마이너 성격 분류법은 존경하는 테라에게 크레딧이 있습니다.) 성당이나 운동 동호회, 일회성 등산 모임은 물론이고 딱 한번 나갔던 설문조사 알바에서 제일 친한 동네 친구를 뚝딱 만들어온다. 그래서 오랜만에 엄마 집에 놀러가면 텅 빈 집과 마주칠 때가 많다… 자기가 오라고 해놓고…

(텅 빈) 엄마 집에 간 내 모습

살펴본 결과 엄마의 많은 친구들과 엄마는 인생의 형태가 비슷하다. 다 큰 자식이 있고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남편이 있고 부모/시부모나 손주는 있거나 없다. 엄마와 엄마의 새 친구들은 서로의 비슷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아주 다른 것으로 밝혀지는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선뜻 서로의 집에 서로를 초대하고 음식 같은 것을 나눈다. 엄마의 새 친구 이야기를 듣는 건 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때로 엄마의 사교는 새 친구의 정치 성향이나(”## 씨가 전에 수건을 줬는데, 집에 와서 열어보니까 태극기부대 집회 참가하고 받아온 건 거야…”) 맹목적인 아들 사랑 및 자랑(”&&네 놀러갔는데 아들 자랑을 2시간 동안 하는 거야… 그놈의 아들 헬스장 다니는 백수던데…”)으로 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새 친구는 길거리에 말 그대로 널려 있으므로 엄마에게 누군가와 우정의 중단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하다.


그런 엄마의 딸이지만 나는 아주 까다로운 기준으로 친구를 고른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까지는 친구 사귀기 그 자체에 미쳐 있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이야기 보따리를 끌고 나타나고 나는 그 이야기를 한 입에 삼키고 싶어 전전긍긍했으니까. 물론 내 이야기도 꾹꾹 눌러담아 초대형 상추쌈으로 상대방의 입에 우겨 넣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때의 친구 중 지금까지 친구인 이들은 한 손에 꼽고, 누가 내 입에 자기 이야기를 들이밀려고 하면 냅다 도망친다. 사회에서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이들, 그러니까 ‘사회 친구’들이 ‘진짜 친구’보다 많아질 거라고 하면 예전의 나는 그 말을 믿을까?

‘사회 친구’들은 우선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비슷한 이야기에 웃고, 비슷한 이야기에 화를 낸다. 취미 동호회가 아니라 일터에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 9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터에서 함께 부대끼다 보면 결국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남는다. 이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한다. 게다가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친하게 지내야 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마음에 안 들면 스윽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미안하지만 장점 중 하나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사회에서 친구 사귀기는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보다 훨씬 쉽다.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마이쮸 먹을래?’라고 하는 건 매우 큰 리스크를 져야 하는 일이다. 즉시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본분은 친구를 사귀고 사회성을 기르고 까르르 웃고 놀고 가끔 공부도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직장인의 본분은 그저 월급만큼 일하기. 친구를 사귀려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이쮸를 주든 피자를 사주든 그건 대체로 내 인생에 별 상관 없는 일이다. 고맙고 맛있겠지 뭐…

그러니 어디에서든 새로운 친구를 낚아채고 싶어하는, 그런 주제에 마이너 성격인 나 같은 사람은 상대방이 나의 마이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걸 먹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느긋하고 음흉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상대방에게 나는 친절하고 간식을 많이 갖고 다니는 동료일 뿐 ‘친구 후보1’이 아니니까. 사실 엄청난 어떤 행동을 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1) 먼저 2) 친근하고 밝게 3)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 세 가지 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큰 호감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친해진 친구들은 지겨운 매일을 버텨낼 힘이 된다. 어떤 회사에서의 한 시기는 치 떨리게 싫었던 상사로도 지지부진 속을 끓였던 프로젝트로도 기억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백반집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돌솥비빔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던 순간, 직장인이 제일 졸리고 배고프다는 오후 4시에 살짝 지하로 내려가 사먹던 핫바, ‘지금 회의실에 있는 ## 님 표정 최악! $$ 팀장이 또 괴롭혀요?’ 같은 메시지, 라운지에서 커피타임 가지려고 꾸역꾸역 이른 출근을 하던 날들로 기억된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까 이 새끼를 어떻게 없앨까 가열차게 고민하면서도 그러느라 바쁜 와중에 친구들을 마주하면 그보다 반가울 수 없다. 그러니 놀고 싶은 나이란 만 2세부터 만 80세까지를 뜻하는 게 아닐까…

너도 나도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도 마찬가지지
오늘도 길게 떠들고 말았네… 그래서 저의 소중한 독자님께 드리는 요약 말씀. 새로운 사무실에 출근하시면 일주일 정도 적응 기간을 가지신 뒤, 주위를 둘러보시고,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슬쩍 접근해보시는 게 어떨지.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스티커를 노트북에 붙이고 있는 사람, 라운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미소만 짓고 있는 사람, 언제나 자리 주변이 깨끗한 사람(거의 간첩의 증거)을 지켜보다가 기회를 노려 인사를 건네보자.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같이 먹고, 회사 메신저보다 카톡으로 이야기하게 되고, sns 계정을 공유하면… 짠! 이미 여러분은 ‘사회 친구’가 되어 있다.

참 쉽죠? 같은 이야기지만 진짜로 참 쉽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에게 호의적이다. 또 대부분 친교와 우정의 따뜻함을 원하고. 그걸 누군가 먼저 준다는데 거절할 사람은 많지 않다. 거절 당하면 또 어때, 세상은 넓고 친구는 많은 걸. 스드메와 영어 유치원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공유할 수 있는 서로의 이야기가 있다는 건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다. 독자님의 이직과 친구 사귀기와 우정이 모두 행복하길.


[추천합니다😎]
  • 박경리, <토지> 링크 

토지 읽어보셨나요? 짧은 겨울방학을 앞둔 연말이라 그런지 아주 긴 작품이 땡기더라고요. 냅다 시작한 20권짜리 토지(다산북스 버전), 이제 5권까지 읽었습니다. <한강>이니 <태백산맥> <혼불> <아리랑> 같은 대하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요. (<장길산>하고 <임꺽정>은 읽었으니 취향 알 만합니다.) <토지> 5권까지의 감상은 그저 너무 재밌다ㅠ.ㅠ 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요. 길고 긴 겨울밤 심심함에 몸부림치고 계시다면 도전해보세요. 이건 조금 딴소리지만 작가가 못생긴 사람을 정말 싫어한다는 게 은은하게 느껴져요. 외면과 내면을 포함한 못생김이요. 못생김을 묘사할 때 유독 자세하고 경멸이 느껴져서 아 거참 작가 선생 너무합니다! 싶을 지경인데 그게 또 성격 나쁜 사람들에게는 재미 포인트입니다.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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