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지근한 아침을 맞이하고 심심한 점심을 보낸다.
-아, 지루해.
할 건 많은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온통 미뤄둔 채로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 나태 지옥에 빠진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도 살다 보면 어느 날은 이렇게 늘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나도 받아들인다. 자책으로 이어지기 전에 환기가 필요하다. 이 끈적한 마음에.
싱거운 하루를 위한 자극이 필요하다. 따뜻함이 필요하다. 울림이 필요하다. 아껴 둔 마지막 사탕 같은 영화 하나를 꺼내 보기로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라는 영화를 골랐다. 일본 제목은 ‘기적’인데 한국 제목이 유독 눈길을 끈다. 영화 속 대사 중 한 구절을 그대로 차용한 것인데 이름만 봐도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다. 보지도 않은 채 보관함에 담아둔 것만으로도 기적을 품에 안은 것 같아서 행복해졌더랬다. 아무튼 싱거운 얼음 빙수 위에 딸기시럽이 되어 줄 영화를 열어 볼 테다. 고이 간직해뒀던 행복을 마주해보자.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발견했다고 하는 게 조금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기 전과 보고 난 후의 마음이 이리도 달라지다니. 미적지근한 하루가 이렇게 개운해질 수도 있구나. 간질거리는 따스함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영화는 내가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감각을 끌어올린다. 분명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며 흐려진 순간에 심도를 올린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인물들의 대화와 흐름이 자연스럽다. 동시에 영화적이다. 그러니깐 자연스럽지만 다큐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게 현실과 맞닿아있으면 지루하고 심심하기 마련인데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섬세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기적으로 바꿔주는 영화. 평범한 하루에 지나치던 예쁨을 마주한다. 파란 하늘, 도란도란 수다 떠는 너와 나, 안부를 묻는 지인들. 오고 가는 깊은 안녕. 모든 것이 기적으로 빛난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현재도. 과거가 되어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이 글도.
- 저는 지금 기적을 쓰고 있습니다. 제 기적이 여러분께 잘 도착했나요? 발견해 주신 기적만큼이나 행복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나치는 작은 아름다움이 온 하루를 가득 채우기를 바라고요. 당장 사랑이 없다고 슬퍼 말고 먼저 사랑해 보려는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사랑의 끝은 아무도 모르니누구도 모르니 주는 사랑이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돌아보면 진심 어린 사랑이 헛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사랑해 봐요. 무엇이든지. 이 글을 읽는 활자 너머의 여러분들이 저의 또 어떤 기적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네잎클로버가 돼주셔서 감사해요.
싱거운 하루가 더할 나위 없는 하루가 되는 건 마음 한 겹 차이 같다. 우리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쉽게 무감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꽤 자주 행복하고 살만해서 무감해지는 것일까. 평범함의 반짝거림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기적도 중복되면 평범해지기 마련이고, 보통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특별하고 감사한 일투성이다. 예외적으로 힘든 일은 중복되어도 자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일 테지. 행복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실제로 우리는 잊으려 애쓰면 더 잊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시련은 늘 선명하다. 선명하게 쿡쿡- 찔러온다. 긍정의 감각은 애써 느끼려 하지 않으면 쉽게 무뎌진다. 행복이 디폴트가 되는 삶은 행복이라는 감정이 괴로워지기까지 한다. 행복한 것이 마땅한데 삶은 늘 그렇지 않으니까. 행복은 디폴트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디폴트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뭐든 답을 정하기보다 유연하게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슬프면 슬프구나.하고 행복하면 잔뜩 행복해하면서. 우리는 쉬이 잊어버리니 이 애틋한 감각을 일깨워 줄 장치들이 필요하다. '기적'같은 영화처럼. 사랑스러운 말들. 다정한 이야기. 마음 귀퉁이가 아릿해지는 노래들이 삶을 구원한다. 어떤 진심들은 많은 이들을 살린다. 생존자들이 서로를 구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구하기로 한다. 어떤 상처는 위로가 돼서 구명조끼를 던진다. 불안하다고 외치는 자는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에 밑줄을 그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