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왜 20시라고 되어있냐... 지금 봤네...
스스로 공주가 되어봤다
미루고 미룬 이야기를 내일 아침에 과연 잘 일어나서 마르쉐에 갈 수 있을지 의심하며 어쨌든 쓰기 시작하는 일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이룬 덕에 밀린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주의 일기지만 무려 6월 13일 월요일의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그날이 언제냐면, 1997년에는 금요일이었던 나의 생일이다. 지금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직원 수가 많다고 하긴 힘든 회사에서는 나와 생일이 같은 분들이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나 된다. 3이라는 숫자를 확인하자 미리 결재를 받아둔 반차 시간이 왔다. 자비로운 나의 사수분께선 ‘생일에 일하기 싫지 않냐’며 미리 연차 사용을 권유하셨지만 오전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다는 핑계와 연차가 아깝다는 짠순이 마인드를 가지고 반차를 썼다.  
  그래서 반차를 쓰고 무엇을 했는지, 좀 더 정확하게는 무슨 짓을 벌였는지가 오늘 할 이야기다.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주변인들의 예상보다 일을 키웠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를 했는데 일단 생각보다 인원이 많아져서 장소 제공자에게는 파티 바로 전날에 10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장소 제공자는 5명 정도 부르는 것을 추천했다. 의자 개수 때문이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땐 이미 늦은 때였다). 내가 부른 인원들도 있긴 한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좀 해보겠다.
  생일이 월요일 인터라 ‘번개 잡히면 나가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따로 약속을 잡고 있지 않았다. 월요일 저녁 약속은 꽤 부담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일 약 2주 전쯤에 친구랑 치킨을 뜯고 있었는데 자긴 월요일엔 비교적 한가하다는 말을 하길래 ‘그럼 내 생일에 저녁 먹을래?’라고 물었고 친구는 ‘내가 내 공간 빌려줄 테니까 그냥 친구들 불러’라고 답했다. 진짜 그래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진짜 된다고 하길래 월요일 저녁 약속은 부담스러운 시간대이니 한 명 한 명에게 물어보기 전에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이날 파뤼를 한다~!~ 올 사람 있냐~!~라고 물어봤는데 예상보다 많은 답장이 왔다. 축하하러 온다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 그렇게 답장 온 사람들과 따로 연락한 사람들, 장소 제공자와 미리 파티 장소에서 오전 재택근무를 한 언니 대신 협찬받은 얼음과 플라스틱 컵(그렇다 심지어는 보냉백까지 빌려주셨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술을 챙겨와준 사촌동생까지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손목을 왜 그렇게 꺾고 있어...

  웃긴 건 이 날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초면인, 지난번에 만나기로 되어있었지만 나의 컨디션 난조로 만나지 못한 친구의 친구였는데 친구보다 일찍 왔다. 코스트코에서 샀다는 조니 워커 블랙을 들고서. 이런 날씨에 토닉에 레몬 둥둥 띄워서 얼음 잔뜩 넣고 해 질 녘에 한 잔씩 마셔주면 그만한 게 없는데. 역시. 뭘 좀 안다.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10명이 넘게 오니까 당연히 이 중 한 명은 케이크를 사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케이크를 사 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 내가 그냥 샀지. 지인분께서 ‘그럼 생일 축하 노래 부르고 그런 건 어떻게 했어?’라고 물어보시길래 ‘샴페인 따고 축사 던졌어요’라고 대답했다. 이날 참석하지 못 한 인원을 포함하여 무려 5명의 사람들로부터 8병의 술을 받았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퀵으로 보내줬다. 그 덕에 입맛만 비싸졌다. 미각적 경험을 선물받았다.

