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무더위나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뒤척일 때가 많은 여름밤입니다. 여러모로 번거롭지만 저는 그럼에도 여름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 한여름밤의 꿈 같은 공개방송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비가 무섭게 쏟아지는 일요일이었습니다. 폭우를 뚫고 부천아트센터에 도착하니 꽤 많은 사람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20주기를 맞아 MBC 라디오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마련한 특집 공개방송 ‘여름날의 재회’ 현장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정은임 아나운서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또 2003년에서 2004년까지 <정은임의 영화음악(정영음)>을 진행했습니다. ‘그 시절’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심야 시간 라디오 앞에서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공개방송에는 영화감독 세 명이 출연했습니다. 첫 번째 ‘정영음’이 방송되던 당시 10대였던 김초희 감독은 카세트테이프에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 다음 날 들었다고 합니다. 정영음이 아니었다면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생이던 김태용 감독을 영화에 끌어당긴 것도 정영음이었습니다. 당시 다큐멘터리 영화를 준비하던 변영주 감독은 정영음에 출연해 당당하게 청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관객들이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와 정영음을 기억하는 팬들이 유달리 많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객석의 분위기를 보며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마음이 현재형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영음이 1990년대 라디오 방송 중 현재 팟캐스트로 다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이날 알았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매일, 딸의 방송을 녹음해둔 아버지의 녹음테이프를 정은임 아나운서의 동생이 한 정영음 팬에게 전달했고 그가 그걸 디지털 파일로 바꾸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을 한 팬은 오랜 시간을 들여 마지막 파일을 완성한 다음에야 정은임 아나운서를 보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정은임 아나운서의 아버지와 동생, 그 팬도 자리했습니다. 그 작업 덕분에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1990년대생 청취자도 참석했습니다. 한 명 한 명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 정영음과 관련된 사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합쳐서 약 3년간 방영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장에서 계속 떠올랐던 질문입니다. 유수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해도 아주 어렵게 구해 볼 수 있던 시절, 영화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나눌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였고 그럼으로써 영화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무언가 좋아하는 마음’을 한데 묶어준 프로그램입니다.

그 시절, 정영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김태용 감독이 이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모두 나를 봐달라고 하는 시대, ‘내가 좋아하는 걸 봐달라’고 했던 정영음에 대한 기억이 더 특별하다.” 내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봐달라고 하는 순정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후원 독자님께 보내는 편지에 이 여름밤 이야기를 쓰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희 <시사IN>에 후원을 하는 독자님의 마음도, 어쩌면 기사를 쓰는 저희들의 마음도 그런 순정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마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는 건 저희 <시사IN> 기자들의 몫이겠지요. 이날의 행사를 준비한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의 유려한 글도 <시사IN>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과 함께 부디 평안한 여름되시길 바랍니다.