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우주론은 ‘우주-성전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성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칼럼에서 우주를 성전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그 성전에서 복무할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점을 언급해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인간론은 ‘인간-제사장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제사장으로서 우주 성전에서 복무하며 제의적 의무를 감당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의적 의무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두 단어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경작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와 “지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마르”입니다.
두 단어는 서로 짝을 이루어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 성막/성전 “직무”를 “지키는” 제사장들의 업무를 상정하며 약 5회 정도 병렬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약 10회 정도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을 가리키면서 병렬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적 인간이 우주 성전에서 지켜야 할 제의적 의무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켜 살아가는 것”과 “온 우주를 지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제의적 의무는 결과적으로 온 우주를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하고 피조물들이 화평하게 하며 피조 세계 모든 곳에 안식이 깃들게 만드는 목적을 지녀야 합니다. 성전의 제의적 기능이 바로 이 세 가지, 곧 임재와 화평 그리고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온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이 주시는 화평 그리고 안식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며 확장하고 이내 그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도록 삶을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인간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정체성을 지니고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제사장이라는 기능적 정체성 이전에 존재론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의적 사명은 기능적 정체성으로서 존재론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개념입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6-28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설명하고, 2장에 이르러 명료해지는 기능적 정체성의 서론을 소개합니다. 본 구절에 소개된 인간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형태와 관련한 ‘신인동형론’을 뜻하는 것일까요? 집단 분류와 우열에 관한 ‘종(species)’의 문제를 암시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소통에 관한 ‘영적인(species) 차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장구한 신학의 역사는 이 모든 것에 관한 관심을 드러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 상상의 영역으로 비약하기 이전에 성경은 형상을 무엇과 관련해 소개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형상”을 “우리”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언급하신 “우리”, 곧 1인칭 복수형과 관련됩니다. 기독교 전통은 이를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풀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구약 유대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기원후 2세기에 이르러 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정립된 후대의 개념으로 그 이전 시대 용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접근입니다.
분명 우리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창세기 1:26-28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 곳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자신이 여럿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라는 점을 분명히 소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논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발견되는 배경과 사고를 기반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우리”라고 소개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구약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곧 1인칭 복수형과 관련하여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첫째, 심사숙고의 복수형입니다. 구약의 맥락에서 하나님이 1인칭 복수형으로 자신을 표현하신 구절은 창세기 1장 외에 3장과 11장, 그리고 이사야 6장이 있습니다. 이중 창세기의 사례들은 모두 하나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 관해’ 심사숙고하시는 장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경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심사숙고하실 때 1인칭 복수형으로 자신을 표현하셨고(창 1:26), 3장의 경우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인간이 따서 먹자 하나님이 이를 두고 근심하시고 통렬히 여기실 때 1인칭 복수형으로 자신을 표현하셨습니다(창 3:22).
또한 11장의 경우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교만을 하늘까지 쌓아 올리려 하자 하나님이 이를 두고 심판하시기로 마음을 다지실 때 자신을 1인칭 복수형으로 표현하셨습니다(창 11:7).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1인칭 복수형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 용례들은 모두 인간에 관한 주제, 특히 인간의 지위와 관련한 문제를 다룰 때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1인칭 복수형이 ‘인간의 지위’, 곧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암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해 심사숙고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시는 점은 인간이 심사숙고해야 할 만큼 중요하거나 혹은 복잡하고 난해한 존재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심사숙소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매사에 심사숙고하며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공동체와 더불어 회의하고 대화하는 존재여야 함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 용법의 두 번째 이해를 통해 더욱 명료해집니다.
1인칭 복수형과 관련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대화의 복수형입니다. 창세기 외에 하나님이 1인칭 복수형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 장면은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를 다루는 이사야 6장에서 발견됩니다. 해당 본문은 배경과 상황의 측면에서 열왕기상 22:19~23(미가야 선지자), 욥기 1:1~12/2:1~10(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그리고 예레미야 23:18(거짓 선지자 분류)과 서로 연결됩니다. 학자들은 이 본문들의 배경을 일컬어 ‘천상 어전 회의’(heavenly divine council)라고 부릅니다. 김근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천상 어전 회의에서 하나님이 1인칭 복수형으로 지칭하신 ‘우리’는 명백히 천상의 존재들이 참여한 여호와의 회의를 가리킨다. 이러한 천상 회의에 참석하는 존재는 ‘하늘의 만군’(왕상 22:19; 대하 18:18), ‘하늘 군대’(단 8:10), ‘천군’(시 103:21), ‘군대’(수 5:14; 시 148:2) 등으로 불린다. 이 회의에 참석한 존재 가운데 한 ‘영’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기도 한다(왕상 22:21). 그들은 ‘스랍’(사 6:2, 6), ‘그룹’(겔 10:3, 7~8등)으로, 혹은 ‘천사’(슥 3:1~5)라고도 불리며, ‘하나님의 아들들’(욥 1:6; 2:1)이라고도 불린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사탄’(욥 1:6~12; 2:1~6)도 있다.”
창세기 1장의 ‘우리’는 이러한 천상 회의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이를 대화의 복수형, 또는 의사소통의 복수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본문은 오직 사람만이 천상 회의에서 하나님의 의논을 통해 창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앞서 살핀 ‘심사숙고의 복수’가 의논의 차원에서 대화의 복수형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깊은 논의와 회의 가운데 ‘심사숙고’ 하시며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든다”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지니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복수형으로서의 가치는 히브리 문학 기법 접근에서도 포착됩니다. 창세기 1:26-28의 히브리어 성경 구절을 보면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는 총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분이 그를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다”
세 문장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지만, 점층법을 사용하여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곧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인류, 즉 공동체와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공동체로 존재할 때 성립합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창세기 2장을 통해서 지지를 받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지 않게” 여기셨던 것은 “사람”이 혼자 거하는 모습이었습니다(창 2:18).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이 복수형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함께 거할 때, 공동체로 존재할 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이 존재론적인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글을 맺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공동체를 지향하고 소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라야 기능적 차원, 즉 제사장적 정체성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타자를 대면할 줄도 모르고 소통할 줄도 모르는데, 제사장적 기능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적 정체성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점에서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점에서 “이웃 사랑”이기에, 기능적 정체성은 달리 말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고, 존재론적 정체성은 그 사랑의 조건, 즉 관계를 상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능적 정체성은 존재론적 정체성 위에 서 있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소통하며 협력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온 우주를 보존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러한 논리에 잇닿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본질은 관계와 소통 그리고 사랑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상호 내재하시고 관계하시며 사랑의 춤을 추십니다. 그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도 기꺼이 상호 내재하고 관계할 줄 아는 성경적 인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