  퀵으로 와인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뜬금없이 퀵으로 무언가를 받는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 이상의 에피소드다. 퀵 서비스 기사님의 내비게이션이 이상한 길을 알려주는 바람에 상주하던 공간 주변으로 물건을 받으러 나가게 되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데다가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깜짝 선물이 온 것이므로 신이 나서 나갔다. 기사님 입장에서는 미안한 상황이었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쁠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하이텐션으로 물건을 받았는데 기사님께서 ‘퀵 보내신 분도 되게 나이스하시던데요’라고 말씀하셨다. 선물을 보내준 친구가 여유롭고 예의 바른 친구라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의 선물을 들고 오신, 나와도, 그 친구와도 잠깐 마주친 분을 통해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선물 상자에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느낌이었고, 이 경험을 계기로 내가 선물을 보내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다시 하이텐션 파티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친구 한 명이 이전에 미리 사둔 다이소 공주 귀걸이 목걸이 세트를 들고 왔는데 마침 나도 왕관과 띠를 준비해서 ^_^ 초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으로 공주놀이를 했다. 내가 자발적으로 진행한 공주놀이이긴 하지만 이런 날 아니면 언제 공주 한담? 이런 날도 필요한 것이지. 이런 복장으로 건물 1층까지 친구들 마중과 배웅을 다녀오며 엘리베이터를 뻔질나게 탔다. 마주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사실 누가 봐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날 입겠다고 자라에서 하얀 드레스를 샀는데 아마 한 번 입고 못 입을 것 같다. 두 번 입으면 ‘너는 맨날 그것만 입니?’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 딱 좋은 옷인데 마침 레드와인을 한 방울 흘렸다. 어차피 두 번은 못 입을 것 같아서 아깝진 않았고 오히려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 빙의해서 그녀에 대한 나의 팬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마켓 컬리 없었으면 파티 못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1명이 갔더니 2~3명이 오는’ 그런 잔치였다. 원래 나의 계획은 9시에 폐장하고 정리하고 귀가하는 것이었지만 계획이란 지키지 않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아니 원래는 정말 지키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11시였다. 물론 그전에 집에 간 친구들도 있지만. 그리고 9시 땡! 쳤다고 내보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아마 내보냈다면 나도 같이 나가서 2차를 했을 것 같다. 시간을 나눠서 손님을 맞이하고, 그때마다 간단한 자기소개 (이름과 주최자와의 관계)를 했다. 이걸로 부족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들 알아서 잘 놀길래 나도 그냥 내 양옆에 앉은 친구들이랑 놀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친구들 사진 찍어주려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준비했는데 내가 두 번째 필름을 앞뒤를 뒤집어서 꽂는 바람에 (…) 사진을 찍어주지 못 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회용 필름 카메라도 가지고 갔는데 실내에서 플래시 안 터뜨리고 찍어서 사진 속에 보이는 게 없다. 흐릿한 실루엣만 가득한 한 롤이 나왔다. 그래서 얘들아 안 보내주는 게 아니라 못 보내주는 거야…

  그래서 뒷정리는 대체 어떻게 했냐, 물어본다면 다음날 치웠다. 장소 제공자가 ‘야 그냥 내일 와서 치워’ 이러길래 아침 9시에 맞춰서 와서 재택근무하면서 짬짬이 치웠다. 지저분한 일회용품은 일반 쓰레기로 버려도 되지만 우리 할아버지랑 26년 동안 산 탓에 최대한 씻어서 재활용으로 버렸다. 내가 이렇게 버려도 미국 애들이 막 버리면 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금 천천히 가고 싶다.
  아니!! 그리고!! 썰이 더 남아있다. 하… 일단 한숨 한 번 쉬고. 파티 당일에 사실 꽤 피곤했다. 친구들 한 명 한 명 다 밖으로 배웅을 나가기도 했고, 텐션이 높은 상태로 꽤 여러 시간 있었는데 술도 좀 들어갔기 때문이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도 못 지우고 옷만 갈아입고 잔 정도라 그날 받은 모든 선물과 짐을 챙겨오진 못했다. 그런데 앞에서 뭐라고 썼는가? 술 선물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난 사실 이 정도 인원이 모이면 봄베이 사파이어 750ml는 다 마실 줄 알았다. 보통 진토닉에 진이 30ml 정도 들어가니까 이거 한 병이면 25잔 정도가 나올 것이고, 10명이 넘게 모이면 그거 다 마실 줄 알았지. 참고로 샴페인 1병, 와인 3병을 더 챙겼고 (내가 마시려고 사놓은 거 다 들고 감), 당일 선물로 받은 프로세코도 당일 소진했다. 심지어 난 와인 마시느라 진토닉은 입도 안 댔다. 섞어마시면 취하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나 포함 3명 남았을 땐가, 워스키소다 마심ㅎ).
이 사진이 영정사진 될 뻔했단 말이야
  그래서 크고 작은 (대부분 큰) 술병이 6병, 전 날 입었던 원피스, 폴라로이드 카메라, 재택근무하려고 가져간 회사 노트북, 포토샵 때문에 가져간 개인 노트북, 전 날 음악 틀었던 아이패드, 다 못 챙긴 선물까지 짐이 아주 많았다. 그 장소에서 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는데 그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고, 오후 6시가 좀 지난 퇴근 시간에 유리병으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택시 한 대가 오길래 얼른 잡아서 탔늗데 기사님의 운전 매너가 구렸다. 진짜 구렸다.

  차가 막혀서 한 번에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없었고, 눈이 있다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기사님은 속도를 냈다. 짧은 거리에서 속도를 내고 급정지하는 바람에 이마트 쇼핑백 속에서 유리병들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거기까진 뭐, 그러면 안 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성격 급한 나도 차가 막혀서 그다지 만족스러운 귀갓길은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곧 이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 도로가 차가 자주 막히는 도로가 아니었다면 아마 난 이 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앞 유리 뒤에 달린 블랙박스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백미러가 없었다. 거울이 달려있어야 되는 위치엔 플라스틱 틀만 자리하고 있었다. 시발… 심지어 기사님께서는 차가 설 때마다 유튜브에 들어가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상을 보진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것 마냥 유튜브 피드를 내리고, 계속 확인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때까지 어떻게 택시 영업을 한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발 아무 일 없이 내리게만 해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단골 카페 사장님께서 빌려주신 보냉백을 돌려드리기 위해 카페로 향하고 있었는데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을 때 택시 미터기를 확인한 후 눈을 돌리다가 핸들을 봤다. 핸들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있었는데 그 쪽지에는 ‘정신 차려라’ 라는 5 글자가 쓰여있었다. 아니 시발. 정.신.차.려.라. 라니. 누가 자동차 핸들에, 그것도 손님 태우는 택시에 그런 걸 붙이고 다녀요. 이 기사님이 붙이고 다니네. 2차선 도로에서 30미터 남짓한 거리를 달리며 나의 안녕을 빌어본 적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었으면 한다.

  그렇게 심장 떨려 하며 간 카페에서는 어제 파티에 왔던 동네 친구와 오랜만에 얼굴 보는 동네 언니와 너무나도 감사한 사장님이 계셨다. 내가 살아서 내 두 눈으로 이 얼굴들을 다시 보다니. 시발. 감격스러운 이틀의 마무리였다. 아니 사실 이날 받은 와인을 같은 주 금요일, 그리고 그다음 주 화요일에 마셨는데 너무 감격스러운 맛이었고, 아직 리슬링이 한 병 남아있으므로 감격스러움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간의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대충 이렇게 하고 왔다갔다함
물론 옷 따로 챙겨가서 갈아입은 것임
  월요일부터 시간을 내어준 친구들, 애정과 축하의 메시지를 잔뜩 남겨준 친구들, 판을 벌릴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해 준 친구 (얘 아니었음 생각도 못 했을 일) 와 적극적으로 잔치 여는 것을 도와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신체적으로 꽤 피곤한 일이긴 했다. 당일에는 ‘애들이 시간 내서 와줬는데 재미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공주병 맥스가 이루어낸 하이텐션을 여러 시간 동안 유지하며 마중과 배웅을 반복하며 여러 번 건물을 오르락내리락 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에는 파티에 미쳐서 읽지 못한 축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그날 와준 친구들에게도 와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돌렸다. 파티 이틀 전에 친구의 결혼식에 갔었는데 ‘아 이것도 이렇게 피곤한데 결혼식은 오죽하겠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또 하라고 하면 또 할 것이다. 일단 이렇게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내 손으로 내가 공주되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어차피 저녁에 친구들 만나서 술을 마실 거라면 이렇게 마시는 것이 천 배 정도 더 재밌는 것 같다. 자꾸 나한테 송년회 열어달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장소가 생긴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 일단 나의 취뽀를 응원해달라. 대체 뭘 믿고 자꾸 나한테 송년회를 열어달라고 하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긴 하다.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 쓰고 보니 생각보다 별로 없다. 이날 파티 준비했던 내용은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워서 블로그에 적어볼까 한다. 그냥 음식 사고 그랬던 거 정도. 아니 근데 봄베이 사파이어가 남은 것도 놀라웠는데 18캔 주문한 캐나다 드라이가 9캔이나 남았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다음 날까지 보냉백 속에 얼음이 녹지 않은 것만큼 충격이었다.

  마지막으로 생일파티를 여는 데에 영감을 준, 몇 해 전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해 줬던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게스트하우스 빌린 다음에 15명 안팎의 인원을 초대한 파티였는데 그 당시 친구 어머님께서 그 친구에게 ‘ㅇㅇ아 정신차려 여긴 미국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는 게 계속 생각난다. 음… 그렇게 치면 나도 뭐… 처음 보는 사람도 왔는데… 역시 친구는 끼리끼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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